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여, 철새여, 너만은 알리라!

[김하돈 시인의 경부운하 不可紀行](3) 이 강산 아직 죽지 않았으니③삼차하(三叉河)

겨울 구포 강가,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엔다. 그 바람 속에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한참을 강을 따라 걸었다. 그래, 세상의 모든 것들은 찰나도 멈추지 못하여 흐르고 흐르나니 그도 나도 매한가지 태어나 흘러가는 유수 인생 아니던가. 무에 다를 것 있으랴. 털털거리는 버스 안에서 눈 마주친 시골 아낙의 깊은 잔주름이거나, 변두리 재래시장 돼지국밥집에서 어깨 스치던 사내의 쓸쓸한 뒷모습이거나, 지금은 이미 잊어버린 아련한 기억 속의 눈빛들도 모두 하나같이 저 강물을 닮았다.

  낙동강 하구 구포대교. 강 건너 아파트 뒤편의 산줄기가 낙동강의 동쪽울타리인 낙동정맥이다./김하돈 시인

강 언덕에 서면 그렇게, 그네 삶의 우여곡절도 내 안의 슬픔도 잔잔히 부서지는 은빛 물결에 실려 남실거릴 뿐, 참 바이없다. 그 탓에 또 흘러가는 것이다. 흘러 바다에 이르렀으므로 어느 따사로운 오후 햇살에 실려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음 어느 봄날 아득한 산마루에 내리는 빗방울로 돌아오리라. 그렇게 샘이 되고 여울이 되고 강이 되어 저 낙동강 수없이 오르내린 것이 어언 몇 백 번이었을까? 우리 지난날 수많았던 생애의 구비마다, 한 삶으로 매듭지은 숱한 행차의 날들마다 더러 몸살 같은 속울음 삼키며 강가로 내달리곤 하던 것이, 다만 우리도 그와 같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장강이 세 갈래로 바다에 드니

낙동강은 태백 황지 연못에서 걸음을 떼어 봉화, 안동, 상주, 대구, 고령, 양산을 두루 거쳐 부산에 닿는다. 그 물길의 서쪽 울타리는 백두대간의 함백산에서 지리산까지이고, 동쪽 울타리는 백두대간 함백산 어름에서 갈라져 울진의 답운치와 통고산, 청송 주왕산, 울산 가지산, 양산 천성산, 부산 금정산을 거쳐 다대포 몰운대에서 바다에 잠기는 낙동정맥이다. 남쪽 울타리인 낙남정맥은, 지리산 영신봉에서 갈라져 진주 천금산, 고성 무량산, 창원 불모산을 거친 다음 김해의 분성산까지 이어진다. 함백산에서 지리산으로 뻗어가는 백두대간에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비롯하여 속리산, 황악산, 덕유산, 백운산 같은 명산들이 숱한 골짜기마다 낙동강 여울을 발원시킨다.

  1932년에 건설된 옛 구포다리. 지난 2003년 태풍 매미를 견디지 못하고 다리 일부가 붕괴되어 결국 철거되고 있다. 완공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였으며, 공사에 동원된 인원 7,760명, 공사비는 70만원이었다./김하돈 시인

