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머니가 나를 자랑스러워 하길 바랍니다”

[흐르는 강물처럼](7) 황 수이 링 (1934년, 말레이시아 펠리스 출생)

“군에서 우리 여성 동지들 중 일부는 남성 동지들보다 더 힘이 세고 고난을 잘 견뎠어요. 나는 군에서 생사의 기로를 겪는 데 남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장에서 여성보다 더 겁 많고 두려워하는 남성 동지들도 있었죠. 사격 솜씨가 뛰어난 여성 동지들도 있었고요. 나는 요즘 내 스스로 생활을 꾸려가게 되어 행복해요. 나는 큰 집과 위성 TV와 닭과 두 마리의 개, 채마밭과 고무추출대를 가지고 있죠. 나는 신문과 책을 읽고, 태국어를 배우고, 음악을 듣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곤 합니다. 나는 주변에 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의 희생과 패배로부터 많은 값진 경험을 쌓았어요. 우리가 교수나 지식인은 아니지만 정글에서 보낸 우리 인생의 40년은 역사의 공백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미덕과 원칙과 도덕을 세우게 되었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중추가 되었어요.

나는 나의 역사가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여깁니다. 나는 우리의 과거를 비판하거나 부정하길 원하지 않아요. 내가 영웅은 아닐지라도, 나는 여전히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나는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의 경험을 유용하게 발견해서 그들 스스로 반성하고 가치를 매길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럴 때, 나는 내 인생의 41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거예요. 나는 또 내가 오늘 여전히 살아있다는 게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인의 점령

일본인들이 말레이시아를 침공했을 때, 나는 10대였어요. 일본 군인들은 아무데서나 소변을 보고 심지어 벌거벗고 목욕을 하기도 했어요. 소녀가 지나가면, 일본 군인들은 여성들을 유혹하면서 불렀죠. 그들은 짐승처럼 행동했어요. 밤이면 일본 군인들은 우리 집 문에 노크를 했고, 소녀들은 정글이나 늪에 숨어들기 위해 도망쳐야 했어요.

사람들은 호랑이보다 일본 군인들을 더 무서워했어요. 그들은 여자를 강간하고 우리의 집에서 물건들을 빼앗아갔어요. 군부가 들어온 뒤 통제를 강화해갔죠. 곧 모든 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쳤고, 일본에서 말레이시아로 교사들을 데려왔어요. 말레이시아 전체가 그들의 것인 양 느껴졌죠.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서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그 때 일본인들이 떠나고 영국인들이 돌아왔죠. 공산주의자들은 이 시기에 나타나서, 청년 그룹과 여성 연합과 재향군인회에서 사람들을 조직했어요.

운동의 매력

나는 1948년에 역동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었어요. 공산주의자들은 야학을 조직하고 소풍을 가기도 했어요. 우리에게 당의 기관지도 읽게 했고요. 나는 그 당시 거의 글자를 알지 못했죠. 그들은 우리에게 여성이 가장 억압받는 계급이라고 가르쳐줬고, 우리의 의식을 일깨워줬어요. 그들은 우리가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했죠. 돈이 있는 사람들은 부를 나누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서 기여할 수 있다고요. 나는 내가 사는 마을에서 시민 부대의 일원으로 운동에 가담했어요. 내 임무는 공산당 지지자로부터 매달 회비를 걷는 일이었어요. 우리는 또 지지자들이 보내온 식량을 근처에 머물고 있는 게릴라에게 전달했죠.

나는 그들이 좋은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게릴라에 가입했어요. 나는 공부할 기회가 없었고 공산주의자들은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줬어요. 나는 이것이 내가 온당한 미래를 쟁취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어요. 내 가족들은 내 결정에 매우 강하게 반발했어요. 그들은 나를 찾아냈을 때 거의 나를 산 채로 껍질을 벗기려고 했죠. 그들은 ‘당근과 채찍’을 둘 다 사용하며 나를 말리려고 애썼어요. 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쌀을 물에 담가 내가 음식을 찾아내지 못하게 하거나, 너무 늦게 귀가하게 되면 감금시키기도 했어요. 그들은 또한 나를 맛있는 음식으로 매수하려 하고 심지어 나를 멀리 떨어진 도시인 페낭의 학교로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나는 이 길을 선택하는 데 지불해야 할 비용이 있다고 해도 이 길을 고집했죠. 우리는 우리 뒤를 이을 사람들이 갈 길을 여는 개척자들이었어요.

