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일곱 살짜리 작은 딸의 유치원 준비물을 사러 마트에 갔다. '그림일기 스케치북'을 사야 하는데 집 근처 3곳의 마트 모두 없었다. 별 필요도 없는 물건만 잔뜩 사왔다. 혹시나 해서 일요일 저녁쯤 큰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갔다. 주인 아줌마가 쉽게 내줬다.
이 나라에 대형할인매장이 들어온 건 불과 10여년 전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서민들은 마트 없인 의식주 해결이 안된다. 처음 할인마트는 과자도 10개씩, 라면도 한 상자씩, 노트도 10권 이상 도매로 팔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500원짜리 껌 한통도 마트에서 산다. 대형할인매장은 한국으로 물 건너오면서 소매점으로 바뀌었다.
마트는 편리하지도 않고, 마트 물건은 싸지도 않다. 아이 과제물 준비 때 이번처럼 마트 갔다가 낭패 본 적이 자주 있다. 농수산물 등 1차 상품은 재래식 시장에 비해 질이 떨어지기 때문에 결코 싸다고 할 수 없다. 인스턴트 커피 같은 공산품은 동네 슈퍼에 비해 싸지만, 많이 산 만큼 몸에 해로운 인스턴트 식품을 마구 먹게 된다. 커피와 설탕, 크림을 한 봉지에 넣어 팔다가 크림은 아예 빼고 설탕은 반으로 줄여 만든 걸 '웰빙 커피'라고 이름 붙여서 값만 두 배로 올리는 상술이 밉다.
1995년 이 나라엔 대형마트가 고작 25개 밖에 없었다. 10년이 지난 2005년 316개로 10배 이상 늘었다. 그 사이 동네 슈퍼는 작살났다. 같은 기간 편의점은 1557개에서 8855개로 역시 6배 가까이 늘었다. 그 사이 동네 구멍가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95-2005년 사이 ‘구멍가게’로 불리는 재래매점은 73만9059개에서 58만5996개로 줄었다. 10년 새 15만3063개가 사라졌다.
10년 동안 대형할인매장은 5만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지만, 문 닫은 구멍가게 때문에 28만명이 거리로 나 앉았다. 지난달 26일 한국은행은 “대형 마트의 확산이 실업자를 대거 양산하는 바람에 소비를 둔화시켜 결국엔 내수시장을 얼어붙게 한다”고 발표했다. 경기 활성화를 가로막은 주범은 강성노조도, 민주노총도 아닌 ‘마트’였다. 구멍가게를 몰아내고 들어선 재벌 이랜드와 삼성, 롯데가 이 나라 마트시장을 주름 잡는다.
마트 주변엔 다단계로 자영업자들이 몰려 있다. 한국처럼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나라도 드물다. 이 나라 국민 중 34%가 자영업자다. 화물연대나 덤프연대, 학습지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등 엉터리 자영업자도 많지만, 김대중 정부 때 실업률을 줄이려고 마구잡이고 창업 붐을 일으켜 자영업자를 대거 양산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자영업자 비율은 8%도 안된다. 서유럽 대부분에서도 20%를 넘지 않는다.
양극화와 경기악화의 주범인 재벌은 뒤로 숨고, 노동자와 자영업자가 싸우는 이랜드 투쟁현장이 서글프다.
- 덧붙이는 말
-
이정호 님은 공공노조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