그 쟁쟁한 산들의 골짜기마다 재잘거리며 출발한 작은 여울이 불고 불어 종당에 한 곳으로 모이는 곳이 바로 부산의 구포 강변이다. 낙동강은 구포에 이르러 바다에 들기 전에 크게 갈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수 만년 동안 낙동강이 실어 온 흙모래가 쌓여 여기저기 수많은 삼각주(델타, delta)를 이루고 섬 '하중도, 河中島'을 만들었다. 지금의 김해 땅도 거슬러 오르고 오르면 끝내 바다였으리라. 낙동강의 퇴사가 쌓여 육지가 생기면서 비옥한 김해평야를 이루고, 그 사이로 낙동강은 마치 미로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바다로 들어갔다. 이를 두고 옛 사람이 말하기를 삼분수(三分水), 삼차수(三叉水), 삼차강(三叉江), 삼차하(三叉河)라 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말할 것도 없고, 『대동운부군옥』이나 『증보문헌비고』 같은 조선시대 후기 문헌까지 빼먹지 않고 이 삼차하를 들먹인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동쪽 강에 물이 많으면 전라도가 가물고, 서쪽 강에 물이 많으면 경상도가 가물고, 두 강이 공평하면 두 고을에 다 가뭄이 들지 않는다’는 재미난 물 점(占)의 풍습을 덧붙였다. 고산자 김정호가 젊은 시절에 만든 『청구도』(靑邱圖, 1834년)에는 덕도, 대저도, 녹도, 취도, 명지도 같은 섬들이 지금의 구포 앞에서 을숙도 부근까지 차례로 실려 있다. 그로부터 28년 뒤에 간행되는 『대동여지도』(1861년)에는 칠점도(대저도)와 명지도로 단순하게 뭉뚱그려 표기되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도 여전히 낙동강 하구에 섬으로 떠 있는 부산광역시 강서구이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낙동강 물줄기. 파란 선이 본류이고 녹색선이 지류이다. 태백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가는 백두대간(낙동강 서쪽울타리)과 태백산에서 동쪽으로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낙동정맥(동쪽울타리), 그리고 지리산에서 김해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남쪽울타리)이 선명하다. 또한 낙동강하구 ‘삼차하’의 칠점과 명지 두 섬이 표기되었다./김하돈 시인

그 28년 사이에도 삼각주는 끊임없이 발달하였을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두 섬 칠점과 명지가 차츰 지금의 모습을 갖추면서 낙동강은 섬을 사이에 두고 크게 양쪽으로 갈라져 바다로 들어갔다. 칠점과 명지 사이에도 강물이 흘렀으니, 『대동운부군옥』의 기록처럼 강이 마치 내 천(川)의 꼴을 갖춘 게 제법 역력했으리라. 그 가운데 구포에서 김해 남단 서쪽 편으로 흐르던 물길이 낙동강의 가장 큰 본류였다. 낙동강 본류의 물길을 지금처럼 바꾼 것은 일제였다. 구포 건너편 김해시 대동면에 대동수문을 막고 하구 끝에는 녹산수문을 막아 서쪽으로 흐르던 본류의 아래위를 차단해 버린 것이다. 합방 직후부터 비옥한 김해 삼각주를 농지로 바꾸기 시작한 일제는 낙동강 본류를 호수로 막아 가둠으로써 본격적으로 김해평야 개간에 열을 올렸다. 물론 전쟁을 위해서였다.

본류를 잃은 낙동강은 지금처럼 동쪽으로만 흐르는 일차강(一叉江)이 되었다. 수문에 막힌 낙동강 본류 주변의 삼각주는 하나씩 농토로 변하고, 대저도엔 일본군 해군비행장 활주로 공사를 시작하면서 칠점산이 사라져갔다. 한국전쟁 때 미군비행장을 확장하면서 나머지 칠점산이 사라지고, 훗날 해운대 수영비행장이 이곳으로 옮겨와 김해공항으로 탈바꿈하면서 대동여지도의 칠점산은 이제 겨우 그 이름만 남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비옥한 삼각주의 여러 갈래 물길을 잃은 외줄기 낙동강은 변함없이 흙모래를 실어다가 이번에는 저 아름다운 새들의 섬 을숙도를 만들었다. 적어도 지금부터 20여 년 전, 부산 시민들의 식수인 양산 물금취수장에 바닷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그나마 마지막 하나 남은 낙동강 하구를 아예 틀어막기 전까지는.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고

구포에 올 때마다 빼먹지 않고 찾아가는 ‘재첩국밥집’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언제쯤이었을까? 강변에 나가 모래를 한 줌 집어 올리면 ‘모래 반, 재첩 반’이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고 했다. 그 강에서 참게며 재첩이 사라진 건 이미 까마득한 일인데도 구포 강변 재첩국밥집은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였다. 어디서 오는 줄도 모르는 재첩일망정 아직도 그 국밥을 사먹는 늙수그레한 노인들의 속내에는 필시 ‘모래 반, 재첩 반’이던 낙동강의 추억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다. 본 적은 없지만,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그리움으로 재첩국밥 한 그릇을 단숨에 비우고 다시 강으로 간다.

