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가 된 게릴라의 딸

[흐르는 강물처럼](8) 아톰 (1927년, 말레이시아 출생)

아톰은 말레이시아 국경에 있는 태국 남쪽의 수키린 마을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은 최근까지도 폭탄 사고가 여기저기서 일어날 만큼 소위 무슬림 분리주의자들로 불리는 집단의 활동이 왕성히 증가하고 있다. 수키린(Sukirin)은 예전에 CPM(말라야 공산당) 게릴라들이 정착한 ‘평화 마을’ 중 하나이다.

이 내용은 최근 아미르 모하마드(Amir Mohammad)라는 젊은 말레이시아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됐다. 아미르의 첫 번째 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의 제목은 '마지막 공산주의자(The Last Communist)'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현재 말레이시아 정부에 의해 상영이 금지됐다. ‘마지막 공산주의자’는 한국, 홍콩, 싱가포르, 인도, 뉴욕, 타이완 등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의 주요 국제 영화제를 순회 상영하고 있다. 한국의 EBS도 2006년 8월 이 영화를 방송하기도 했다.


나의 어머니

  아톰
우리는 말레이어로 어머니를 목(Mok) 또는 막(Mak)이라고 불렀어요. 나의 어머니는 일본 점령기 동안에 혁명운동에 동참했어요. 그녀는 ‘일본군에 반대하는 말라이 민중들’(MPAJA)의 지지자였고, 또한 反일본동맹(Anti-Japanese Alliance) 소속으로 활동을 했어요.

어느 날, 어머니는 우리에게 떠나겠다고 말했어요. 어머니는 비밀모임을 가질 예정이었고,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그 내용에 대해 말해서는 안됐었죠. 어머니가 떠나지 않는다면, 어머니는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죠. 어머니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우유와 정어리 캔들을 주었죠. 어머니는 우리를 위해 집안에 우리들이 먹을 음식들을 숨겨 놓았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떠났어도 우리는 굶주리지 않았어요.

일본의 점령기간 동안, 삶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쌀과 같은 먹거리는 매우 가격이 비쌌죠.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어요. 어머니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라고 우리에게 말했었답니다. 만약 누군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모두가 가엾은 처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고 어머니는 늘 말씀 하셨어요.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죠. 그녀는 “그들은 나를 체포하려고 해. 그래서 나는 정글로 들어가야만 한단다. 날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고 저한테 말했지요.

제가 14살이 됐을 때 일본군들이 들어왔어요. 저는 학교에 다니지 못했어요. 많은 오빠들과 언니들이 있었고요, 제가 10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죠. 저는 12살에 생리를 시작했고, 13살에 결혼해 곧 아이를 낳았죠.

동지들이 제가 살던 지역에서도 민주주의 혁명운동을 일으켜 '말레이 진보 민주 조직(the Malay Progressive Democratic Organizations)'가 조직됐답니다. 지역에서는 ‘의식있는 여성들의 부대(AWAS)’, '의식있는 청년들의 운동(API)' 그리고 ‘애국투사(PETA)'의 출현과 더불어 이 단체들의 강력한 연합체가 조직됐답니다.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왔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쌀농사도 지었어요. 그 사람들이 쌀을 팔아 수입이 생겼을 때, 그 수익 또한 다른 사람들과 나눴죠. 여성들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답니다. 그들과 우리는 조상들의 정신적 문화를 공유했고, 일본 식민지 개척자들을 배척했답니다.

게릴라 투쟁에 결합하면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은 종교와 사람들 그리고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존중하는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교육받았어요. 저는 결국 9개월 된 둘째 아이를 뒤로하고 게릴라에 동참해 정글로 들어왔답니다. 어머니가 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나의 아이가 자기 자식을 버려두고 떠나왔다니...” 라며 비탄에 울부짖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이내 나에게 물 한잔을 가져다주라고 했지요.

아니요. 저는 당에 가입할 것을 강요받지 않았어요. 저는 진정으로 저 스스로, 제가 함께 하기를 원했답니다. 동지들이 저를 단념시키려고 설득하기도 했죠. 그들은 제가 정글 밖에 남아서 그들을 지원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너는 하얀 살결 아래 붉은 심장을 가질 수 있어"(그 말은 세상에 알리지 않은 채 공산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죠)라고 말했어요. 그들은 저에게 정글 안에 들어오면 오로지 고난, 결핍만 있을 뿐이라고 경고했어요. 반면 저는 내가 체포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정글에서 같이 활동하고 싶다고 주장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정글에 남을 수 있도록, 어머니를 설득해야 했죠. 결국 어머니조차도 제가 정글로 들어오면 제 아이들을 돌보겠다는 데 동의했지요. 불행하게도 어머니는 우리 마을에 돌아온 후에 체포 되었답니다.

결혼

저는 남편과 같은 시기에 당에 가입했어요. 그러나 남편은 나만 남겨 두고 1959년 정부에 투항해 버렸죠. 남편은 고난, 궁핍함을 견딜 수 없었어요. 삶은 고달팠고 우리에게 먹을 것이 언제나 충분하지 못했거든요. 우리는 심지어 설탕이나 소금은 구경도 못할 정도였답니다.