집으로부터의 탈출

내가 14살일 때 나는 공산당에 게릴라로 가입시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했어요. 그들은 2년 지나서 겨우 동의했죠. 그 날, 가족 모두가 집에 없었고, 나는 조카를 보살피며 혼자 있었어요. 나는 기회를 잡았고 즉시 집에서 도망쳤어요. 길을 따라 많은 집들을 지나치며 달리고 또 달렸어요. 나는 아 퐁이라는 팀 대장에게 갈 예정이었는데, 그는 정글 외곽에 살고 있었어요.

불행하게도, 내가 도착하기 전에 저의 어머니가 이미 아 퐁의 집에 있었어요. 어머니는 아 퐁에게 나를 포기하라고 설득하며 아 퐁이 나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비난했어요. 그녀는 내가 자라게 되면 가족을 돕기 위해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나의 어머니는 모질게 외쳤죠. 그러나 나는 마음을 굳혔어요. 당내 여성연합의 대표였던 나의 언니도 게릴라에 가담하길 원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녀가 가지 못하도록 설득해냈어요. 나의 오빠도 게릴라에 가입한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오빠는 시련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어요.

일본인 동지들

나는 일본군에서 군의관으로 있었던 일본인 동지로부터 의술을 배웠어요. 내 부대에서, 10명의 일본인 동지가 있었는데 그들 중 한명은 수의사였고, 나머지는 요리사로 일한 경험이 있었죠. 그들 중 일부는 대학 교수였어요. 이들은 세계 2차 대전 말에 연합군에 굴복하는 것을 거절한 일본인들이었고, 그 대신에 게릴라 군사로 우리 편에 들어왔어요. 아 푸는 소화 특기병이었고 침술과 음악에 대해서도 지식이 있었어요. 그는 매우 재능이 있어서 우리들에게 일본 노래와 춤, 유도를 가르쳐줬어요. 아마도 우리 당은 일본인들을 적절히 다루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들 중 일부는 우리한테서 떠났고, 나머지는 적과의 전투가 있던 기간 중에 죽었어요. 아 푸는 도망치려 했던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4, 5명의 일본인들과 함께, 그들은 그들 스스로 또 다른 부대를 만들려 했지만 실패했죠. 그 사람들은 너무 배고파서 주민들로부터 카사바를 훔치거나, 음식을 구걸하는 것에 의지했어요. 당이 그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들을 다시 캠프로 데려오기까지 1년이 넘도록 도적질과 구걸을 계속했어요. 그 사람들은 그때 매우 야위고 긴 머리에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었어요.

굶주림의 경험

배고픔은 군을 양성하는 데 가장 힘든 일이었습니다. 식량은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을 해야 했고 우리의 임무를 다해야 했어요. 거의 잠도 못자는 조건에서, 전장에서 적들과 교전하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웠어요. 우리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참가한 평화회담이 실패했던 1954년 이후 최악의 굶주림을 경험했어요.

그 당시 상황은 위험했고 우리는 서툴렀죠. 우리는 야생 카사바의 일종을 먹었는데 조리를 잘 하지는 못했어요. 카사바를 먹은 직후부터 우리 모두가 건강에 문제가 생겼어요. 시력이 흐릿해지고 사물을 볼 수 없게 됐어요. 우리는 추위에 벌벌 떨고 물건을 거의 들을 수 없게 됐죠! 우리가 캠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행운이었어요.

우리는 카사바를 올바르게 조리하려면 물에 충분히 적시고 완벽하게 씻은 뒤 껍질을 긁어내고 빵처럼 구워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듣게 되었죠. 게다가, 정글에는 독성 카사바도 있어서, 그것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도요. 사람은 기름과 설탕 없이 오랜 시간을 살 수 없어요. 3달이 넘도록 음식에서 지방이나 기름을 섭취하지 못했을 때 우리 모두는 시력이 흐려졌어요. 최악의 경우로는 보초를 서는 동안 우리 주변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데도 보지 못했죠.