구포 강변에는 그새 다리가 많이 놓였다. 1932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다리로 등장했던 낙동장교(洛東長橋, 구포다리)는 새로 놓인 철교와 구포대교에 묻혀 여간해서 잘 눈에 띄지도 않고, 구포대교에서 한 마장쯤 되는 아래위로는 엄청난 규모의 고속도로 다리가 나란히 놓여 상전벽해의 세월을 넘나들고 있었다. 문득 옛 구포다리가 보고 싶어 강서구청을 돌아 강변 둔치로 내려갔다. 아뿔싸, 구포다리는 ‘철거 중’이었다. 구포다리보다 2년 뒤에 태어난 영도다리 역시 철거문제로 입씨름을 벌이다 겨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은 터라, 지난 78년 동안 이 나라의 영욕을 온몸으로 짊어졌던 구포다리의 마지막 모습은 헛헛함에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몇 년 전 영남지방을 강타했던 태풍 ‘매미’를 견디지 못하고 일부가 무너져 내렸는데, 이후 철거와 보존에 대한 갈등을 겪다가 결국 철거 쪽으로 가닥이 잡힌 모양이다. 복원이 어렵다면 남아있는 일부라도 보존하는 방법은 없었을까.

구포대교 아래 겨울햇살이 은빛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강 건너 아파트 숲 너머로는 먼 길을 달려온 낙동정맥 연봉들이 몰운대 바다를 향해 숨 가쁘게 달린다. 남해고속도로가 낙동강을 건너오는 야트막한 동산에는 ‘구포왜성’이 있고, 그길로 낙동정맥을 관통하는 만덕터널을 빠져나가면 바투 동래성이다. 417년 전, 그곳에서는 정녕 조선의 사내다운 사내가 조국을 위해 흔쾌히 목숨을 바쳤다.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포위되고 다른 진영에선 도와줄 기척이 없습니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겁고 부모와 자식의 정은 가볍습니다.” 죽기 전에 그가 아비에게 남겼다는 글이다.

  낙동강의 동쪽 울타리인 낙동정맥이 바다로 들어가는 몰운대(沒雲臺). 태백 함백산 부근 매봉산에서 백두대간과 갈라져 동해안을 타고 흘러와 이곳에서 산맥을 마감한다./김하돈 시인

조선의 최전선 군영이었던 부산진과 다대포의 첨절제사 정발(鄭撥)과 윤흥신(尹興信)을 차례로 죽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 선봉대는 동래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와 해안선을 유린하고 동래성을 포위했음에도 이들을 막아야 할 경상좌병영이나 경상좌수영의 장수들은 연락이 끊겼고, 정작 문신이었던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은 성안의 군병과 백성만으로 적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육군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392호 「동래성 순절도」에는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활과 창으로 대군과 맞서는 몇몇의 병사들, 지붕 위에서 기와를 던지며 저항하는 백성들, 대궐에서 입는 붉은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최후를 기다리는 동래부사.

끊어진 구포다리 아래서 나는 문득 그를 생각했다. 싸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으되, 누구보다 싸울 줄 알았던 사람. 그의 죽음과, 그와 함께 죽은 많은 사람들이 목숨과 바꾸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강도에게 짓밟힌 나라 산천을 구하고자’ 피 흘린 숱한 조상들의 역사 앞에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야 옳은가. 그가 사랑했던 여인 ‘섬이’는 어찌되었을까? 민망하게도 나는 또 그녀를 떠올린다. 아마도 현해탄을 건너는 배에 실려 낯선 적국의 땅에서 길고 모진 목숨을 연명했을 것이다. 의로운 싸움은 짧았고, 굴욕의 시간은 길었을 것이다.