그렇지만 이런 궁핍한, 고난의 일상은 우리의 신념, 우리들 중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구별해 내는 시험과 같았어요. 저의 남편을 포함해 우리는 당으로부터 같은 방식으로 교육받았거든요. 우리는 식민 정책의 사악함과 이런 식민 정책이 사람들, 사회, 종교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제 남편은 너무 안일하게 교육을 받았어요. 왜 남편은 우리와 다른 동지들처럼 고난, 결핍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남편도 정글에 들어오기 전에 정글 생활의 험난함, 고난, 결핍에 관해 경고를 받았어요. 그러나 우리가 큰 전투를 치르던 상황에서 남편은 이미 도망가 버렸죠. 심지어 당시에 남편은 간부그룹에 속해 있었지만, 고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거죠.

저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어요. 저는 정글에서의 고난, 결핍을 잘 견뎌 낼 수 있었어요. 사실, 항상적인 굶주림은 제 인생의 일상이었기 때문이죠. 우리가 말레이시아에 머물 때, 음식을 얻기 위해 원주민인 오랑 애슬리(Orang Asli)들에게 부탁 해야만 했었죠. 원주민들은 우리에게 야채들과 감자들을 주었어요. 저는 우리의 지도자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죠.

저는 저의 두 번째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후에 그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죠. “민(Min)(남편이 정글 밖에서 저를 부르던 애칭이죠), 논을 일구고 쌀을 심었어. 나를 걱정 하지 마. 나는 마을로 돌아왔고, 내가 우리의 아이들을 돌 볼께. 당신은 계속 당신의 활동을 하도록 해”

저는 다시 결혼을 했지만 두 번째 결혼과는 달랐어요. 그의 이름은 아지자(Azijah). 그는 동지였고, 내 아들의 아버지였죠. 우리는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지만 그의 마음이 변했을 때, 우리는 헤어졌고, 저는 다시 자유인이 됐답니다. 그와 저 사이에는 2명의 아이들이 있었답니다. 불행하게도 두 아이 중 한 명은 적들의 폭격에 죽었죠. 나중에, 두 번째 남편도 사망했지만, 저는 어디서 그가 죽었는지 몰라요.

저는 1963년, 마맛(Mamat)동지와 결혼했어요. 저와 그 사이에 아이는 없었지만 그는 제 아이들을 자기 자식처럼 대했죠. 사실, 한번 임신하기는 했었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행군하는 과정에서 임신 4개월 만에 유산하게 됐죠. 마맛(Mamat)은 가까운 조력자였고, 우리 그룹 지도자의 보디가드였어요. 저는 1963년부터 대장 보좌역을 맡게 됐었죠. 나중에는 한 팀의 대장이 되었고요. 일상은 언제나 바빴지만 때때로 그게 너무 즐거웠어요. 저는 게릴라 군대에 있는 동안 말레이어도 배웠답니다. 제가 군대에 들어오기 전에는 무슬림의 성경책인 코란을 약간 읽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거든요.

대장정

저는 생동감 넘치던 대장정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첫 번째 행군은 1953년에 있었죠. 행군 과정에 너무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목적지를 정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퇴각했죠. 그렇지만 1955년에는 결국 성공했어요. 말레이시아에서부터 태국의 국경에 이르는 두 번째 대장정은 1년 4개월 동안 진행됐었죠. 이 대장정 과정에 많은 전투에서 적들과 싸워야 했어요. 그 당시에는 단 5명의 여성 동지들만이 군대에 남게 됐었죠. 그 중 한 명이 작전 중에 사망했고 결국 4명이 남았어요.

오늘날 우리의 삶은 좀 더 안정적이죠. 우리는 당이 우리에게 주었던 것들을 기억하고 있답니다. 저는 당이 우리에게 가르쳤던 것을 항상 기억할 겁니다. 지금의 제 삶에 만족합니다. 만약 제가 정당 활동에 결합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제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어요.

당 간부로써의 인생

간부였을 때, 저는 일과 물자들을 사람들에게 배치, 배분해야만 했죠. 우리는 혁명적인 투쟁을 전개했어요. 이 말은 즉, 우리가 있는 곳 어디서든 전투를 하고, 싸워야만 했었다는 것이죠. 저는 제가 만약 문제에 직면하게 됐을 때 저의 바로 지도자에게 조언을 구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한 문제들에 대해 결코 걱정해 본 적이 없었어요. 이런 방법은 일을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 줬거든요. 제가 군대에서 배운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우리들의 능력에 대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해요.

