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이른바 ‘참여정부’ 하에서 벌어지는 참상들

노무현 정부는 이미 정부도 아니다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피맺힌 점거농성이 결국 공권력 투입으로 끝을 맺었다. 이랜드는 그동안도 부당노동행위를 일삼았던 대표적 악덕기업으로서 비정규직 법령 시행을 앞두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대량해고와 용역고용으로의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이번 사태를 촉발한 주범이었다. 비정규직 법령에 대해 이미 노동계는 이 법령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량해고를 부추길 것이라고 극력 반대해 왔는데도 정부는 사이비 노사정 합의를 근거로 이를 통과시킴으로써 이랜드 같은 사태가 대량 발생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법령은 자본의 외관상 반대와는 달리 노동의 유연화를 강화하고 노동자 착취를 증대시키려는 자본의 요구에 따라 도입된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비정규직 보호라는 납득할 수 없는 명분으로 이를 호도해 왔는데, 이랜드 사태는 정부의 억지 주장이 조금도 근거가 없는 것임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였다. 따라서 이랜드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는 너무도 정당한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이들에 대한 공권력 투입과 강제 연행을 정당한 법 집행이라고 운운하는 정부의 파렴치함에 분노를 넘어 비참함을 느낀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서, 이 법령과 정부의 치부가 그대로 드러나 어떻게든 자신의 숨을 곳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궁핍함 속에서도, 또 노골적인 법령 회피로 악덕 사업주의 탐욕이 여론의 질타를 받는 속에서도, 정부는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를 타격했다는 것, 이 어이없는 행태가 이른바 ‘참여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친자본적 본질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비정규직 법령에서처럼 이 정부는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대중들을 참상으로 몰아가는 정책을 초지일관 추진해 왔고, 대중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진정한 개혁은 회피하여 왔으며, 그로써 자산계층과 재벌들에게는 최상의 사회를 선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의 보수적 기득권층과 일상적으로 다투며 개혁의 전도사로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간 건 이 정부의 놀라운 기만술이다. 그러나 정권의 말기 이 모든 기만술은 대중들의 참상 앞에서 빛을 바랬고, 그 반대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버렸다.

국민연금은 개악되어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장래 노후소득의 1/3이 날아가 버렸고, 생활고에 몰린 대중들은 대부업체의 살인적인 고금리에 내몰리고 있으며, 결국 자살률(2005년)은 자랑스럽게도 OECD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 이 정부 들어와 각종 개발과 천문학적 보상비 지출로 부동산가격은 폭등하였고, 집 없는 대중들은 집 가질 꿈을 접어야 했다. 더욱 심해지는 사교육비로, 또 국제유가와 관계없는 휘발유값의 고공행진으로 대중들의 허리가 휘어지는 형편이다.

유일한 개혁성과로 내세우던 사립학교법령은 재개정으로 하나마나한 누더기가 되었다. 부유층과 전면전을 벌인다는 종부세도 실은 전체 국세수입 138조 원(2006년) 중 1조3천억 원밖에 안 되는 작은 싸움이며, 정작 유류세(23조 원)와 부가가치세(38조 원) 등 역진적인 성격의 간접세 개혁과 누진적인 직접세 강화에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결국 종부세 싸움도 일종의 기만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별세계가 있다. 주가폭등과 불노소득에 열광하는 투기꾼들, 자본금의 7배(2005년)에 이르는 막대한 현금축적을 구가하는 10대 재벌들, 그리고 선진 갑부 부럽지 않은 듯한 강남의 천박한 명품족들... 이런데도 이 정부는 돈 없으면 강남에서 이사 가라, 휘발유값 없으면 승용차 타지 마라 하는 망언을 늘어놓는가 하면, 고금리에 내몰려 신체와 가족의 일부까지 포기해야 하는 참상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 정부는 이미 정부가 아니며, 국가도 국가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