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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내몰리는 군산 하제항 어민들

[주용기의 생명평화이야기](44) - 백합잡이 어민들과 폐선 처리되는 배

  하제포구에 정박해 있는 어선들

오랜만에 군산시 하제항을 찾았다. 지난해 11월 4일 오전 10시50분경에 도착하자, 어선들이 가득한 가운데 몇몇 어민들이 잡아온 조개를 분류하느라 분주했다. 죽고 남은 껍질들이 한 구석에 가득 쌓였다.

어느 나이 드신 부부가 어선 갑판에서 노랑조개, 떡조개, 동죽(해래기), 피조개, 백합, 가무락조개(모시조개)를 자루에 담고 있었다. 4일 새벽 3시부터 오전 10시까지 작업을 했다고 한다. 4명의 하역 등짐꾼들이 다가오더니 자루를 지게에 지고 도매상의 트럭에 쌓아올렸다. 지게꾼들이 지게 한번 지고 나르는데 1천원을 번다. 아주머니에게 넘겨준 전표를 보니, 동죽 29망, 대 생합 66kg, 중 생합 73kg, 소 생합 60kg, 모시조개 10kg, 소 피조개 64kg, 바지락 26kg, 떡조개 53kg이다. 아주머니는 웃음 띤 얼굴로 80만원을 벌었다고 말한다. 활짝 웃음짓는 얼굴이 보기에 좋았다.

바로 옆에서 조개 분리작업을 하고 있던 또 다른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울화가 치미는 듯 “방조제 막고 나서 한 달에 두 번, 세 번 정도 물을 넣어주기 때문에 한 달에 10일 정도밖에 못 나간다. 뭐 먹고 살 것인가, 배에 들어가는 돈이 많다.”며 하소연 한다. 그런데 조개를 배에서 나르고 있던 아들의 대응은 사뭇 달랐다. 곁눈질 하면서 나를 지켜보던 그 아들은 새만금사업을 왜 반대하냐면서 “이제 와서 못 막게 하면 어떻게 되냐. 이제 어쩔 수 없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곧바로 “지금 이라도 못 막게 해야제. 정치인 놈들은 도둑놈들이여. 보상도 부스러기 주면서 없는 사람 못 살게 한다니까. 보상을 5-6천만 원 주면서 막아부렸다니까. 그때 못 막게 했어야 하는데.”라며 화를 내며 말했다. 8여명의 마을 아주머니들이 조개더미 가장 자리에 앉아 조개 골라내기에 바쁘다. 이 아주머니들은 한 시간 일하면 5천원을 번다고 한다. 근래 들어 포구가 활기차다고 말했다.

한평생 어업으로 살아온 한 어민의 이야기

최근 마을 전체 상황을 듣기 위해 한 젊은 어민을 만났다. 대략 두 시간 가량 말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본다.

  어선에 가득 담겨진 백합자루들

"어업한지 35-36년 됐다. 잠시 몇 달 동안 쉬었던 적이 있지만 계속 어업만 했다. 전남 장흥에서 15살에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지금은 45살이다. 하제 주민들은 전남지역에서 온 사람이 90%다. 목포, 장흥, 여수 등에서 왔다. 주로 내가 15-16살 때 많이 이사를 왔다. 처음 이사를 올 당시엔 노랑조개가 많이 나와 일본에 수출했다. 그 때 군산에 가공공장이 10개나 됐다. 잘 팔리다 보니, 가공된 노랑조개를 사고 싶어도 살수 없을 정도였다. 삶아서 팔거나 조개의 혀처럼 생긴 부분을 바늘로 끼운 채 말려서 술안주로 많이 팔렸다. 1만원이 넘었다. 예전에는 많이 말렸는데 지금은 말리는 사람이 없다.

조개 잡는 도구는 처음엔 갈퀴가 달린 소라방을 허가받아 사용했다. 그러다가 20년 전부터 고대 고리로 잡기 시작했다. 마을에 어떤 주민이 처음 만들었다. 원래 소라방(소라, 배꼽)만 사용했는데 다시 스크류가 달린 땅띄기 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1986-1987년엔 노랑조개가 고갈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대천항, 오천항까지 올라가 3년간 어업을 하면서 살다가 왔다. 그곳에서 파이프방, 개지(키조개 잡는 기술) 등 갯땅 긋는 어장을 다 가리켜줬다. 당시엔 다 허가 받은 배였다. 허가가 한건 당 30만원이었다. 이사를 가야 허가받을 수 있어서 많이들 이사를 갔다. 아이들도 전학을 갔었다.

