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

[박영균의 철학으로보는세상](1) - 보수화하는 한국사회, 고삐 풀린 욕망

‘보수’라는 기관차

오늘날 한국사회는 ‘보수’라는 기관차에 올라타 있다. 원래 보수적이었던 5-60대에서부터 과거 386세대를 거쳐 20대 대학생까지. 여기에는 거칠 것이 없다. 한나라당의 인기는 상한가를 치고 있으며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이명박의 인기는 끊임없이 제기되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식을 줄을 모른다. 아니, 오히려 치솟고 있다. 위장 전입과 땅투기, 각종 위조와 편법을 통한 재산 증식, 자식들의 위장취업과 BBK라는 핵폭탄 주가 조작, 심지어 그렇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가용 운전사의 임금을 회사 돈으로 처리했던 그에게 거칠 것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2007년 대선 게임은 끝났다!

이 부조리한 상황에 대해 일말의 양심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검찰의 수사결과를 기다렸고 검찰은 아니나 다를까 ‘BBK 의혹’에 대해 확실한 면죄부를 주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을지 모르나 진실만을 가릴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은 검찰의 발표를 믿지 않았다. 적어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에 절반 이상은 검찰의 조사 결과를 믿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명박 후보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을 모른다. 마치 이명박 후보는 하늘이 낸 후보처럼 보인다. 40%를 넘어 50%를 향해 가는 지지율, ‘경제 대통령’을 꿈꾸는 그에게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떤 것도 묻지 않는다. 한마디로 ‘묻지마 관광’이다.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사람들은 이 현상에 심히 당혹스러워 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모든 사람이 반드시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들은 ‘지도자’에 대해서만은 유독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이제 과거의 것이 되었다. 강남의 땅투기꾼들과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을 비난했던 사람들이 이제 과거를 묻지 않는다. ‘과거를 묻지 마세요.’ 여기에는 역사도 삶의 진실도 없다. 오직 성공한 경제인의 강력한 리더쉽만이 있을 뿐이다.

성공신화! 이것이 오늘 날 한국 사회의 사람들이 믿는 전부이다. IMF 이후 사람들은 사는 게 자꾸만 힘들어진다고 불평을 한다. 그러나 그 힘든 삶이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이라는 것을 이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희망을 만들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보수’라는 기관차이다. 이것은 매우 기묘한 현상이다. 정치적으로 보수는 과거의 전통과 가치를 지키는 자들의 이념이다. 그들은 기존의 가치와 규범을 고수하며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현실을 부정한다. 그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도덕을 고수한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가치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한국에서의 보수는 ‘도덕’ 없는 ‘욕망의 기관차’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따라 사람들은 ‘부자’를 꿈꾸며 대통령 후보 이명박을 따라 가고 있다.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