고인 강물은 저리 썩는 것을

낙동강하구언으로 가는 길은 강변 양쪽에 시원스레 뚫려 차량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도심의 강변 풍경이 으레 그렇듯 공간만 있으면 두 겹, 세 겹으로 찻길이 뚫린다. 그래도 아침저녁으로는 차들이 밀리고, 답답한 도시인들은 길을 더 내놓으라고 빵빵거린다. 그러면서 정작, 그나 나나 흐르는 바 되어 더불어 흘러야 할 강물이 길섶 아래 걸음을 멈추고 옴짝달싹 못한 채 썩어가고 있는 것을 모른 체한다. 지금처럼 오직 한곳으로만 사람들이 모여드는 한 이 땅의 길들은 영원히 부족하고, 그 좁은 틈바구니에서 사람 아닌 것들은 모두 사라지리라.

차 세울 틈 하나 없는 길을 달리다 겨우 위험스레 차를 세우고 내려가 본 낙동강은 이미 빈사상태였다. 지난 수 만년 동안 경상도 일원의 물길을 모아 바다로 흐르면서 비옥한 삼각주를 이루고, 갈대숲에 새들과 참게와 고라니를 품어 기르던 낙동강 하구는 이제 하구언에 막힌 썩어버린 담수호로 변했다. 강의 하구란 본시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깊숙이 밀고 당기면서 독특한 생태계를 연출하는 신비로운 공간이다. 새들도 죽을 때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고, 사람도 임종의 순간에 그중 속 깊은 말씀을 남기듯, 천리 길을 달려온 장강이 바다와 살을 섞으며 주고받는 그 대단원의 경계가 어찌 예사로울 수 있겠는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그렇듯, 자연에도 생애가 있다. 숲의 일생이 있고 강물의 일생이 있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맨 처음 여린 ‘한두해살이풀’이나 ‘여러해살이풀’이 자라는 시기를 거쳐 키 작은 나무가 자란 뒤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자기를 공격하는 활엽수를 막기 위해 소나무는 필사적으로 솔잎을 떨어뜨리고, 긴 싸움 끝에 마침내 소나무를 물리치고 활엽수가 점령한 숲을 우리는 ‘극상림’이라 부른다. 사람이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숲은 올곧게 제 일생을 살아갈 줄 안다. 강도 마찬가지이다. 발원지 샘에서 출발하여 유년, 소년, 청년, 중년, 장년, 노년의 길을 스스로 잘도 흘러간다. 사람에게도 그 나이마다 가려야 할 것과 힘써야 할 것이 있듯, 강에게도 그 시기에 따라 해선 안 될 일이 있고 애써 북돋아야 할 일이 있다.

낙동강에 하구언을 막은 것은 1987년이었다. 그 목적은 부산시민의 식수인 물금취수장과 김해평야에 스며드는 바닷물을 막고, 인근 산업단지에 용수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환경단체와 학계의 반대쯤은 아랑곳하지도 않던 5공화국 시절의 이야기다. 게다가 공사를 하면서 파낸 흙으로 내친 김에 부근의 갈대밭과 습지를 모두 메워 버렸다. 재첩이 사라지고 게와 숭어가 사라졌다. 아니, 그 모든 낙동강의 토종들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사람들도 더 이상 강을 찾지 않았다. 강은 홀로 썩어갔다.