이곳 하제항에서 한 사람이 땅띄기 배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모두들 배 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기존의 소라방을 사용할 경우엔 노랑조개들이 갑자기 껍질을 닫으면서 혓바닥을 잘라버려 잡은 양 중에 40%정도를 팔지를 못했는데, 땅띄기 배를 사용하면서 그러한 일이 없어졌다. 다시 말해 부정어업 방식, 즉 땅띄기 방식으로 잡은 것이 더 좋았다. 스크류를 단 땅띄기 배는 고대 고리를 사용하기 시기와 같았다. 땅띄기에 사용한 와이어를 작게 달수록 조개들이 잘 잡혔다.

남들보다 군대를 늦게 갔었다. 대천에서 헌병에 잡혀서 갔다. 부모가 징집장을 알려주지 않아 나온 지도 몰랐었다. 실제로 어업을 시작한 것은 18살부터다. 아버지가 작업을 하는 것을 따라 다니며 배웠다. 그런데 다른 친구들이 많이 잡고 해서 나도 아버지만 따라다니지 않고 직접 시작하면서 많이 잡게 됐다. 당시엔 어군탐지기가 없었는데, 그땐 미군기지에서 켜진 불빛을 보고 방향을 잡았다. 개우렁, 소라는 물이 들 때 잘 잡혔는데, 방향을 잘 잡고 가야 잘 잡혔다. 안개하고 태양하고 달과 구름을 보고 각도를 계산해서 방향을 잡았다. 그 당시엔 백합을 주로 양식을 했다. 많이 잡아야 100kg 정도였다. 1kg에 2만여 원까지 받았다.

  백합을 선별하고 있는 어민들

그런데 새만금 보상이 끝나면서 더 많이 잡혔다. 말뚝을 빼서 썩었던 갯벌이 사라졌다. 우리 배들이 작업을 할 때 갯벌을 휘저으니까 갯벌이 살아났다. 우리 배들이 가며는 백합이 더 생겼다. 죽뻘이 없어지고 모래성분이 많아졌다. 청소도 많이 해서 갯벌도 많이 깨끗해졌다. 5-6전 부정어업 단속할 할 때면 군산시청에 가서 항의했다. 당시 군산시에선 주민들의 얘기가 맞다고 했다. 그래서 단속도 많이 나오지 않았다. (주민들이 뭉쳐서 반대운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불법을 조장한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했다). 당시엔 계화도 주민들과 함께 맨손어업과 어선어업이 서로 양을 조절해 잡도록 했다. 2000년도 이전의 일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스스로 양을 조절해 잡았다. 주민들이 가, 나, 다 조로 나누어 작업을 했다. 조개를 고르는 망은 19mm의 채를 사용했고, 이 보다 작은 조개들은 다시 놓아주었다. 그러다가 요즘엔 작은 것도 다 잡는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올 여름엔 조개들이 다 벌어져 죽었다. 여름엔 한 달에 15일 정도도 조개 잡으러 바다에 나가지도 못했다. 한 배당 1,500만원도 벌어들이지 못했다. 비가 많이 온다고 일기예보를 할 때 배수갑문을 통해 바닷물을 빼는데, 그럴때면 더러운 물이 상류에서 내려오면서 그 때 조개들이 다 까져 죽었다. 그때는 바닷물이 빨강색으로 변했다. 간장물 같았다. 그물을 달고 바다에 나가 잡다보면 동죽, 바지락은 다 벌어져 죽어 있었다. 하지만 백합은 죽지 않았다. 잡힌 조개들은 퍼걱퍼걱 소리가 났다. 그 물이 3-4일 정도 담겨 있으면 다 죽어버렸다. 지금처럼 조금이라도 수문이 열려 있으니까 살아있는 것이다. 사리 때는 바닷물을 빼서 맨손어민들이 어업을 하고, 조금 때는 어선어업을 하는 배들이 조개를 잡는다.