우리가 배웠던 또 다른 것은 우리가 먹었던 야생 양배추는 비타민과 단백질이 없고, 그것들은 오로지 짧은 시간 동안 위장만 채워줄 뿐이라는 사실이죠. 양배추 식사를 한지 1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오줌을 누고 다시 배고파졌죠. 고기만이 허기짐을 좀 더 오래 버티게 했었어요. 나는 오랜 시간동안 굶주렸던 동지를 봤는데, 하루는 그가 주저앉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어요.

오랭 애슬리 동지들

내가 오랭 애슬리 그룹의 소대장이었을 때, 이들은 열대우림 깊숙한 곳에 사는 토착민들이었어요. 남자와 여자를 합쳐 모두 17명이었지요.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캠프장으로 안내하고 따뜻하게 맞이했어요.

오랭 애슬리 동지들은 캠프장에서 대나무와 등나무로 된 그들만의 집을 만들었죠. 그들의 집 아래에는 불을 피워 밤에 그들의 발을 따뜻하게 하기 위한 공간이 있었어요. 그들은 담요를 사용하지 않았죠. 오랭 애슬리는 멸시당하지 않았어요. 자신들만의 지혜와 능력이 있었지요. 그들은 우리에게 적들이 마을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끌고 가 훈련시키려고헬리콥터를 태워 멀리 데려갔다고 말해줬어요. 그 후에 그 사람들은 밀고자가 되거나 우리와 싸우는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돌아왔죠.

오랭 애슬리 동지들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전통 춤을 출 수 있는 무대를 지어줘서 동지들이 집처럼 편하게 느끼도록 했어요. 동지들의 춤은 독특한 리듬이 있었는데, 무아지경에 이를 때까지 춤을 췄죠. 오랭 애슬리 동지들은 또 집에서 빚은 매우 독한 술을 마셨고 나는 함께 술 마시고 춤추며 즐기곤 했어요. 동지들은 쥐를 잡는 데 능숙했어요. 쥐를 굽고 껍질을 벗겨서 즉시 먹었지요. 동지들은 나에게 진미라며 쥐의 머리를 건네줬는데 이것은 그들이 존경심을 표하는 방법이에요.

마침내 우리의 오랭 애슬리 동지들은 그들의 공동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어요. 그들은 우리와 같은 공동생활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들은 자유롭길 원했어요. 정글을 돌아다니며 사냥 게임을 하길 원했지요. 공동생활은 그들의 손과 발을 묶는 것과 같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과거에 우리를 도와줬다는 것에 감사해요.

게릴라 대장으로서의 삶

게릴라군의 대장이 되는 것은 교육 정도에 의존하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오로지 성과에 기초해 소대장이나 간부, 고위 지도부로 진급됐어요. 사람들은 그들의 태도와 사고방식으로 평가받았지요. 상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덕과 재능 모두를 갖춰야 했어요. 나는 산을 떠나기 전 하위 부대의 부대장으로 마침내 진급됐죠. 이 전에 나는 소대 보조 직급에서 부소대장으로, 그 뒤 소대장으로 진급했어요. 나의 주 임무는 식량을 운반하고 보초 근무를 하는 거였어요. 나는 또 채소를 심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할 동지들을 조직했어요.

20달간의 반(反)공세 작전

사건은 1970년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제3연대의 지휘본부에 있었어요. 40에서 50명 정도의 부대를 호위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남부로 병력이 급파됐어요. 우리는 많은 것들 가운데 무기와 돈을 가질 수 있었죠. 우리는 또한 전신국장을 포함한 기술팀을 남쪽으로 호위해야 했어요.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이 여정을 준비했죠. 우리가 갔다 돌아오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어요. 우리는 거대한 페락 강을 건너기 위해 대나무 뗏목을 만들었죠.