  지난 1987년, 부산시민들의 식수인 물금취수장과 김해평야에 유입되는 바닷물을 막고 인근 공단의 용수공급을 목적으로 건설된 낙동강하구언. 낙동강을 막음으로써 하구의 모든 생태계가 파괴되었으며 심각한 오염을 피할 수 없었다./김하돈 시인

  암갈색으로 썩어버린 낙동강하구언 위쪽의 물과 달리 하구언 아래 바다는 여전히 쪽빛 물결이다. 취수장이나 평야지대의 염해는 다른 방법을 찾더라도 강의 하구만큼은 자연 소통을 시켜야 한다./김하돈 시인

공손히 묻는다. 하구언을 다시 열지 않고 이 물을 살릴 방도가 있겠는가? 부산에 머무는 사흘 동안 만난 부산 시민들의 눈망울에는 한결같이 ‘물’에 대한 지긋지긋한 체념이 깊게 배어 있었다. 어차피 자기는 그 물을 먹지 않으니 상관없는 일이고, 굳이 먹는 물 아니라도 낙동강이야 이미 포기한지 오래이니 경부운하도 하든지 말든지 별 관심이 없었다. 강을, 어머니를 잃은 사람들의 절망은 깊었다. 다시 물어본다. 꼭 운하를 하려거든, 그리하여 한강과 낙동강을 통째로 숱한 갑문에 막힌 호수로 바꾸어 오히려 수질이 나아질 수 있다고 아직도 믿고 계시거든, 부디 그 기술로 이 물부터 살려내라. 경부운하에 비하면 그저 산골 연못에 불과한 갑문에 막혀 썩어버린 이 물부터 살려내 보라.

철새는 날아가고

하구언을 막기 전까지는 장쾌한 낙동강이 실어온 흙모래에 의해 날마다 자라는 섬이었던 을숙도는 이제 더 자라지 않는다. 부산을 아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철새들의 군무와 갈대밭 습지의 섬. 그 을숙도에 다시 가서 맨 먼저 느낀 슬픔은, 이제 그 누구에게도 선뜻 그곳에 가볼 것을 권할 자신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슬픈 일은, 하구언 위쪽 갑문에 막힌 낙동강의 썩은 물빛과 하구언 아래 바다의 맑은 물빛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잠시 기쁜 일도 있었다. 지난 해 새로 문을 연 ‘낙동강하구에코센터’가 그랬다. 고만고만한 어린 유치원생들이 강의 하구며 갯벌 습지에 대하여 배우고, 유리창 너머로 그래도 아직은 희망을 다 버릴 수 없는 아름다운 갈대숲과 철새들을 관찰하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에코센터로만 본다면 어느 선진국의 그것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어쩌랴! 을숙도가 더 이상 그들이 배운 갯벌 습지가 아니며, 그들이 이리저리 스코프를 돌려가며 찾으려 애쓰는 철새들의 삶터가 되지 못하는 것을. 너무도 근사한 외양간은 반가웠으나, 이미 소를 잃었으니 그것이 세 번째로 슬펐다.

  지난 해 ‘낙동강하구에코센터’가 문을 열어 강 하구 습지의 소중함과 자연 생태계의 가치에 대한 훌륭한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에코센터 유리창 너머로 고니를 비롯한 야생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을숙도 남단의 철새탐조대. 에코센터에 예약을 하면 자원봉사자들이 탐조 안내를 해 준다./김하돈 시인

낙동강하류 철새도래지가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된 것은 40년 전이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하구둑 건설과 매립 공사, 폐수, 인분, 가정하수에 의한 수질 오염, 농지 개간으로 인한 환경 파괴로 인해 철새들의 종류와 철새 집단의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고 버젓이 적어놓았다. 대체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는가! 하기야, 국보 1호가 수도 한복판에서 다 타 주저앉아도 속수무책인 나라에서 이 아득한 변방의 시답잖은 문화재까지 돌볼 겨를은 없었으리라. 더욱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불과 10년 전쯤에 부산광역시가 그곳을 무려 3년 7개월이나 쓰레기매립장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재작년, 그 매립지 배수로에는 수천마리의 게들이 주검으로 떠올랐다.