요즘엔 수문조작 시간을 알려준다. 그동안 알려주지 않아서 항의를 한 후 받아냈다. 지금은 수문을 개방한 상태다. 수문을 열어 바닷물을 뺀 후 바닷물이 -1m가 되면 수문을 닫아 맨손어민들이 조개들 잡는다. 맨손작업을 많이 하는 계화도 주민들이 요구를 해서 수문을 열고 닫고 한다. 그래서 하제나 어은동 사람들은 계화도 주민들에게 치인다고 한다. 올해 수입은 괜찮았다. 한번 나가면 총 어획고가 100만원 벌었다. 한 달에 13-15번 정도로 나갔다. 기름값, 그물, 선원(20만원)에게 주고 나면 하루에 40만원을 벌었다. 이 돈도 기계엔진 수리하는 곳에 대부분 들어간다.

조개를 잡는 때는 새벽 3,4시에 나가서 12-2시 사이에 들어온다. 작업시간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지금도 예전처럼 8시간 정도 일한다. 이렇게만 하면 매일 60만원씩 20일정도만 일하면 된다. 매일 나가려는 어민들도 있다. 물막이 이후 달라진 모습이다. 한번 나가면 최소한 100만원이 넘어야 한다. 시간이 걸려도 그것을 맞추려고 한다. 아직 젊으니까 열심히 벌어야 한다. 가족은 어머니, 부인 그리고 자녀로 고2, 중3, 중3, 초2 등 전체 여섯이다.

처음에는 노랑조개밖에 없었다. 그것이 본업이었다. 동그란 가구 한가득해서 3000-1500원이었다. 처음엔 노를 저어서 배 가득 잡았다. 기계는 양수기용 야끼다마(화약 넣어서 돌리는 것, 멍청한 것이라고 말함)가 사용되다가, 일본에서 들어온 중고 기계로 사용하다가 대동회사에서 해상기계가 나왔다. 많이 수입을 올릴 때면 한해에 1억 3천만원까지 벌은 적이 있다. 내가 23-24살 때다. 최고로 많이 벌 때는 한번 나가서 8백만 원을 벌었다. 배꼽, 소라를 잡아서 그렇게 벌었다. 당시 개그맨이 방송(유머일번지의 우리회장님 우리회장님에서)에 나와서 술안주 골뱅이(큰구슬우렁이, 배꼽을 말한다)를 얘기하면서 폭발적으로 노랑조개 수요가 많았다. 당시엔 갯우렁 1kg당 2500원까지 갔다. 지금은 500원밖에 안된다. 한번 많이 잡으면 1-2톤 잡은 사람도 있었다. 갯우렁이 야행성이라 밤에만 잡았다. (이 갯우렁이가 조개를 잡아먹기 때문에 갯우렁이를 많이 잡았다는 것은 조개가 많이 서식하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배꼽(큰구슬우렁이)잡는 배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많이 생겼다. 위기감을 느껴서 그런 것 같다. 소라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해 인가 거의 안 나오다가 다음해는 엄청나게 많이 잡혔다. 그때도 1kg당 4천원이었는데 1천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4천 원 정도 한다. 암소라가 5천원까지 나간다. 암소라가 맛있고 잘 팔린다. 주둥이가 빨간색인 것이 암컷이다.

  백합자루를 나르고 있는 항운노조원들
지금은 밖으로 이사 갈 사람은 다 나갔다. 거의 99% 빠져나갔고 실질적으로 어민들만 남았다. 어촌계장과 서춘길씨 등 추진위원들이 이주문제로 군산시, 국방부와 협의 중이다.

우리 주민 157세대가 이주 대상인데 그 중에서 원하면 시내로 가도록 할 것이다. 군산시장을 만났을 때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했다. 아직까지 이주한다는 계획이 없어 찹찹하지만 아직 동요는 없다. 30세대 정도는 김중근 목사가 별도로 대책위를 구성해 대응하고 있다.

지금 어민은 70명이다. 모두 어촌계원이다. 배로는 80척이 되는데 어제부터 감척한 배를 부수고 있다. 감척 수는 30척 정도나 된다. 감척해도 도로 배를 사온다. 그래서 80척 그대로다. 전부 선외기로 바꿨다. 배척 수는 그대로 크기만 작아졌다. 실제 움직이는 배는 45척이다. 매일 30-40척 미만은 움직인다.

