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석학? 학살 전범!

[칼럼] 전쟁범죄자 헨리 키신저의 방한

헨리 키신저(85)가 왔다. 조선일보가 21-2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여는 ‘제2회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에 참석차 방한했다. 그의 입으로 1951년에 첫 방문했다 했으니 반세기 넘게 이 땅을 드나든 셈이다.

조선일보는 20일자 1면에 인천공항에 내린 키신저를 보도했다. 사진 밑에는 “지도자는 자신만의 비전 있어야”한다는 키신저의 일성을 제목으로 단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키신저는 이명박 당선자를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로 추켜 세웠다. 지난 5년간 손상된 한미관계 복원에 관심이 많다고도 했다. 한반도 통일을 지지하지만 “북핵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냉전 사고도 밑자락에 깔았다.

조선일보는 20일자 8면 전체를 털어 자사 주최의 이 행사를 소개했다. 8면 기사 제목은 “세계 리더들과 함께 아시아의 미래를 그리십시오”였다. 여든이 넘은 전쟁범죄자 키신저를 불러 놓고 아시아의 ‘미래’를 그리라니. 아시아의 ‘과거’나 ‘몰락’이라면 모를까.

키신저는 1923년 5월 독일 퓌르트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다. 1938년 나치를 피해 도망 나온 키신저는 2차 대전 말 미 점령군으로 조국 독일에 돌아가지만, 이미 미국 국적은 얻은 뒤였다. 종전 후 10년 넘게 하버드에서 조용히 보낸다. 겉으로 키신저가 배우고 가르친 과목은 정치학이다. 그러나 속으론 전쟁학이다. 그는 1959~69년까지 미 방위연구계획을 주도하면서 팍스 아메리카의 문을 열었다. 본격적인 정치행보는 닉슨부터 포드 행정부까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1969~75년)과 국무장관(1973~77년)을 하던 때다. 그러나 키신저는 1955년부터 군발이 대통령 아이젠하워나 섹스광 케네디, 존슨을 두루 거치면서 안보 분야에서 일했다. 냉전이 키신저를 오롯이 키웠다.

한국 언론은 키신저를 온건 매파로 분류한다. 그러나 그는 극우파의 맹주다. 1969년 4월 14일 동해 공해상에서 미 해군 전자첩보기 EC-121이 북한 공군기에 격추돼 승무원 31명이 몰사했다. 퓰리처상에 빛나는 뉴욕타임즈 출신 탐사보도 전문기자 시모어 허쉬(Seymour M. Hersh)는 1984년에 쓴 '권력의 대가, 닉슨 백악관의 키신저(Price of Power : Kissinger in the Nixon White House)'에서 당시 비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 비행기는 68년 납치된 푸에블로호와 같이 적성국 통신감청을 전문으로 했다. 당시 대통령 닉슨과 안보보좌관 키신저는 무력 보복을 주장했다”고. 이때 키신저에 맞서 전쟁을 말린 쪽은 CIA였다. CIA는 북한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고의 도발이 아니고 북한의 관제실수라며 온건책을 주장했고, 닉슨은 이를 수용했다. 당시 미국이 의사결정 2인자인 키신저 주장대로 무력 보복을 했다면 한반도는 지금은 지도에서 사라졌을 거다. 제 나라를 없애려 했던 노인네를 석학이라며 초청하는 신문사가 있다. 이 일화는 조선일보 출신 조갑제가 쓴 책 '국가안전기획부(1988년)' 218쪽에도 상세히 나온다.

  미 정보기 피격을 보도한 동아일보(69년 4월16일 1면)

떠벌이 키신저는 1974년 11월 포드 대통령과 함께 미 국무장관으로 방한해서도 “한국의 국무총리(김종필)와 국회의장(정일권)이 자신의 하버드대 제자”라고 떠벌린다. 키신저는 숱한 여배우와 가수들과 문란한 사생활 끝에 74년 봄 낸시 배긴스와 비밀 결혼해 호사가들의 입을 즐겁게 했다. 얼마 전까지 열린우리당의 고문이던 조세형 전 의원이 쓴 '워싱턴 특파원(1976년, 민음사, 48쪽)'에도 키신저의 떠벌이 기질은 잘 나온다. 조세형은 키신저가 정치 일선에서 뛰던 1968~74년까지 한국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지내면서 키신저를 직접 겪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런 유신독재 때 책을 썼던 조세형 기자조차 키신저를 ‘아시아의 미래’라고 추켜세우진 않았다. 그런데 언론자유가 활개 치는 21세기에 키신저를 영웅으로 그리는 신문이 있다. 조세형은 그의 책에서 키신저의 성공 비결을 “카우보이처럼 혼자 행동하는데 있다”고 했다. “무자비할 만큼 현실적”이고 “힘의 존중”을 신앙으로 여기는 인물로 묘사한다. 30년 전의 문법임을 감안하면 조세형이 본 키신저는 ‘깡패 부시’를 능가한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1969~73년의 1기와 1975~79년의 2기로 나뉜다. 1기 킬링필드는 미국이 먼저 자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크메르 루주가 집권했던 2기만 기억한다. 1기에 미국의 폭격으로 60만-80만의 캄보디아 민중이 죽었다. 1기 학살 때 미국은 B-52 전략폭격기로 53만9129톤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미국이 2차 대전 때 일본에 쏟은 포탄 16만 톤의 3배다. 1기 학살의 주범은 닉슨과 키신저다. 키신저는 “베트콩들이 캄보디아를 보급선으로 삼아 준동한다”며 캄보디아 비밀폭격을 주도했다. 뒤늦게 미 의회가 중립국인 캄보디아 폭격을 문제 삼자 키신저는 “캄보디아에 거점을 둔 베트콩을 공격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키신저는 베트남-미국 간 전쟁의 제3자였던 캄보디아를 향해 비밀전쟁을 수행했다.

2005년 4월 '한겨레21'은 베트남전 종전 30돌 기념으로 전 베트남군 총사령관 보응웬잡 장군(당시 94세)을 인터뷰했다. 보응웬잡은 우리에게 '인민의 전쟁 인민의 군대(백두, 1988년)'으로 더 잘 알려진 디엔비엔푸 전투의 노장이다. 그는 “스웨덴 한림원은 1973년 평화협정의 공로로 키신저와 레둑토 당시 북베트남 수상을 노벨평화상 공동수상자로 지명했지만 레둑토는 베트남에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고, 위선자 키신자처럼 비굴하지 않겠다”며 수상을 거부한 사실을 소개했다. 이런 키신저가 세계적 석학이니 국제전략전문가란 이름으로 여든이 넘도록 호사스런 여생을 보내고 있다.
덧붙이는 말

이정호님은 전국공공노동조합 교육선전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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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헨리 키신저 , 전쟁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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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이게 현실이라니...

  • 아침이슬

    키신저라는 사람은 옛날부터 귀에 익숙한 이름이다.
    많이 들었고 관련서적도 조금인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아품을 전가 시킨다면 그것은 명예로운 자가 아니다.
    정치는 올바른 이치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고 백성을 속인다면 그것은 더이상 지도자요 리더라고 할수 없다.
    지식은 올바로 쓸때 빛나는 것이다.
    지식을 올바로 쓰지 못하면 그것은 더 이상 지식이 아니라
    악독한 독이다. 악독한 독을 입안에 품고있다면 그것은
    더이상 사람이라고 볼수 없다.
    그런자를 불러 세상을 논하자는 이들은 무엇을 하는 자들인지
    정말 미친자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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