우리는 또 당의 중요한 문서가 가득 담긴 가방을 옮겼어요. 가는 길에 정찰 팀은 강 아래 적군들을 발견했다고 보고했지요. 그들은 적들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도보로 한 시간 가량이라고 판단했어요. 우리 대원 중 한 명이 이를 엿듣고 우리에게서 도망쳤어요. 그는 적에게 항복했어요. 그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우리는 퇴각해야 했지요. 오래지 않아 적의 폭탄이 비 오듯이 날아왔어요.

소위 20달간의 반공세 작전은 말레이시아와 태국 정부의 합동 군사 작전 때문에 시작됐어요. 심지어 우리는 지휘본부도 떠나야 했어요. 이 작전은 식량, 의료품, 심지어 공장까지 많은 것을 운반하기 위해 몇 백대의 트럭을 필요로 하는 매우 큰 작전이었죠. 우리는 가져갈 수 없는 물품들을 숨겨야만 했어요. 밤에 우리는 흰 꽃나무로 만드는 일종의 검은 반죽인 ‘바 마’를 만들고, 풀로 박스와 컨테이너에 밀봉하는 일을 해야 했어요. 성공적으로 옮겨내기 위하여 한 달간 꼬박 밤을 지새워야 했어요.

우리는 적의 전투기로부터 융단 폭격을 받았어요. 전투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면, 배낭을 벗고 나무나 큰 나무의 움푹 팬 구멍 안으로 빠르게 숨어야 했어요. 그것들을 발견할 만큼 충분히 운이 좋다면 말이죠. 우리는 전투기의 화염을 피하기 위해 전투기 꼬리 뒤를 따르려 했어요. 폭격이 잇따라 일어났던 20달 동안, 적들은 대형 폭탄과 로켓과 전투기로 우리에게 대적했어요. 우리는 할라 강으로 모두 퇴각했고, 정글의 가장 깊숙한 지역에 이르렀죠. 우리가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우리는 식량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해서, 사람들은 각자 하루에 튀긴 면을 숟가락에 한가득 담아 딱 세 번씩 먹을 수 있었고 빗물만을 받아 마셔야 했지요. 우리는 그 때 포위되어 있었어요. 월경 중인 여성 동지들은 진짜 괴로워했죠. 우리는 땀에 절고 줄곧 소변을 보지 못했어요. 나는 내 속옷을 플라스틱판으로 감아 보존해야 했어요. 우리는 며칠 동안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씻지도 못했어요. 이 때문에 내 양쪽 사타구니가 감염됐죠.

1년이 넘도록 우린 각설탕을 먹어보지 못했어요. 나는 커피 중독이었기 때문에, 적이 매복한 상황에서 커피를 못마셔 매우 괴로워했죠. 과거에는 비록 나쁜 상황이었을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하루에 커피 한 잔은 마실 수 있었어요. 상황이 좋았을 때는 우리는 완두콩 수프를 먹을 수 있었죠. 그러나 이 굶주린 20달 동안에는 우리는 글자 그대로 아무 것도 먹지 못했어요.

결혼과 이혼

나의 전남편인 아 윰은 당의 고위급 간부였어요. 그는 형 집행에서 어떤 실수를 해서 우리 부대로 전임되어 왔어요. 그로 인해 우리가 만나게 되었는데, 나는 그 당시 17살이었죠. 그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고 나를 많이 칭찬해줬어요. 그러나 우리는 내가 25살이 된 후에야 결혼하게 되었죠. 난 그 사람이 개과천선 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혼한 지 7년 뒤 그는 예전의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갔어요. 그는 다른 여성 동지들을 희롱하고 정사를 나눴어요. 나는 5년간 이 상황을 참아낸 후, 마침내 내 ‘지뢰’를 과하게 자극하면 폭발하게 될 거라고 말했죠.

우리 사이가 깨지게 된 결정적 사건은 남편이 유부녀 동지와 정사를 벌이는 것을 발견했을 때였어요. 나는 대장에게 이것을 보고했고 둘 다 처벌받았어요. 이 결혼 때문에 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나에겐 큰 타격이었죠.

