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IMF 10년, 삼성 10년

외환위기 10년의 교훈과 실천

노동,농민,빈민,여성,청년,학생 등 시국선언단은 오늘 IMF 10년, 민중생존권.노동기본권 해결을 위한 500인 선언을 발표했다. 지난 10년간 IMF 구제금융의 혹독한 대가는 민중이 고스란히 감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선언자들은 그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의 강행으로 이제 헌법과 법률에서 보장되던 노동기본권조차 휴지조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노동자, 농민, 빈민이 지금 받고 있는 생존 위협도 한미FTA를 비롯한 FTA체제가 본격화되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10년 전 오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가 부도 직전에 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김영삼 정부는 외환.금융위기의 해결책으로 IMF가 요구한 긴축재정과 고금리정책, 기업구조조정 및 노동력 사용의 유연화정책을 받았고, 경쟁력을 상실한 자본은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 임금 인하와 노동시간 연장 등 노동강도 강화 조치를 취했다. 사실상 경제공황 상태에서 수행되는 조치였다. IMF 처방은 곧 위기예방책이 아니라 공황을 겪음으로서 공황에서 벗어나게 하는 극약처방으로서의 위기타개책이었다.

당시 한보철강의 5조 원 투자는 상식밖의 일로 평가됐다. 철강 분야의 세계적 경기침체와 과잉투자 속에서 더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가 잇따랐다. 여기다 정태수 일가의 부정대출을 둘러싼 정경유착과 정치자금 비리 사실은 정경 유착의 구조적인 문제로 지적됐다. 제2의 산업구조조정으로 불려진 공기업 민간불하와, 이동통신 특혜산업 지정,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출, 현대의 제철산업 등 과잉중복투자가 허용되고, 끊임없는 경제위기설 속에서도 '규모와 경쟁력'의 경제정책에 따라 재벌 특혜는 줄어들지 않았다. IMF 구제신청은 과잉축적의 구조적인 인과의 문제인 동시에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의 파산을 의미했다.

10년 전 IMF 외환위기의 한 복판에 삼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실이 확인된 건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05년 X파일이 공개되면서 삼성그룹은 당시 기아자동차를 인수하기 위해 여야 정치권에 도움을 요청했고, 금융계열사에서 빌려준 자금 수천억 원을 미리 회수해 기아자동차 부도를 일으켰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한보,삼미,대농,진로에 이은 기아의 사실상의 부도 사태는 IMF 외환위기를 부른 단초가 되었다. 삼성이 외환위기를 부른 것은 아니었지만, 외환위기를 부른 자본의 과잉투자와 정경 유착 구조 속에 삼성이 큰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X파일이 공개된 후 참여연대는 97년 불법 대선자금 의혹과 관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 홍석현 주미대사,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표와 동생 이회성 씨, 전현직 검찰 간부 등 20여 명을 고발한 바 있다. 경제위기와 대선비자금의 상관관계가 확인되었고, 외환위기를 부른 1997년 정세의 한 가운데 삼성 일가는 보란듯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2003-2004년,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으로 노동자의 허리띠를 졸라맨 결과 외환위기에서 겨우 한숨을 돌리려던 시기, 참여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계화 정책과 자유무역협정이 추진되었고, 참여정부 마지막 해에 이르렀다. 이윽고 지금 우리 사회구성원 5명 중 1명은 상대적 빈곤층으로 전락했고, 700조 원의 가계부채를 떠안고 있으며, 가구당 4,500만 원의 빚더미를 진 채 사회적 빈곤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점상, 농민의 처지를 또 열거해서 무엇하랴.

그나마 다행이다. 한 가닥 빛이 보인다.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과 이용철 전 청와대 비서관의 잇따른 증언으로, IMF를 거치며 지난 10년간 구축되어온 지배시스템의 베일이 한거풀씩 벗겨지고 있어서다. 두 사람의 증언은 참여정부 초반, 삼성의 정검언 유착 관리의 실체를 보여준다. 1997년의 정경언검 유착 구조가 2005년에 이르러 X파일을 통해 공개되었다면, 2003-4년의 지배커넥션은 지금에 와서야 김용철, 이용철의 자기고백을 계기로 폭로되기 시작한 셈이다.

아직 정리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검찰은 2005년 말 X파일에 포함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의혹 등에 무혐의 결론을 내렸고, 삼성은 사필귀정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X파일을 고발한 이상호 기자는 그해 11월 징역6월 자격정지 1년의 유죄를 선고받고 말았다. 지금 김용철 변호사는 특검과 공정 수사를 요구하고, 이용철 변호사는 물증을 내놓기까지 했지만 과정과 결과는 아무도 예측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삼성의 차명계좌, 비자금, 족벌경영, 증여 등이 모두 불법인지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일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지배 커넥션에 몸을 담궈 삼성이 주는 안락감에 젖어있는 법조, 관료, 언론, 지식인의 실체가 제대로 드러날 수 있을지, 자본의 합리성과 투명성 강조 속에 자유무역협정과 같은 자본 중심의 정책을 중단할 계기를 포착할 수 있을지 어느 한 가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외환위기 10년의 파란만장했던 스토리와 함께, 우리 사회 명암 양면에 대한 최강삼성의 지배와 지휘는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신세계이마트, 삼성SDI하이비트, 삼성코레노에서 해고된 노동자들, 삼성생명 산재 노동자,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노동자들, 고대 출교 학생들 그리고 삼성의 옥쇄에 갖힌 김성환 위원장과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삼성 계열 노동자들이다. 잃어버린 10년을 찾는 것, 그것은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묵묵히 싸워왔던 삼성 노동자들을 먼저 찾는 일이며, 이상호, 김용철, 이용철과 같은 상식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시민사회 모두가 노력하는 데 있다. 이점이 삼성 비자금 폭로와 맞물려 외환위기 10년이 주는 교훈과 실천 과제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