'맹세의 문화'가 키운 것

[집중이슈 : 맹세야, 경례야 안녕~](6) - 박노자

요즘 들으니 "국기에 대한 맹세"를 그 텍스트를 약간 고칠 뿐 본격적으로는 그냥 그대로 두려 한다고 합디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냥 쓴 웃음이 나오지요. 소련에서 태어난 죄(?)로,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국기에 대한 온갖 맹세들을 급우들과 함께 수도 없이 하곤 했어요. 그런데, 소련이 막상 망하니 이 급우들 중에서는 할복이나 거병은 물론, 약간이나마 신경을 써준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강요되는 맹세들을 달달 외우면 외울수록 냉소만 강화될 뿐이지요. 맹세를 통해 마음 속의 진정한 사랑을 키운 경우를 어디에서 본 분이 계세요?

초등학교 3학년, 제 나이 9살. 제가 그 때에 소년공산당 (피오네르) 입단식을 치르면서 빨간 깃발 앞에서 "심신을 바쳐 모든 힘을 쏟아 공산당의 사업을 복무하도록 할 것"을 엄숙히 맹세했지요. 나중에 거의 다달이, 무슨 행사할 때마다 역시 "공산당 사업을 위한 투쟁에 준비돼 있으라!"는 구령에 따라 "네, 항상 준비돼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거수경례를 했지요. 아마도, 그 구령을 지금이라도 들으면 거의 자동적으로 거수경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도 엄숙한 표정으로 "맹세"를 외쳤던 그 급우들은, 나중에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이야기를 해댔을까요? "아, 저 대머리 발로댜를 보기만 하면 졸나 웃겨 못 참겠구먼. 아까 식을 치르면서 겨우 참은 거야"

이 "대머리 발로댜"는 바로 그 깃발에서 그 얼굴을 나타냈던 블라디미르 레닌이었습니다("발로댜"는 "블라디미르"의 애칭). 강요된 맹세를 하면서도 국가의 의례에 대한 염증만 키운 것이지요.

결국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어쩔 수 없이 거래의 관계인데, 이 관계에서는 국가가 제시할 만한 것이 별로 없다면 아무리 많은 애국 의식들을 강제해봐야 별 쓸모가 없는 것이지요. 구 소련 같으면, 지식 청소년들에게 살아 숨쉬는 혁명적 정신도 진정한 자유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노동계급의 청소년들 보기에는 간부들만 외국에 왔다 갔다 하면서 부럽게시리 잘 사는 불평등한 국가였습니다.

결국 국가로부터 그 충성에 대한 어떤 가치 있어 보이는 보상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에 상당히 냉소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어차피 실생활에서 지켜지지도 않는 공산주의 이상들은 냉소와 조소의 대상이 돼도, "맹세의 문화"가 강요했던 일상적인 군사주의 정도는 잘 뿌리를 내렸지요.

제 급우들의 절대 다수는, 아프간에 가서 "야수와 같은 폭도"(무자헤드)들을 잡아죽이는 것을 "진짜 남자다운 일"로 생각했으며, 학교를 방문하여 "애국 애군 미담"을 나누었던 아프간 침략의 상이병들에게 영웅대접을 해주었지요. 이들이 국가를 별로 정의롭고 평등한 것으로 보지 않았지만, 전우애로 꽁꽁 묶여진 "진짜 사나이의 집단", 즉 군부대를 "남성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겼지요. "맹세의 문화"는 애국 시민을 키울 수 없어도, 살인훈련에 무신경이 된 꼴통 마초 만들기에 안성맞춤입니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의 지배자들이 이 "맹세의 문화"를 이처럼 사랑하는 것이지요.

한국 대학생들에게 여론조사해보면 대다수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북유럽/일본/스위스에서 태어나겠다"고 답합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에 대한 그 무슨 주문을 외우게 해도, 자랑스러운 태극기의 그늘에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태도가 안 고쳐질 것에요. 국민연금이라고는 용돈 정도 주면서도, 제대로 된 실업수당도 교육/의료 혜택도 주지 않으면서도 남성들에게 유럽에 비해 두 배 긴 기간을 여건이 아주 열악한 군에서 보내게 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이게 공정한 거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차피 소수일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주문을 외우게 하는 대신에 사립재단이라도 제대로 감시하여 재단 이월금을 교육 사업에 쓰게 해서 등록금 인상이라도 잡아주었으면 나라에 대한 애착이 강한 시민 키우기에 훨씬 더 주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기 앞에서의 맹세"의 문화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같은 소수자들을 이지매하는 분위기 만들기에 아주 "기여"할 것입니다. 다들 하나같이 맹세를 외우는 데에 혼자 외우지 않는 사람이 늘 배제 당하고 맙니다. "맹세의 문화"는 자신의 마음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혼자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악이지요. 맹세라면 같이 하는 것이고, 개인의 판단이란 이미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맹세의 문화"는 자신만의 얼굴이 없는,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키웁니다. 그게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사명일는지도 모르지요....
덧붙이는 말

박노자 님은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대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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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 태극기 ,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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