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봐! 이 말라야 공산당 여자들은 대단해"

[흐르는 강물처럼](5) 수리아(1951년, 태국 출생)

  수리아
수리아는 태국 남부 얄라 지방의 평화마을에서 남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수리아는 농사일을 하고 거의 혼자 힘으로 고무 추출대를 세우는 일을 하고 있다. 수리아는 집안일과 아들 돌보는 일을 남편과 함께 하고 있다. 아울러, 아픈 회원들을 치료할 시간을 벌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말라야공산당(CPM)과 게릴라) 사람들은 우리한테 정말 잘해줬어요. 그 사람들은 많은 걸 우리한테 설명해줬거든요. 그 사람들은 말라야 역사를 우리에게 가르쳐줬어요. 왜 이 전쟁에서 싸워야 하는지를요. 그 사람들은 태국을 공격하는 데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어요. 그냥 말라야를 해방시키고 싶어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내 첫 남편과 내가 게릴라에 합류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아버지는 나를 가도록 해 주었지요. 적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걸 알고 계셨으니까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

내 가족은 항상 가난했어요(그녀가 울기 시작했다). 제 아버지는 거의, 아니 재산이 없었어요. 우리는 7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어요. 제가 막내고요. 남자 형제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집을 떠났고, 제가 아버지와 함께 집에 살았어요. 초등학교를 1년 밖에 다니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학비를 낼 수 없었거든요. 우리는 태국과 말라야 국경가까이 살았어요.

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배웠어요. 또 아버지를 도와 논을 만들기 위해 숲을 가는 것도 배웠어요. 아버지가 뭘 부탁하시던 저는 했어요. 고무나무도 키웠어요.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를 때리기도 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자주 아프셨고 결국 돌아가셨어요. 7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지요. 아버지는 저에게 잘 해 주진 않으셨어요. 내가 왜 매일 울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심하게 때려서 온 몸에 멍이 들곤 했어요. 내 여동생은 아버지한테서 나를 잡아채서 빼내곤 했어요. 반대로 엄마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고 관대했어요. 나는 엄마를 정말 사랑했어요.

어려서 결혼하다

전 열 네 살에 결혼했어요. 내 남편은 스물다섯 살이었고요. 결혼 후 삶이 달라졌어요. 아버지가 나를 때리는 것은 그만두었지만, 남편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똑 같이 나쁜 상황이었지요. 결혼 직후에 아이를 가졌어요. 그러나 난 너무 어려서 어떻게 아이를 돌봐야할지 몰랐어요. 주변에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 아이는 1년도 되지 않아 죽었어요.

나는 내 남편이 나를 찰 때 마다 복수를 하려했어요. 그것도 두렵긴 마찬가지였어요. 쉽게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이랑 싸웠어요. 우리는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싸웠지요. 신경 안 썼어요! 당시 남편은 날 죽이겠다고 협박했어요. “만약에 날 죽이면, 너도 죽어. 여자를, 니 여자를 협박해?” 그렇게 이야기 했지요.

결국 저는 이혼하자고 이야기 했어요. 그 사람은 거절했지요. 그 사람은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너를 사랑해”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에게 부탁했어요. “만약 나를 사랑한다면 왜 나를 때려? 이래선 안 돼. 우리는 우리 사이에서 옳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해.” 사는 게 어려웠지요. 우리는 매우 가난했어요.

말라야 공산당에 가입하다

공산당을 처음 만난 건 결혼한 후였어요. 남편 동네에서 매우 활발했거든요. 말라야 공산당을 만난 게 열아홉 살이었어요. 우린 그 사람들을 많이 도왔어요. 우리 마을에서는 남편을 포함해 사십 여명이 공산당을 도왔어요. 위험한 건 알았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의 친절에 감동했어요.

게릴라에 가담할 거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태국정부가 공산당을 도운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었거든요. 마을에 밀고자가 있었어요. 게릴라들은 당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매우 의존 적이었어요. 음식을 사야했으니까요. 체포 위험이 점점 커지자 게릴라들은 정글에서 게릴라들에게 합류하라고 권했어요.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중이었지요.

조심스럽게 우리의 선택을 고민했어요. 그들을 잘 알지 못했거든요. 우린 태국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말라야 공산당이고요. 저는 “우린 태국 사람이다. 우리가 가담하면 말라야가 해방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냐?”라고 물었어요. 그들은 해방이 되면 태국에서 살거나 말라야로 가는 걸 선택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게릴라에 합류했어요.