오늘날 보수라는 ‘도덕’ 없는 욕망의 기관차가 자신의 알맹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빈껍데기의 이미지를 창조하고 있다. 그들은 경제 성장, 부자, 성공의 신화로 그들의 보수적 가치를 채워넣고 있다. 거기에는 이미 ‘보수주의라면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없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카페인 없는 커피를 즐기고 설탕 없는 콜라를 즐기듯이 ‘껍데기’가 전부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잉여의 시대, 소비사회의 풍경을 ‘잉여-쥬이상스(향락)’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는 내용이 없다. 우리네 욕망은 이미 이미지의 포로가 되어 있으며 우리의 냉혹한 현실을 감추는 상상에 붙들려 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업하는 사람치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다. 그까짓 정도의 잘못이야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이보다 더 나아간 사람들은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그것도 능력이다. 사람이 능력이 있으니 그렇게 돈도 벌고 사람들이 돈도 갖다 바치고 하는 것 아니냐.” 정확히 5년 전 당시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이회창의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졌을 때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 ‘보수’는 무언가 지켜야 할 기존의 가치나 도덕이 아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엄격한 아버지가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미 아버지를 통해서 사회적 규범의 엄격성과 제도적 강제성을 말했다. 정확히 ‘보수주의자’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는 이 규범과 제도에 상응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의 ‘보수’는 이와 같은 아버지가 아니다. 이 아버지는 ‘지켜야 할 가치나 도덕’ 또는 ‘종족의 수호자’로, 또는 ‘민족의 정기’로 승화된 아버지가 아니다. 이 아버지는 이미 살해되기를 거부하는 아버지이다. 가이아(땅)와 우라노스(하늘)의 아들로 태어난 크로노스는 폭압적인 아버지를 살해했고 제우스는 자신의 형제들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를 살해하고 새로운 세계, 법질서-상징계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그 이후 살해된 아버지는 ‘종족의 수호자’, ‘민족의 정기’-법 그 자체, 상징이 되었다. 그는 곧 법이자 규범이며 인간의 윤리적 잣대이다. 프로이트에게 부친 살해는 곧 어떤 규칙이나 규범도 지키지 않는 외설적인 아버지의 통치를 종식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문명이 생겨났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에서의 보수는 이런 아버지가 아니다. 그것은 살해되기 이전의 아버지, 법이나 규범, 가치에 구애받지 않고 닥치는 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채웠던 원초적 욕망의 화신으로서 아버지이다. 그것은 외설적인 아버지이다. 살해당한 아버지는 그 죽음을 통해서 사회의 질서와 규범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살해당하기 이전의 아버지는 원초적인 욕망을 통해 행동할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이것을 원한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 외설적인 아버지를 부르고 있다. 외설적인 아버지는 한나라당과 이명박으로 상징화되는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늘날 ‘잉여-향락’에 취해 있는 현대인의 욕망 속에 있다.

더 이상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현재 사회의 규칙을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분명 어떤 진실이 있다. 그것은 고삐 풀린 망아지인 이드를 통제하는 초자아가 이들을 통제하도록 한 것이 바로 그 욕망의 실현 가능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이 그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며 자신에게도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내 자신의 힘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이미 신자유주의적 경쟁은 나에게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애초부터 욕망은 박탈되어 있다. 마치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보다 폭력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쟁취하려 하고 모든 규칙을 파괴하듯이 오늘날 사람들은 박탈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바로 여기에 현재 진행되는 보수화의 역설이 있다.

보수화의 역설

마치 갖고 싶은 것을 사달라고 징징 우는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아버지’를 원한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생존경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자신의 구차한 삶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거대한 타자를 원한다. 박정희 신드롬이 그러하며 강력한 지도력이 그렇다. 이명박 후보의 추진력이, 그에게 풍겨나는 구린내에도 불구하고 그를 오늘날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성취해 갈 수 없는 자신의 비루한 삶을, 자기 대신 얻게 해 주는 아버지를 원한다.

그러나 이 아버지는 결코 ‘법과 도덕, 규범’의 가치 아래서 행해지는 ‘보수적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애초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이드가 취해야 했던 방편으로서 법과 도덕, 규범이 있었듯이 그 방편조차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외설적인 아버지’이다.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불법과 오물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라캉이 말했던 공식을 따른다.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공식 말이다.

이미 여기에는 두 가지의 짙은 욕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나는 그 욕망이 ‘자본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본’은 욕망을 생산한다. 사람들이 징징 우는 것은 ‘결핍’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이 창조해 낸 이미지의 세계, 자신의 욕망이 되어 버린 자본의 화려한 쇼윈도를 나르시시즘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원한다. 여기서 나르시시즘을 창조하는 것은 다른 누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며 그 자본의 권력 안에서 살아가는 내 자신의 욕망이다. ‘자본의 욕망’이 나의 욕망이 되고 그들은 그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소비자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필요를 따라 움직이는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자본이 생산해 내는 욕망을 따라 ‘잉여’ 그 자체를 즐기는 ‘소비자’이다. 여기에 나의 욕망은 없다.

