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생명의 정치학을 상상하자"

[맑스코뮤날레](전체주제1) - 생명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

앞서 진행된 Andreas Arndt의 ‘시간의 경제’ 발표와 토론이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이진경 교수의 ‘생명의 권리와 자본의 권리’ 발표가 시작되었다. 주어진 발표 시간이 촉박해서 활발한 토론이 없었던 점은 아쉬웠으나, 발표의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군더더기 없이 질의와 토론이 진행되었다.

발표는 생명권에 대한 정의와 생명권을 위한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이었다.
그는 생명복제 시대에 모든 생명이 자본에 대항해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지대가 생명권이며, '생명특허'에 대항한 투쟁이 바로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발표는 인권을 대신할 생명권을 개념화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진경 교수는 생명권이란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생명이란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항상 복수의 요소들이 모여서 구성된 집합체라는 주장이다. 이진경 교수의 '생명의 권리'는 장문의 발제글이지만 아래의 내용으로 압축된다.

세포나 유기체나 집합체 모두가 서로 기대어 사는 집합체라는 의미에서 ‘중-생적’ 공동체다. 전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 공동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서로에게 없는 것을 주고받는 ‘선물의 체계’로 순환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득을 ‘순환의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이 순환의 이득을 잉여가치 형태로 가치화하는 한편, 잉여가치의 증식 그 자체를 위해 순환계를 착취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본이 순환계에 들어가 생명의 능력을 착취하고, 생명을 보호하겠다는 생명공학기술이 자본과 결합해 생명을 외면하고 무시해온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생명권은 인간은 물론 인간 아닌 모든 것이 자신의 생명을 자본의 착취와 권력에서 지키기 위한 투쟁의 지대다. 생명복제 시대는 생명력에 대한 자본의 착취가 유기체 이해의 수준으로까지 침투한 시대다. 생명의 능력을 자본이 착취한 권리를 보장하는 장치인 ‘생명특허’는 생명복제 시대에 생명을 위한 투쟁의 일차적 대상이다.

토론자 홍성욱 교수는 발표 내용을 깔끔하고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면서 질의를 시작했다. 우선 그는 발표의 논점과 내용에 전반적으로 공감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문제제기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했다.

홍성욱 : 생명공학 기술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서술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생명공학 기술 중 발표자가 언급한 자본을 위한 죽음의 기술이 어디까지이며 반대로 효용의 기술이 어디까지인지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생명공학 기술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진경 : 생명은 흔히 초월적이고 비역사적으로 다뤄져 왔다. 하나의 신앙처럼. 하지만 사실 생명 개념은 역사적으로 계속해서 변해왔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정의의 기본 설정은 바로 역사의식이다. 현재 생명 영역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이 현재 어떻게 설정되어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본과 결합되어 있는 현재 상태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에이즈 치료약이 실제로 필요한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절대로 구매할 수도 없는 금액이며, 따라서 판매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한다.

사실 어디까지를 질병으로 볼지, 어디까지를 유용한 과학기술로 볼지를 정의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나의 질문은 구체적인 경계를 어디에 설정할 지가 아니라, 생명을 보호한다는 생명공학기술이 돈이 되지 않는 곳에서는 오히려 생명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현실에서 시작한다.

홍성욱 : 발표자가 언급하는 순환계, 선물의 경제학과 같은 표현이 너무 상징적인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먹이사슬로 이해하는 순환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을 주면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다윈의 논의도 발표자의 주장과는 다르다. 그리고 선물의 경제학 개념은, 전에 폴라니가 지적받았듯이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만 유용한 것이 아닌가.

이진경 : 다윈의 생존경쟁 이론은 멜더스나 스펜서의 논리를 받아들여 생물학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를 전제로 설명한 멜더스와 스펜서의 경쟁 논리가 다윈에 의해서 생물학적으로 당연시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도 정치경제학적 비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먹이사슬에서 희생 개념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사실, 먹이사슬을 개체의 측면에서 보면 희생의 관계라기보다는 적대의 관계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적대하는 관계이다. 그러나 먹이사슬을 전체의 측면에서 본다면 개체들은 ‘서로 기대어 사는 존재’이다. 전체를 이루며 서로 기대어 공생하고 있다. 전체의 측면에서 생명체가 서로 기대어 산다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한다.


토론자 : 발표자가 생명권을 확보하기 위한 방향으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생명특허권에 대한 투쟁이다. 덧붙여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명공학기술 자체를 전부 권력의 도구로 보는 것은 이런 부분을 놓칠 수 있다. 과학기술을 만들고 동원하고 사용하는 그 과정에 권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그 과정에 있는지가 곧 권력의 구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감시의 강화, 직접 민주주의의 강화 등등의 실질적인 방법이 생명공학기술이 만들어져서 사용되는 전 과정에 적용되어 자본에 권력이 집중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진경 : 누가 권력을 가지느냐의 문제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공부해도 실험실, 면허증, 학위가 없으면 나는 과학 기술 권력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만들고 사용하는 자의 조건이 이미 선험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선험적 조건의 바탕에는 엄청난 자본이 존재한다는 것, 즉 자본과 과학기술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나아가서 과학 자체에 대해서도 질문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과학이 순수한 영역에 있지도 않지만,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덧붙이는 말

이 기사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권은영 님이 보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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