결혼은 28세 때 했다. 총각 때 시내에서 살던 부인을 그냥 대리고 왔다(웃음). 보상은 부부가 맨손어업, 어업권, 배보상, 어촌계 양식장 등 9천6백 원만을 받았다. 보상은 떨어질 만하면 나누어 주었다. 많이 나올 때는 4천만 원을 받았고, 나머지는 분납해 받았다. 몇 십만 원 받은 적도 있다. 돈 떨어질 때만 하면 줬다. 술먹기 좋게 주었다. 군산시내 사람들은 돈을 한꺼번에 준 것으로 대부분 알고 있다. 사채 빚은 없었지만, 수협 빚을 갚고 집 한 채 지으니까 없어졌다. 사채 빚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이라도 했는데, 사채 빚이 있는 사람들은 빚 갚는데 다 섰다.

요즘 주민들은 이주계획과 바다 나가 조개 잡는데만 관심을 갖고 있다. 어업만 하면 아무 말이 없이 갈등이 없다. 골프장 투쟁 때 타격을 많이 받아서 다시 결집해 투쟁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당시에 농약폐수를 받아 군산시에 주었는데 조사결과가 1급수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골프장 사업주에게 어떠한 제기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확실한 근거를 잡아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잡나. 새만금 환경감시원들이 새만금사업단에 연락을 한다. 그러면 사업단 측에서 와서 보기는 하는데 조용히 넘어가지고 말한다. 카메라로 찍어 기록을 해 놓고 있다.

큰 애는 군산상고를 다니고 있다. 캐나다에 한 달간 갔다 오더니 잘 한다. 더 열심히 새만금 반대운동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지금은 보상받을 돈 낼 태니까 방조제 둑 터달라고 주민 모두들 말한다. 수문 두 개만 열어놓으면 오히려 부부끼리 작업하기 더 좋다. 수십이 낮아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새만금 방조제 막고 나서 조개가 많이 폐사했고, 그동안 대략 500억 원 손해 본 것 같다. 올해는 조개 종패가 많이 생겼다. 방조제를 막기 전 보다는 조개가 잘 크지 못한다. 예전 같으면 1kg 당 1,500원이었는데 지금은 1천 원 정도 나간다. 잡은 종패가 1천 톤 정도 팔려 나갔다. 방조제가 막히기 전엔 하루에 이곳 하제포구에서 유통되는 돈이 많을 때면 3-4천만 원이나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루에 30-40척이 1백 원씩은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매인(1kg 당 200원 마진, 실제는 500원 정도인 것 같다), 지게꾼인 항운노조(한번 운반하는데 1천원 수고료), 조개 선별하는 아주머니(1시간당 5천원), 가계, 주유소 (1드럼(200L)당 13만원) 등으로 순환되는 돈이 그렇다. 하루 작업하는데 기름은 200L, 작업시간은 8시간 정도 되었다. 조개 고르는 여자분들은 한 배에 15명 정도 일했다. 항운노조는 8명이다. 중매인이 원래 33명이었는데 지금은 8-9명이다. 어민들이 21kg씩 담아 넘긴다. 배고플 때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있다. (유통망까지 알면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철공소, 크레인 사용에 돈이 많이 든다. 크레인 한번 사용하면 20만원이나 든다. 배 40척이 500명을 먹여 살렸다. 하제사람들은 이마트, 롯데마트로 가서 시장을 봤었다. 주일마다 한번 씩은 갔었다.

찜질방으론 명성타운(목욕비가 4천원으로 비싸다)을 이용했다. 잡은 바지락은 부산, 경남으로 가고, 가락동시장으로는 많이 나가지 않았다. 예전에는 가락동시장이 쉬면 조개 잡는 것도 쉬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젓갈을 담는 곳으로도 많이 팔려 나간다."


  폐선처리를 위해 끌어 올려 지고 있는 선외기

한편 하제항 한편에선 폐선 처리된 선외기를 트럭에 실고 있었다. 이배는 5천5백만 원의 보상비를 받았단다. 바깥에선 포그레인으로 폐선 처리된 어선들 부수고 있었다. 하제주민들이 폐선처리한 배가 31대라고 했다. 그리고 철공소가 있는 육지로 한 척의 목선이 끌어 올려 지고 있었다. 오늘(4일) 이른 아침에 조개를 잡다가 배가 침몰되었는데 조금 전에 인양해 포구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렇듯 하제포구의 어민들은 불안한 앞날에도 아랑곳 않고 하루 하루를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을 떠난다면 이곳에서 써진 온갖 인간사와 문화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이곳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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