우리는 너무 가난했어요. 적어도 게릴라가 되면 먹고 입을 수는 있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너무 착하고 친절했어요. 우리한테 많은 걸 설명해 주었어요. 말라야 역사도 가르쳐주었고, 왜 전쟁에서 싸워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었지요. 그 사람들은 태국과 싸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어요.

만약에 우리가 게릴라를 도왔다는 이유로 태국정부에 잡혀가면 죽었을 거예요. 산채로 기름통에 넣어서 튀겼을 거예요. 적은 잔인하고 거칠었어요. 태국 정부는 진짜 강도들에게 했던 똑 같은 방법으로 공산당이나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아무라도 처벌을 했지요.

첫 남편과의 갈등

우리 마을에서 열 네 명이 함께 정글로 떠났어요. 내 남편과 나는 함께 떠났는데, 여전히 나에게 나쁜 짓을 했죠. 게릴라가 되고나서 한두 달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매우 힘든 생활이었거든요. 여성으로 게릴라의 삶은 집에서의 삶보다 나쁠 건 없었어요. 어디에 있건 똑 같이 힘들게 일했으니까요.

그러나 내 남편에게 게릴라로서의 삶은 달랐어요. 집안일을 할 필요도 없었던 그는 그래서 게릴라에서 어려움을 전혀 견디지 못했어요. 난 등에 30킬로그램을 지고 다닐 수 있었지만, 남편은 10킬로그램도 못했거든요. 길을 반쯤 가다보면 내가 그 사람을 짐을 종종 들어줘야 했어요.

결국 하루는 게릴라를 떠날 계획을 말하더라고요. 나한테 같이 가자고요. 전 거절했어요. 아무리 어려워도 난 이미 여기에 머무르겠다고 마음을 먹었지요. 그를 따라가느니 산에서 죽는 게 나았어요. 남편이 떠나는 게 별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서 며칠 밤을 샜어요. 그리고 캠프 지도부에게 사실을 알렸지요. 하루는 태풍이 몰아쳤는데, 큰 나무가 그를 덮쳤어요. 즉사했어요. 결국 전 혼자가 되었어요. 생애 처음으로요. 행복했고, 전 결국 자유의 몸이 되었죠.

읽기를 배우다

전 게릴라에서 말라야 말, 중국말 읽기와 쓰기를 배웠어요. 지금 내 남편이 선생이었죠. 당시 전 펜 잡는 법도 몰랐어요. 매일 손을 잡고 하나하나 쓰는 법을 가르쳤어요. 글자를 익힐 때까지 매일매일 공부했지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났어요, 내 신랑도 나를 가르치려고 일찍 일어났어요. 내가 말하는 걸 듣고 잘못된 걸 고쳐주었어요. 나는 공부하는 걸 좋아했어요. 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게릴라에서는 적어도 공부하는 데 돈이 필요 없었지요. 저는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훗날 말라야가 해방되었을 때 내가 받은 교육이 쓸모 있게 하려고요. 저는 신문을 읽을 줄 알고 조금 쓸 줄도 알지요. 1989년 우리가 산을 떠났을 때, 태국 정부는 선생을 보내 태국어를 가르쳐 주었어요.

아이 기르기

게릴라에서의 삶은 힘들긴 했어도 좋았지요. 20년간 게릴라로 살았어요! 현재 남편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어요. 상황 때문에 딸을 떠나보내야 했어요. 정글을 떠난 후에도 그 아이를 찾지 않았어요. 우리는 아들이 하나 있어요. 열 한 살짜리. 세 번째 아이도 가졌는데, 고무대를 세우다 잃었어요. 그리곤 없어요.

아버지는 내가 정글에 있을 때 돌아가셨고, 동지들이 나에게 이야기 해 주지 않았어요. 내가 힘들어 할까봐요. 산을 떠나서 내 여동생이 알려주었어요. 아버지가 나를 많이 그리워했다고요. 게릴라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밖에서 삶은 더 힘들었을 거예요. 너무 가난했고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친척도 없었고요. 완전히 우리 스스로 살아야 했어요. 그런데 게릴라에서 우리는 서로 도왔지요. 그렇다고 수풀과 산에서의 삶이 쉬웠다는 건 아니고요. 우리가 주로 걱정했던 안전한 곳으로 후퇴해야 할 때마다 적이 우리를 침입할 건가, 어떻게 싸울건가 그런 거였지요.