나는 여전히 그에게 분노를 느껴요. 그가 달라지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했다면 나는 그 때 그를 용서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는 오로지 그가 말했던 것 중 어떤 것도 실천하지 않으면서 고매한 도덕을 훈계하고,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만 능숙했죠. 그는 부끄러움이나 양심을 몰랐어요. 나는 우리의 마지막 만남에서 부대장을 앞에 두고 그에 대해 느끼는 바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어요. 나는 그가 우리의 대장이 되기에는 부적격이라고 그에게 말했어요. 나는 꼬박 3시간 동안 그를 나무랐어요. 그런 후 우리는 다시는 친구가 될 수는 없었죠.

사실은, 그는 이혼을 요청했어요. 나는 그를 거절했고 군 역시 그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나는 절대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많은 여성 동지들이 그가 나를 다뤘던 방식에 분개했죠. 이혼한 후 많은 청혼을 받았을지라도, 나는 혼자 남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좋은 남자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나의 이상적인 남편은 나를 보살피고 지지해주며 거꾸로 나에게 받을 수도 있는 사람이죠. 나는 나에게 생계를 의존하려 하거나 그의 매일의 생활을 돌봐주길 기대하는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는 차라리 나와 같이 독립적인 남자를 원했죠. 실제로, 나는 여태까지 내 스스로 아주 잘 살아왔어요. 나는 여자들이 스스로도 아주 행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죠.

부모가 되다

우리에게는 딸이 한 명 있었어요. 그녀는 지금 틀림없이 39살일 거예요. 그러나 정글이 그녀에게 안전한 곳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를 낳자마자 멀리 보낼 수밖에 없었죠. 태국 가족이 그녀를 양육했어요. 그녀는 보통 태국 사람처럼 성장했고 곧 태국 어부와 결혼식을 올렸어요. 나는 정말로 사위의 국적에 연연하지 않아요. 결국 그녀의 결혼이고, 내 결혼이 아니니까요. 부모로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배우자 선택을 간섭하면 안 되죠...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공동체나 다른 인종의 사람과 결혼하길 원했다면 우리는 그들 스스로 결정하게 했을 거예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위한 그런 중요한 결정에 관여할 수 없죠. 부자는 부인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나는 정말 그녀가 부유한 자본가와 결혼하길 꿈꾸지 않았어요. 나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딸은 그들 부부의 사진을 보내왔죠. 나의 딸과 사위는 정직하고, 고되지만 단순한 삶을 살아요. 백만장자가 되는 꿈은 필요하지 않죠.

이 세상에는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어떤 식으로든 살아가요. 지나치게 많은 돈은 해로울 수 있죠. 나는 그녀를 양육하는 내 임무를 이행하지 못했을지라도 나의 딸을 여기로 데려와야 할 책임을 느껴요. 그녀는 내가 죽었을 때 내 고무농장과 과수원을 물려받게 될 거예요. 그녀는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한 단 한 사람입니다.

1989년 우리가 산에서 내려온 후에, 우리는 사방으로 그녀를 찾으러 다녔어요. 나의 동지가 도와줘서 나는 그녀가 방콕에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나는 우리의 첫 만남에서 그녀가 나를 ‘엄마’라고 불렀을 때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녀는 내가 그녀의 가족들을 찾아갈 때마다 과일을 사주었죠. 딸을 길러주었던 가족들이 내가 그녀의 생모라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의 양어머니는 내가 그녀를 데려갈 것이라 생각하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 의도가 아니고 단지 그들이 나의 자식을 돌봐준 것에 대해 감사하길 원한다고 납득시켰죠.

고향으로 돌아가다

태국에서 우리는 화교 신분이었어요. 나는 말레이시아로 돌아가기 위해 나의 정치적 입지와 혁명적인 역사를 더럽힐 수 없었죠. 나는 말레이시아에서 여행 비자를 신청하려 애썼지만 정부가 거부했어요. 나는 단지 중국인들의 위령제에 내 어머니의 무덤에 가서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기도하길 원했던 거예요.

나는 혁명 전투에 가담한 것으로 나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영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이죠. 나의 어머니는 말레이시아인이었고 나는 그녀의 자유를 위해서도 싸웠던 것이죠.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공헌한 거예요. 나는 어머니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기를 바랍니다.

(번역 - 이윤원)
덧붙이는 말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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