저처럼, 제가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바깥세상에서 같이 일했다면 저에게 걸맞지 않았을 일이지만, 반면 저는 정글 안에서는 대담하고 능력이 있었거든요. 군대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솔직하게 토론 했어요. 우리는 매일 회의를 했고,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논쟁이 불거졌을 때 그 문제의 해결점을 찾을 수 있었죠. 우리는 정글에서 활동하고, 집단적으로 살아가고,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들로 만들지 않는 방법을 배웠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한 결정

평화의 시기가 왔을 때, 우리가 원한다면 말레이시아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 되었지요.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는 제 아이들은 제가 돌아와 그들과 함께 살기를 바라고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지도자들은 여기 이 마을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그들을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그들과 함께 머물고 싶었거든요. 마맛(Mamat) 또한 나의 의견에 동의했어요. 마맛은 “우리는 정글에서 우리의 지도자들과 함께 수많은 고통과 그 험난한 시간들을 함께 했잖아. 우리가 지금 꼭 그들을 떠나야만 할까?"라고 말했어요.

마을에서의 삶

우리들에게는 약간의 저축한 돈이 있었어요. 제 친척들이 우리를 방문할 때마다 돈을 주고 갔기 때문이죠. 그 돈은 나의 가족을 위한 돈이기도 하죠. 마맛은 우리가 가진 말레이시아의 링깃화를 태국의 바트화로 환전해서 그 돈으로 TV를 사고, 그 돈의 일부를 쓰자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 마맛은 마을에서 중국 프로그램을 시청할 수 있게 된 거죠.

제 아들 중 한 명인 사하리가 냉장고를 보내주기도 했답니다. 불행하게도 그 아들은 3년 전에 폐암으로 저세상으로 먼저 갔지요. 그 녀석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Mecca)로 성지 순례를 떠나기 전에 저에게 냉장고를 사라며 태국 돈으로 9,000 바트를 주었답니다. 그 녀석이 많이 생각나네요. 그 아들 녀석은 저와 첫 남편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죠. 바로 제가 게릴라 운동에 동참하면서 남겨뒀던, 당시 생후 9개월 이었던 아들이랍니다.

새로운 물건들을 구비하지만, 우리는 부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날마다 먹고, 마실 것들은 충분하게 살아가고 있죠. 당은 60살이 넘은 선임 동지들 각각에게 태국 돈으로 540 바트를 월 수당으로 지급했답니다. 삶이 더할 나위 없이 좋네요.

저에겐 이젠 오직 2명의 자식들이 남았어요. 한 명은 어렸을 때 이 마을에서 저와 함께 살았고, 지금은 말레이시아에서 살고 있죠. 그 보다 좀 더 나이가 많은 다른 아들은 5명의 아이들의 아버지이고, 지금은 말레이시아에 살고 있어요. 불행하게도 그와 그의 아내는 모두 말을 못하는 언어장애가 있어요.

그 녀석이 매우 어렸을 때 그는 “아빠, 엄마, 할머니..” 등 말을 할 수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뜨거운 고기를 먹었고, 그의 혀가 심각하게 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죠.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그는 글을 쓸 수 있어요. 안타깝게도 제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저는 말하는 것보다 쓰는 것을 강조 했죠. 그는 청각-언어장애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운이 좋게도 그의 5명의 아이들은 모두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종교적인 선택

초기에, 마맛과 저는 말레이시아 고향으로 돌아가서 나의 아이들과 함께 사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었어요. 제가 아이들에게 중국인인 마맛이 우리와 함께하는 사는 것에 대해 어떤지를 물어봤죠. 아이들은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중국인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아이들은 “그가 무슬림인 한, 인종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우리는 그를 말레이시아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어요. 그러나 저는 만약 우리가 돌아간다면 무슬림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우리 둘 모두에게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설령 우리가 불편하더라도 그렇게 할 준비가 잘 안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하면 되요. 사람들이 모스크(이슬람 사원)에 간다면 우리도 모스크에 가고, 사람들이 빠르게 움직이면 우리도 또한 빠르게 움직이죠. 사람들이 기도하면 우리도 역시 기도하면 되는 거구요. 그러면 우리는 무슬림 공동체에서 고립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이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했어요. 저는 모든 인종들은 형제와 자매와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의 인종은 하나라고. 우리들 간에 차이는 없다고. 우리가 이슬람을 개종하는 동안에, 말레이시아인들과 무슬림들의 인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이슬람의 율법에 따르면 만약 무슬림이 무슬림이 아닌 사람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의 관점에서 굉장한 공적을 쌓는 것으로 보거든요.

저는 항상 중국인들과 가깝게 지내왔어요. 저의 어머니조차도 예전에 우리 마을 야채 농가에 소속된 중국인을 입양했었거든요. 그녀는 우리와 함께 한 집에서 머물렀어요. 우리의 이웃들은 그녀를 죽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었죠.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들이 당신에게 잘못한 게 없잖아요. 우리는 악마가 아니 예요. 당신도 '악마'라고 말해서는 안 돼요"라고 말했었답니다. 제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죠. 그녀는 다방면에서 사회 모임활동을 했어요. 어머니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이 ‘악마’라고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했어요. 어머니는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란다. 우리가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역시 우리에게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죠.


지금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제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당 활동 덕분에 오늘날의 제가 된 거죠. 제가 만약 정글 밖에 남아 있었다면 오늘날 제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을지 알지 못할 만큼이요.

<번역>라은영 기자
덧붙이는 말

아그네스 쿠는 현재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다. 아그네스 쿠는 아시아 여성 구술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15년간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운동 활동가로 일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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