다른 하나는 패배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자기의 욕망을 지킬 수 없는 자들, 그리하여 발신지를 향해 무작정 움직이는 좀비처럼 사람들은 탐욕스럽게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 그 욕망은 자신이 의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을 중심으로 경쟁적으로 움직이는 ‘이기적 욕망’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내 힘으로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진실’ 또는 ‘알맹이’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내 허기진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힘이다. 따라서 거대한 권력을 가졌다고 믿거나 믿어지는 그 누군가의 힘을 쫓아간다. 여기서 내 생명의 힘은 거대한 타자의 충직한 노예가 된다.

바로 여기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보수화의 역설이 창조된다.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강력한 카리스마의 독재적 인간을 선호한다. 여기서 그를 움직이는 것은 욕망이다.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 내 주변에서 나와 함께 하는 관계들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 욕망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러나 그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며 내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욕망도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나 기치가 없는 보수’, ‘외설적인 아버지’로서 보수는 오히려 그들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크로노스가 그렇게 했듯이 말이다.

보수화의 비극

‘알맹이 없는 껍데기’로서 보수는 결국 그들을 향해 몰려드는 좀비를 물어뜯는 악귀가 되어 대중의 욕망을 파괴할 것이다. 대중의 패배적 욕망, ‘잉여-향락’에 취한 자본의 욕망은 결국 대중을 조종하는 힘이 되고 대중의 자율성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권력의 화신이 되어 돌아올 수밖에 없다. ‘보수’의 역설은 바로 그들이 이와 같은 ‘외설적 아버지’의 파괴적 힘, ‘이기적인 인간들의 무한경쟁’을 조절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취할 수밖에 없는 이회창 후보와 같은 대쪽의 이미지, ‘법 만능주의’에 있다. 그들은 그것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법은 전통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으로서의 가치가 아니다. 이 법은 ‘외설적인 아버지’의 그 욕망의 파괴적 힘을 봉합하거나 추한 자신의 얼굴을 감추는 밀봉의 이미지로서 법일 뿐이다. 법은 우리의 치부를 가리는 무화과 잎사귀에 불과하다. 오늘날처럼 각종 위원회와 법들이 난무했던 시대도 없었을 것이다. 온갖 규칙들과 제도들. 거기에 무수한 종교적 참회와 규칙들까지. 회개와 참회의 규칙들은 우리의 ‘외설적 욕망’이 풀어 놓은 우리의 자화상을 감추거나 자위하는 행위들에 불과하다. 탄핵 때에도 최종 결정은 ‘헌법재판소’를 향했고 이번에 BBK도 검찰의 손에서 결정되었다.

그러나 법이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한 것은 우리들의 고삐 풀린 욕망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치부를 감추며 그것을 정당화한다. 교회 지도자들까지 나서서 이 외설적인 아버지의 법에 대해 말하며 그것을 정당화한다. 일요일이면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자신의 삶을 속죄한다. 이회창 후보는 이명박의 치부를 감추거나 봉합하는 무화과 잎사귀이다. 그들은 겉으로 법을 이야기하지만 이 또한 알맹이 없는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다. 마치 그가 이전에 겪어야 했던 정치자금을 둘러싼 공공연한 비밀처럼 말이다.

그러나 공동체의 법을 파괴하고 ‘외설적 아버지’를 불러들인 것은 다른 누가 아니다. 자본의 욕망을 자기의 욕망이라고 믿으며 이기적인 개인들로, 이기적인 좀비들로 경쟁적인 삶을 선택하고 나 자신을 이 비극의 한가운데로 몰아넣은 내 욕망이 그렇게 한 것일 뿐이다. 이것은 공포이다. 그러나 공포는 내 자신의 욕망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지 다른 누구가로부터 내게로 온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공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파괴되는 것은 거대한 아버지를 따라 나의 외설적인 욕망에 충실했던 나 자신일 뿐이다. 여기에 오늘날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있다.
덧붙이는 말

박영균 님은 건국대 연구자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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