지뢰매설...목숨을 걸고

  정글을 떠나기 직전의 수리아
정글에서 우기는 한 해 중 최악이었어요. 민간 병사로, 그러니까 나는 정글의 주변부 마을에서 계속 살고 있었어요. 비가와도 우리는 대중사업을 하러 정글을 떠나야만 했어요. 대중사업은 말 그대로 대중들과 함께 하는 사업이지요. 선전 사업도 하고, 교육 사업도 하고, 동조자들로부터 물량을 받기도 하구요. 우리는 식료품 같은 것은 사야만 했어요. 저는 물건 살 때 돈을 담당하고 있었어요.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저 또한 저의 동지들을 이끄는 사람들 중 하나였어요. 전 동지들에게 지뢰묻는 법도 가르쳤어요. 매우 위험했지요. 대단히 조심해야 해요. 지뢰는 규정대로 놓아야만 하고요, 그 다음에는 연결을 시켜야 하는데 잘 못하면 우리가 죽기도 하고요. 한 동지는 어디에 지뢰를 묻었는지를 잊어버려서 죽기도 했어요.

저한테는 그런 일은 없었어요. 전 아주 세부적인 사항까지 기억을 했거든요. 전 혼자서 지도를 만들고 잠을 잘 때에도 계속 생각했어요. 지뢰 하나 두 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한번에 200개에 300개의 지뢰를 다루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물론 그걸 혼자한 건 아니죠. 우리는 7명이 팀으로 묶여서 일을 했어요. 우리는 서로서로 기억하도록 도왔죠. 우리가 지뢰지대에 도착하면 우리는 더 조심했어야 했어요. 지뢰 하나 두 개를 잘 못 보고 죽음의 길에서 겨우 도망친 적도 있었어요.

어떤 때는 나뭇잎이 떨어지고 풍경이 달라지면 우리는 그 지역을 아주 잘 기억해내야 했어요. 결과는 치명적이니까요. 내가 묻은 지뢰를 밟은뻔 한 적도 한두 번 있었어요. 그 때 나를 도와주었던 동지가 아니었으면 세상을 완전히 떠났을지도 모르겠어요. 폭발음이 들리면 우리는 확인하러 돌아가야 했어요. 그리고 지뢰밭을 정기적으로 확인했어요.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가 이미 폭발시켜버렸는지 확인했어요.

하루는 한 말레이 동지가 지뢰밭을 확인하러 파견되었는데, 그 때 전 다른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 사람 혼자서 가서 막대기로 그 지역을 찌르며 돌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곳이 폭발했어요. 그 사람은 시력을 잃었어요. 우리는 지뢰 탐지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 스스로 기억에 기댈 수밖에 없었죠. 지뢰를 묻고나서 연결을 할 때 실수를 할 수도 있어요. 그럼 바로 폭발이 일어나지요. 그래서 지뢰를 연결한 후에 우리는 바로 뛰어서 나무 뒤에 숨곤 했어요. 몇 년간 사고가 일어났지만 우리가 너무 많은 지뢰를 묻어놔서 경험이 쌓이기도 한 거죠.

맨발의 의사

우리는 군에서 진료도 했지요. 내 현재 남편도 의사예요. 그 사람은 저에게 의료기술을 가르쳤어요, 이제 더 이상 게릴라는 아니지만, 지금 살고 있는 마을에서 진료를 하고 있어요. 주사나 침을 놓을 줄 알지요. 산기슭에서 채취한 중국 약재들을 이용하는 방법도 알구요. 전 중국에서 공부한 대가들에게서 가치 있는 것도 많이 배웠어요. 의사들은 한 주에서 한 달 정도까지 수업을 해 주었어요. 우리는 일주일에 하루 이틀은 의학 공부를 하기도 했어요. 우리는 각기 다른 약과 약초의 이름을 외웠어요.

말레이에서 사람들은 우리를 ‘닥터 카키 얌’이라고 불러요(웃음).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닭처럼 아픈 사람들을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치료한다는 뜻이에요. 중국인들은 우리를 ‘맨발의 의사’라고 불렀지요. 우리는 군에서 우리가 만든 책이 있는데, 침을 놓을 때 그 책을 봐요. 그 책은 중국어와 말레이어로 만들어졌고, 제 남편도 그 책을 쓴 사람 중의 하나죠.

