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우산 속에서

[진보논평] 또다른 ‘나의’ 무한번식을 꿈꾸며

진보전략회의(준)는 한국사회 주요 전략아젠다에 대한 진보적 정책생산을 목표로 모인 연구자, 활동가들의 전략네트워크이다. 사회운동의 통합적 활동이 가능하도록 운동과 운동을 이어주고 지역, 부문, 현장에서 운동기획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표방하고 있다. 진보전략회의(준) 회원들이 주요한 사안에 대해 발표하는 '진보논평'을 민중언론참세상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하오의 풍경

올 가을에는 비가 잦은 편이다. 비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라서 나야 흐뭇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맘에 걸리는 이들이 있다. 작년, 재작년 홍수 피해를 여적 극복하지 못한 분들. 재래시장 한쪽에 좌판 벌리신 노인네들. 이맘 때 쯤 말려서 건사할 물품에 가슴 졸이는 농부들. 거리를 떠돌며 폐지와 고물을 수집하는 노인들의 고단한 발품이 여기에 보태진다.

9월 14일 연구실 창밖에 내리는 빗속에서 하염없이 처량하게 울어대던 새 몇 마리 있었다. 벽오동 나뭇가지 여기저기 앉아서 분주하게 날갯짓하던 녀석들의 몸놀림이 새삼스럽다. 전깃줄에 동그마니 앉아서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던 까치 한 마리와 비둘기 두 마리를 본다. 그들 사이에 소통은 원활한 것일까, 그런 궁금증이 들었으나 확인하지 못했다.

금요일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면 교정의 고즈넉함이 싫지 않은 저녁 시각이다. 느릿하고 유장하게 내리는 빗발 속에서 천천히 어둠이 오고, 사위는 고요와 침묵의 세계로 잠겨든다. 얼마 전부터 준비한 글감에 마음을 빼앗겨 있다가 귀로에 오른다. 마음 급한 운전자들의 혼란스러움이 거리 곳곳에서 얽히고, 도회의 혼잡과 소음은 영혼의 혼란을 가중한다.

망각의 그늘

평소에 걸어서 오르던 습관을 잠시 바꿔 승강기를 탄다. 아뿔싸! 잊어버린 게 있다. 글 하나 쓰려고 했던 걸 깜빡한 것이다. 저녁 8시에 ‘아파트 관리 이사회 겸 리모델링 추진위원회’가 있다. 그곳의 기타 안건 가운데 하나가 ‘현관 자동문 설치와 경비원 감축’이었다. 반드시 글을 써서 관리사무소에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 잊은 것이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관리사무실로 간다. 나는 ‘이사회’나 ‘추진위’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다만 나의 견해를 관련자들에게 알리고 싶을 따름이다. 불과 20년 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를 다시 손보겠다고 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난봄에 에이4 용지 한 장 분량으로 글을 써서 나의 뜻을 전달하였으나, 추진위는 구성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경비원 감축 반대다. 설익은 법안을 강행하여 느닷없이 양산된 실업자들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특히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비를 맡은 나이 든 분들의 대량실직 사태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산을 든 손과 마음이 가볍지 않다. 사무실에는 열 두어 명이 모여 있었다.

그대의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오늘의 주된 안건은 ‘추진위’와 관련된 것이다. 내가 들어갔을 때 벌써 40초반의 사내가 어느 아파트가 얼마가 올랐고 내렸고, 어디가 어떻고 하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회장에게 내가 누구고, 여기 온 용건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는 봄에 내가 보낸 편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추진위원들의 출석률이 저조하여 기타 안건을 먼저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유학생 시절 나는 베를린의 밤을 야경꾼으로 살았다. 1990년 봄부터 92년 초까지 2년을. 그때 아버지는 안양의 아파트 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셨다. 은퇴한 다음 소일거리와 용돈을 벌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아들은 유럽에서, 아버지는 아시아에서 밤을 지켰고, 그래서 세계는 안전했다. 아버지와 나는 한 번의 결근도 없이 똑같이 밤의 세계에 충실했다.

경비원을 줄이고 자동문을 설치하는 문제에 반대한다는 뜻을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전했다. 필요하다면 5천 원이든 1만 원이든 관리비를 올려야 한다고도 했다. 듣는 이들의 표정은 여러 가지였다. 회장은 아파트가 처한 이런저런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다양한 의견의 충돌과 대립을 저어하는 기색이었다. 결론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지만, 문제는 제기된 셈.

다만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다. 50후반의 아줌마였는데, 가정주부로서 나의 견해에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5천 원이나 1만 원이 얼마나 큰돈인지를 말하고 싶어 했다. 회장이 웃으며 그녀의 말을 막는다. 경비원 감축 문제는 돈 이상의 문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경비원들을 거리로 내몰지는 않을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밤중에서 새벽까지

햇볕이 자취를 감추고 비가 내리면 매미들이 울지 않는다. 불과 보름을 살려고 지하세계에서 5-6년을 견뎌야하는 고단한 삶의 주인들이 우울해지는 것이다. 짝짓기로 후손을 만들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는 녀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찐하다.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가을을 재촉하는 쓰르라미나 귀뚜라미 등속이다. 요즘 새벽주인은 녀석들이다.

길어지는 밤 시간의 상념을 정리하고 꿈속의 복잡한 사건에 빠져들다 눈을 뜨면 새벽이다. 숲으로 나 있는 욕실 창으로 들려오는 그 많은 소리들. 생명의 합창이 더러는 바람소리와 더러는 빗소리와 화합한다. 잠시 망연하게 소리에 넋을 빼앗긴다. 모두들 잠든 그 시각, 환하게 깨어있는 그들에게서 베를린의 나와 이제는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우울하겠는가.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나라에서 생존을 보장하는 구명줄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나는 야경꾼 벌이로 온전하게 가정을 부양했다. 아버지는 체면 유지비를 보장 받으셨다고 했다. ‘비정규직보호법안’이 오히려 그들의 목을 죄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비가 계속 내리고,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면, 새들도, 벌레들도, 노숙자들도,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노점상 할아버지도, 나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또 다른 ‘나’의 확장과 무한번식을 꿈꾼다. 그래서 악천후에도 끄떡하지 않는 든든한 세상을 만들었으면 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선진국 만들기가 아닌가. 쓸쓸한 가을비 우산 속에서 환한 내일을 꿈꾼다.
덧붙이는 말

김규종 님은 경북대 교수로, 진보전략회의 회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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