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의 일상화, 일상의 남북화

[미끄럼틀:한장의정치](25)남북문제가 보다 일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으면

사이버정치놀이터 '미끄럼틀'이 오픈했다. 문화연대는 '미끄럼틀'에 대해 "급진적 행복을 찾아 상상력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안내서"라고 소개했다. 민중언론참세상은 '미끄럼틀' 중 '한장의 정치'를 기획 연재한다. '한장의 정치'는 "새로운 사회, 급진적 정책을 상상하고 공론화하기 위한 정책칼럼"으로 "만화가, 미술작가, 활동가, 교사, 평론가, 교수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회운동과 함께해온 이들이 상상하는 정책칼럼이 게재될 예정"이다.[편집자주]

[출처: YANA THE CAT www.yana.co.kr]

선거를 하루 앞둔 오늘, <한 장의 정치>에 남북문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한 장의 정치>에 던진 스물 네 개의 그물코가 지나치게 컸기 때문에? 아니다. 토익도 걸리고 청소년 가출도 끌려올 정도로 이 그물은 충분히 촘촘하다. 그렇다고 남북문제가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은 아닐 것이다. 종전이 아닌 휴전의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남성이 잠재적 군인이 되는 현실 속에서, 남북문제는 실재이자 가장 치열하게 고민해야할 정치적 의제중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남북문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왜일까. 의도적인 결과는 아니다. 무언가가 무의식적으로 남북문제를 억압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남북문제는 ‘말해질 뻔’ 했다. 이 글은 한 장의 정치를 위한 두 번째 글이다. 독자가 볼 수 없을 첫 번째 글에서 나는 남북문제를 이야기하였다. 엉뚱하게도, 농촌총각과 북한여성의 결혼을 주선하잔 제안을 했다. 국제결혼을 남북결혼으로도 풀어보자고 하였다. “새로운 사회, 급진적 정책을 상상하고 공론화하기”란 <한 장의 정치> 취지와 맞아보였다. 남북적십자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성공단과 같은 국가적 프로젝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남북결혼과 같은 일상적 소통이라고 생각했다. 이산 1세대, 2세대의 고령화 속에 희미해져가는 북한과의 혈연적 유대를 복원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쓴 첫 번째 글은 이곳에 실리지 못했다. 다음날 편집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민족주의, 남성주의, 가족주의, 후견인주의로 해석될 여지가 있음을 말해주었다. 오해의 소지를 없앨 수 있도록 ‘약간의 수정’을 부탁받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조금의 수정이 쉽지 않았다. 생각건대, 남북결혼이란 소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북한을 생각하며 민족주의를, 남성주의를, 가족주의를, 후견인주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나에게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이들에게) 통일의 정당성은 민족주의와 가족주의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 잘 살지 못하는 북한을 도와야 함은 후견인주의로 나타났고, 남성주의로 나타나게 되었다. 편집자는 오해의 소지로 돌려 말했지만, 오해가 아니었다. 정확히 짚어내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 내가 말하고픈 것 중 상당수는 그와 같은 것들이었다. 남북문제는 진보의 금기를 마주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당혹감은 나만 갖는 것일까? 혹시 <한 장의 정치> 속에 남북문제를 빈 구멍으로 만든 원인도 이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남북문제를 건드리는 순간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민족주의에, 남성주의에, 가족주의에, 후견인주의에 대한 방어기제가 남북문제에 대한 완전한 침묵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닌가. 당연히 이야기해야 할 것에 대한 침묵. 이로부터 발생하는 또 다른 불편함. 좌파적 금기를 어김에 대한 두려움. 결국 난 약속된 ‘약간의 수정’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오늘에서야 남북문제에 대한 퍼즐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그 실마리는 그람시(A. Gramsci)로부터 찾을 수 있었다.

“즉 한편으로는 그의 활동 속에서 은연중에 함축된 채 세계를 변혁하는 실천에서 실제로 그를 그의 동료 노동자 모두와 결합시켜주는 의식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피상적으로 표명하거나 말할 때 나타나는 의식으로 그가 과거로부터 무비판적으로 빠져 있는 의식도 있다. 그러나 이런 피상적인 말 속에 담긴 생각도 적잖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또한 어떤 특정 사회적 집단과 관계 맺고 있으며 나아가 도덕적 행위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다양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람시의 옥중수고 2>, pp.173-174)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 그람시는 대중적 상식을 결코 단선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상식은 한편으로 피상적이고 무비판적인 것으로서, 혁신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는 또한 새로운 가능성의 힘임을 그람시는 알고 있었다. 내가 ‘가벼운 마음으로’ 남북문제를 말하며 마주하였던 민족주의, 가족주의, 남성주의, 후견인주의 역시 그와 같은 상식적 판본의 하나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 없는 상식이다. 이에 대한 전적인 거부가 아니라, 이를 껴안고 넘어서야만 하는 문제이다. 그 때에 남북문제에 대한 대중적 동의가 확보될 수 있다. 오점 없는 좌파의 순수성이 답이 아니라, 좌와 우의 얼룩 속에서, 다름의 유기적 섞임 석에서 현실 역사를 전개해야 한다. 금기를 넘나듦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지 않고서는, 대중적 상식과 함께 호흡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회, 급진적 정책을 상상하고 공론화하기”는 불가능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간에, 남북문제가 보다 일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졌으면 한다. 이는 대중적 상식과 함께하는 남북관계를 의미한다. 민족주의와 가족주의, 남성주의와 후견인주의는 남북의 일상화와 일상의 남북화를 위한 꽤나 괜찮은 진입로처럼 보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기에 가장 상식적인 수준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한다. 이런 의미로 남북결혼을 제안하였다. 완전한 답이 아니라, 작은 출발점으로서 말이다.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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