적과 싸우기

우리는 태국 병사들과 벌일 몇 번의 국지전에 참가한 적이 있었지요. 태국 병사들은 정글 한 가운데까지 와서 우리를 공격했어요. 자기방어력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매복해서 태국병사들을 기다렸습니다. 주로 태국 병사들이 반 쯤 우리 기지로 들어올 때까지요. 일단 한 번 총을 쏘기 시작하면 두려움이 사라져요. “투쟁!”

이런 교전은 보통 오래 지속되지는 않아요. 우리는 최대한 빨리 후퇴하려고 했으니까요. 주로 정부쪽 병사들이 지뢰를 무서워했지요. 그러나 적들도 지뢰를 묻어놓기는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많은 우리 동지들이 죽었지요. 우리가 정부군 병사들을 먼저 공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우리를 먼저 공격한 건 정부군들이었지요.

우리는 7~8명이 하나의 그룹이 되어 싸웠고, 경험 있는 선배 동지들이 이끌었어요. 적들은 백여 명 규모로 왔어요. 그래서 우리는 작은 그룹으로 된 현명한 게릴라 전술을 썼어요. 이기기 위해서 분산을 시키기도 하구요. 정부군과 숨바꼭질을 한 거죠.

태국 군인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었어요. 검정색 유니폼은 거칠고 무자비한 군인들이고 녹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주로 우리와 같은 말레이인들이에요. 녹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은 정글로 들어오기 전에 언제 출발하는 지를 알려줬어요. 우리를 무서워했거든요.

녹색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과 소통은 말레이 공동체에 있는 지하 멤버를 통해 했어요. 지하 조직과의 연결이 없었다면 우린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가끔 적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아주 가까이 오기도 하지요. 가까이 올 때 마다 우리는 흔적을 잘 덮고 완전히 침묵을 지켰어요.

첫 전투에서 자신감이 커졌어요. 적을 향해 총을 쐈고,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거든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지요. 난 한 번도 부상을 입지 않았어요. 매일매일 연습을 했거든요. 전 전투부대의 일원이었어요. 적들이 공격해 올 때마다 처음으로 싸우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지요. 우리 그룹에는 여자가 저 혼자였어요(웃음). 비 올 때를 빼면 남성 동지들과 싸우는 건 어렵진 않았어요. 뼈 속까지 흠뻑 젖었어도 우리는 매복 태세에서 몇 시간 동안을 움직이지 않았어요. 힘들었어요. 때로는 열이 엄청나서 돌아가곤 했어요. 적들은 그걸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우기동안에 우릴 공격하는 걸 좋아했지요. 중국이나 말라야 고유 설날과 같은 축제 기간에도 공격을 자주 했지요.

남녀 평등

군에서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게 취급했어요. 물리적으로 남성은 더 강할지 모르지만 남성보다 강한 여성들도 많이 있었어요. 군에서 일부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능력이 있었어요. 아마도 정신력이나 인내력과 관계가 있었을 거예요.

우리는 더 많은 스트레스와 긴장을 견뎠지요.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줄 알았어요. 남성들은 응석 부리기도 했어요. 이것도 못하겠다 저것도 못하겠다 이렇게요. 군에서 여성들을 얕잡아 보지 않았어요. 일부 여성들은 남다보다 나았고, 우린 요리도 하고, 싸우고, 사냥도 했고, 야채도 길렀지요. 동물도 키우고, 나무도 심고 여성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어요.

우리가 산을 떠난 이후 이런 일을 대부분 하는 건 여자예요. 보세요. 고대를 세우는 건 누구죠? 대부분 여성들이예요. 남성들은 너무 늙었죠. 말라야 공산당 여성들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무 추출대를 밤에 혼자세우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아요. 우리는 고무 추출대를 밤 11시에서 자정까지 세워요. 고무액이 밤에 더 잘 흐르고, 아침은 너무 더워요. 우리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은 감히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지 못해요. 우리가 뭘 했는지 알거든요.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봐! 이 말라야 공산당 여자들은 대단해” 보시다 시피 우리는 달라요. 우리가 살아가는 법은 달라요.

