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년 개띠인 김용철은 늘 권력의 핵심부에 살았다. 사시 25회에 합격한 김용철는 주로 특수부 검사 생활을 오래했다. 서울지검 특수부 시절엔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수사에 참여했다. 살아있는 권력을 위해 죽은 권력을 치는 일을 주로 했다. 97년 삼성그룹 법무팀에 들어가 2004년 8월까지 주로 재무팀에서 일했다. 차떼기로 불리는 97년, 2002년 대선 비자금의 내막을 소상히 알 만한 업무였다.
삼성을 나온 김용철은 2005년 9월 12일 느닷없이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으로 들어갔다. 이 직함은 노동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홍세화 뒤에 붙어서 익숙하다. 왜 한겨레인가. 나는 궁금했다. 그 해 9월 14일 오후 김용철은 미디어비평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언론에 대한 무지와 특유의 시건방진 말투를 섞어 사용했다. 당시 미디어오늘에서 일하던 나는 후배기자가 쓴 김용철 인터뷰기사를 곱씹어 읽었다. 쉽게 의문이 풀렸다. 조폭 세계에서 손을 씻으려면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한다. 감히 삼성의 비밀을 다 아는 김용철은 두려웠다. 삼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방패가 필요했다.
참여정부조차도 그의 방패가 될 수 없었다. 2003년 2월 취임한 노무현 대통령은 곧바로 이건희의 처남 홍석조를 법무부 핵심 요직인 검찰국장으로 앉혔다. 삼성을 향한 참여정부의 구애였다. 정권도 자신의 방패가 될 수 없음을 안 김용철은 살기를 느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한겨레신문을 택한 김용철은 “새로운 일 좀 해보겠다는 것인데 마치 내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해석한다”고 투덜거렸다.
내 판단대로 살기위한 절박감이 아니라, 김용철 스스로 했던 말처럼 ‘언론이란 새로운 일을 좀 해보려 했다’면 묵묵히 그 길을 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김용철의 오만함은 며칠 못 가서 도졌다.
김용철은 2005년 9월 24일 한겨레에 제 이름을 달고 나온 첫 칼럼에서 “언론의 공익적 측면을 고려해 단순히 언론재벌을 피해 한겨레를 선택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스스로 밝혔듯이 97-2004년까지 두 번의 대선을 치르면서 삼성에서 그가 했던 시정잡배만도 못한 짓거리를 돌아볼 때 그의 입에서 “공익적 측면”같은 거룩한 단어가 나오는 게 신기에 가깝다.
김용철은 첫 칼럼에서 삼성 법무팀에서 일할 때 “상사의 욕심을 제어하려 했으나 무모했다”며 삼성을 향한 비수도 숨기지 않았다. 김용철은 한겨레에서 2년 동안 <법과 세상>, <밥 & 법>이란 칼럼을 10여 차례 썼고, 취재 기사에 대한 자문도 맡았지만 비상근이라서 활발하진 않았다.
한겨레는 지난달 8일 이번 폭로와 관련된 기사를 실었다. 김용철의 쓴 칼럼에 불만을 품은 삼성이 김 변호사를 법무법인 ‘서정’에서 내쫓았다는 거다. 김 변호사는 지난 5일 서울중앙지법에 서정에 출자한 자신의 출자지분반환 청구소송을 냈다. 결국 폭로의 단초는 돈이었다.
김용철은 골리앗 삼성에 맞서 싸우는 다윗 같은 의인이 아니다. 삼성에서 저지른 자신의 죄과를 폭로했지만 그것은 자신의 공소시효에, 대선 정국까지 고려하고도 남아 한겨레와 천주교 사제단까지 동원한 기획 폭로다. 여전히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인 김 변호사는 지난달 2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폭로 회견을 열었다. 다음날 한겨레신문은 1면 머리기사에 이어 3, 4, 5, 6면을 할애해 비자금 의혹을 전했다. 다른 신문들은 2, 3면에 한 줄 쓰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보도 시점을 놓고 한겨레에 비난이 쏟아졌다. 한겨레가 김 변호사의 폭로 문제를 놓고 삼성과 협상을 벌이고 있다거나, 광고 때문에 보도를 망설였다는 거다. 급기야 이춘재 한겨레신문 법조팀장이 지난 5일자 신문에 반박 칼럼을 실었다. 음해라는 거다.
한겨레신문 노보 ‘한소리’ 187호도 보도 경위를 소개했다. ‘한소리’에 따르면 지난 10월 초 김 변호사가 한겨레의 한 기자에게 내용을 털어놓으면서 시작됐다. 내용을 접한 한겨레 편집국장단은 고민에 들어갔고, 논의를 거쳐 당장 보도보다는 사회단체와 결합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 사이 김 변호사는 사제단을 만났다. 김 변호사와 사제단은 의혹 리스트를 만들어 차례로 공개하기로 했다. 한겨레도 기자회견 뒤 보도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선의든 악의든 기획 폭로인 건 명백하다. 나는 한겨레가 광고와 엿 바꿔 먹으려고 삼성과 거래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양자가 내밀하게 의견 조율한 건 맞다. 문제는 기획 폭로에도 불구하고 한겨레를 뺀 어떤 신문도 지난달 30일 이 사실을 1면에 싣지 않은 점이다. 만약 전직 청와대 직원이 “내 통장에 청와대 비자금 50억 원이 들어 있다”고 했더라면 조중동이 어떻게 나왔을까. 무소불위의 삼성 권력은 기획 폭로에도 끄덕하지 않았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김 변호사는 지난 10년 가까이 삼성 권력 강화에 큰 힘을 보탰다.
김용철은 삼성을 폭로하기 전에 스스로를 폭로해야 한다. 그리고 부끄러워해야 맞다. 참 불쌍한 인생이다.
-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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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호 님은 공공노조 교선실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