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이 싸움 같이 해달라고 했습니다!”

[연정의 바보같은사랑](14) - 민주노총의 기자회견을 8시간 앞두고

"동지들 앞에 서면 죄송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 저는 사실 멍합니다. 이틀 동안은 뭐가 뭔지 몰라 멍했고, 어제부터는 이제 우리가 열사 유언을 어떻게 받들어야 되는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정신 좀 차려지는 듯 하다가 또다시 멍해집니다.
열사가 분신하시던 날, 분신한 그 자리에서 제가 동지들께 드렸던 말이 생각납니다. 열사가 130일이 넘는 파업투쟁을 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오늘 아침까지도 민주노총을 탈퇴하라는 새빨간 논리를 들이대는 유해성 악질자본에 맞서 투쟁을 하면서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까? 열사가 건설노동자들에게, 열사가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정말 힘듭니다. 이 싸움 같이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정말 우리에게 손 내민 거라고, ‘민주노총 동지들께 이 싸움 힘드니까 같이 해주십시오.’ 손 내민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주노총이 열사대책위를 책임지고 만들고, 민주노총이 책임지는 싸움을 하겠다는 이 말이 없습니다.
분명히 알았으면 합니다. 열사가 우리에게 민주노총 조합원들에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열사유언을 제대로 알고 받들어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도 멍해질 때마다 가다듬겠습니다. 열사 유언을 받들기 위해 투쟁했으면 좋겠습니다."


10월 30일 저녁, 정해진 열사 추모문화제 마지막 발언자인 정광수 건설노조 전기분과위원장이 했던 말이다. 옮겨놓고 보니 어느 곳 하나 지울 말이 없다. 감히 지울 수 없다. 이것은 지금, 열사 곁에 있는 건설노조 조합원들의 절절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정광수 건설노조 전기분과위원장

기륭전자분회 행난 조합원 님이 보내준 정보를 받고 한강성심병원에 도착해서 나는 솔직히 놀랐다. 분향소를 지키고 있는 조합원들까지 포함해서 100명이 앉아있는데, 이 중 8~90명 정도가 건설노조 조합원들이었기 때문이다. 오전 집회 때 많은 이들이 왔을 거라고, 집회 외 시간에도 다녀간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나처럼 일정을 모르는 이들이 있었을 거라고, 사람 수가 뭐 그리 중요 하냐, 나는 얼마나 잘 한다고 이런 생각을 하냐는 자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생각을 하며 다시 세어 봐도 100명이다.


노래를 하러 온 김성만 선배는 이 곳 한강성심병원 앞에 20년 만에 왔다고 했다. 이곳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 허세욱 열사가 계실 때도 오지 않았었다 한다. 전기원 노동자들이 이 병원에 오기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20년 전에 그는 동지의 시신을 탈취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앉아있는 이곳에서 시신을 지키다가 난지도에 버려졌다 한다. 난지도 곳곳에 띄엄 띄엄 버려진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시신을 탈취당한 뒤였다고 했다. 그 뒤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지금도 전두환이 가면만 바꿔 쓰고 그대로 집권하는 것 같다며 한탄을 하는 김성만 선배가 노래 두 곡을 부른다. 나중에 그 열사가 누구냐고 물으니 고려피혁에 다니던 최윤범 열사라고 이야기 해준다.

“(와주셔서)고맙습니다.”
“고맙긴요. 당연히 와야지.”

문화제가 끝나고 행난 언니에게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인사를 한다. 언니와 함께 걸어오는 길에 나는 “대체 그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냐”며 투덜거렸다.


10월 29일 오후, 경인지방노동청 앞에서 열린 경인지청 규탄 집회는 집회와 대표단의 지청장 면담이 끝난 후, 경인지청 앞에 농성을 위해 작은 비닐 천막을 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박대규 건설노조 수석부위원장이 그 곳에서 농성을 할 것이라 했다. 경인지청을 때려 부수는 줄 알고 이 날 집회에 참석했던 건설노조 조합원들은 민주노총 전체 투쟁을 위해 좀 더 준비하고 기다리자는 수석부위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허탈해하며 돌아섰다. 경인지청과 회사를 다 때려 부숴 가루로 만들어 허공에 뿌려도 시원치 않을 마음을 고스란히 안고 말이다.

경인지청장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고, 29일 민주노총 이석행위원장이 만난 이상수 노동부 장관은 "적극적으로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했단다. 차라리 이들이 "나는 모르는 일"이라거나 "내 알바 아니다"라고 했으면 그 허탈감이 덜 했을까?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을 안고 돌아오는 길, 지인들에게 연락을 한다. 투정 반 하소연 반이다. 월요일부터 수시로 민주노총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적어도 주말에는 민주노총 차원의 집회가 잡힐 것이기에 미리미리 일정을 빼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들어와서 다시 민주노총 홈페이지를 확인하니 집회 일정은 없고, 31일 오전 10시에 ‘비정규 건설노동자 정해진 열사 정신계승 및 향후 계획 기자회견’을 한다는 보도자료가 올라와 있다. 밤 9시 26분에 올라왔다. 정광수 전기분과위원장이 발언이 끝나고 15분이 지난 시간이다.

머리 속에 뒤엉켜있는 말들, 지금은 다 풀지 않으려 한다. 나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데, 상급 단위 지도자들의 마음은 더 복잡하고 힘들겠지...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열사와 열사의 마음을 지키고 있는 조합원들이 조금이라도 덜 외로울 수 있기를...
태그

민주노총 , 열사 , 정해진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연정(르뽀작가)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