군에서 아기를 낳으면, 당에서는 우리에게 출산 후 치료를 제공해 주었어요. 우유를 더 살 수 있도록 더 많은 수당을 주었고, 회복을 돕기 위해 더 나은 음식을 주었어요. 대체로 산모들은 한 주 안에 회복이 되었죠. 한 달 후에, 짐을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나 집단의 안전 때문에 아기들은 정글에서 우리와 있을 수가 없었어요.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밖으로 보내졌죠. 정글에서 아기를 낳는 일은 어렵진 않았어요. 검증된 의사들이 있었거든요. 저도 전에 동지의 아기를 받은 적이 있어요. 군에서 여성으로서 우리는 많은 경험을 했고, 전투에서 우리 스스로를 증명해야 했어요.

정체성과 소속감

우리가 처음 산을 떠났을 때, 우리는 말레이 마을에서 살았어요. 저는 거기서 야채를 팔았고요. 내 남편이 중국인이어서, 사원에서 매일 금요일마다 기도를 하지는 않았어요.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용인하지 않았어요. 이제 저도 반은 말레이인 그리고 반은 중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이제 사원에 가지 않거든요. 여기가 더 편해요. 여기는 중국인과 말레이인 모두가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군에서 와서 사고방식도 일반적인 말레이 공동체와는 달라요. 우리는 맑스의 생각으로 교육 받았고, 그의 가르침은 이슬람과는 많이 달라요. 그러나 토착 말레이인들은 종교에 많이 기대는데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매우 엄격히 지키지요. 그런데 전 말레이 관습과 의식을 지키는 데 그리 엄격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내 동지들은 저를 반 중국사람, 반 말레이 사람이라 그래요.

타이/말레이 말라야 공산당원으로서의 삶

군에 가입한 후 태국과 마찬가지로 말라야에도 비슷한 말레이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사람들은 내가 태어난 태국의 일부가 원래는 말라야에 속해 있었다고 이야기 해 주었어요. 제가 말라야에서 온 건 아니지만, 난 말라야 공산당(CPM)에 가입했어요. 공통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를 위해서요. 당에 대한 나의 충성심은 지금까지도 바뀌지 않았어요. 무엇을 하건 난 여전히 당의 일부입니다. 저는 당의 지도를 받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부정할 수 없어요.

태국이 자유로운 국가고 내가 가고싶은 곳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저는 여기에서 더 살고 싶어요. 여기가 편하거든요. 걱정도 없고, 문제도 없고. 바깥 세상은 훨씬 복잡해요. 태국인으로서 바깥 세상의 현실을 알고 있어요. 산을 떠난 후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우리 자신의 두 발로 서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입혀준 당에 의지할 수 없지요. 태국도 지난 20년 동안 많이 바뀌었어요. 이제 알아볼 수 없는 곳도 많아요. 지난 20년 동안 너무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집으로 가는 길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고요...

물론 집생각 가족생각이 나지요. 1989년 군에서 나왔을 때 내 유산 지분을 가지고 싸움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이 말렸어요. 남편이 우리 자신을 보라고 하더군요. 내 남동생은 파타니에서 살고 있는데 좀 부자예요. 그래도 나는 내 동생을 찾지 않았고, 내 동생도 나를 찾지 않았지요. 집으로 가야할 이유가 뭘까요? 난 거기 아무것도 없어요. 여동생들이 있긴 하지만 저에게 관심이 없어요. 여동생들은 저의 안부를 거의 묻지 않고, 잘 찾지도 않아요.
  수리아


여기가 지금 내 집이예요. 난 일을 아주 열심히 해야 해요. 키워야할 아이도 있지만 우리는 서로서로가 이 마을에서 필요하거든요. 만약 누군가가 문제가 생기거나 의사를 볼 필요가 있거나 돈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은 서로 도울 거예요. 이제 저는 생계를 위해 고무 추출대를 세워요. 미래를 위해 저축도 하고요. 우리는 더 많은 땅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우리에게 배분 된 땅은 너무 가파르고 깊어요. 그래서 요즘은 낮은 땅에만 나무를 세우려고 하고 있어요. 고무 추출대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고용하진 않아요. 저 혼자서 하지요. 가끔 돈이 많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도 해요. 매일 할 일이 많긴 해도 우린 지금 살만해요.

[번역]변정필 기자
덧붙이는 말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 [번역]변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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