에코센터를 나와 그래도 아직 조금은 남아있다는 철새들을 보기 위해 을숙도 남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차마 볼 면목이 없을 터이지만, 어찌 되었든 가해자가 피해자를 찾아가 잘못을 비는 게 도리이니 아니 갈 수도 없었다. 에코센터에서 을숙도 남단까지 가는 길은 뜻밖에도 번듯한 2차선 포장도로였다. 아마도 예전에 쓰레기매립장을 드나들던 길이거나, 을숙도 남단을 가로지르는 명지대교 공사차량이 드나드는 길인 모양이다. 많은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연기념물 철새도래지를 관통하는 그 명지대교는 이미 다릿발을 세워 올렸다. 찬바람 속에 30분 남짓 아스팔트길을 걸으면서 기어코 참았던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명색이 천연기념물 보호구역 안에서 그 문화재를 보러가는 사람이 차량을 통제한다고 불만이 있을 리는 만무다. 그러나 ‘문화재보호구역’이라는 푯말 아래 일반차량을 통제하고 더구나 그 안에서의 정숙을 요구하는 마당에, 정작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는 차량을 위해서는 포장도로를 내주다니. 백번 양보하여 그게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철새를 찾는 시민들을 위한 작은 오솔길 하나 정도의 배려는 있어야 옳았다.

가라, 슬픈 나라의 문화재여!

백주대낮에 국가가 버젓이 강도짓을 한다. 대대손손 살아온 땅을 돈 몇 푼 손에 쥐어주고 앗아가 버린다. 때로는 시세에 곱절을 쳐주기도 하고, 끝까지 버티며 골치를 썩이면 몇 곱을 얹어주기도 한다. 그렇게 앗아간 땅에 중장비를 들여 대충 토목공사를 마치면 땅값은 열 배로 뛴다. 다시 건물이 들어서면 또 열 배가 오른다. 거기 살던 그 땅의 주인들은 가진 돈푼을 다 털어도 결국 다시 그 땅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 날강도 같은 세상에 대한 분노의 불길을 대신 맞고, 애꿎은 숭례문이 제 몸을 살랐다.

결 고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마지막 무기는 결국 자기 목숨뿐이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적을 막을 유일한 무기가 바로 자신의 목숨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사내였다. 을숙도 철새들도, 갈대숲도, 농게와 칠게, 숭어와 실뱀장어도 이 휘황찬란한 문명의 불빛 아래 허연 배를 뒤집어 거품을 물고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자신들의 주검만이 가장 강력한 최후의 무기임을 잘 알고 있다. 송상현의 주검 앞에 머리를 숙인 왜장이 그랬듯, 때로는 죽는 자보다 죽이는 자가 더 두려워 짐짓 소름이 돋는 법이다. 먹고 사는 경제문제가 지금보다 백배쯤 더 좋아진다 해도, 먹이를 독차지하려는 인간집단의 욕망은 결코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하구언 아래 맑은 바다에서는 아직도 실뱀장어 어업이 한창이다.

600마리 정도 남았다고 했다. 하구언이 막히고 을숙도가 쓰레기매립장으로 전락하는 동안 그 갯벌 습지에 깃들여 사는 목숨들은 가뭇없이 줄어들었다. 최근에는 부산 신항만과 명지대교 공사가 시작되면서 해안 갯벌에 심각한 변화가 일어났다. 물길이 바뀌고 갯벌이 차올랐다. 덕분에 을숙도 철새를 대표하는 고니들의 먹이인 염생식물 세모고랭이 서식지가 사라져버렸다. 먹이를 잃은 고니들에게 매일 고구마를 썰어다 던져주는 부산시민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올 겨울 을숙도를 찾았던 수천 마리의 철새 가운데 남은 것은 겨우 600마리뿐이다. 유독 파장에 예민한 철새들이 인근 공사현장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부산신항만 공사와 명지대교 공사가 진행되면서 철새들의 서식지가 파괴되기 시작했다. 고니의 먹이인 세모고랭이가 사라진 탓에 부산 시민단체에서 날마다 고구마를 썰어 먹이로 주고 있다./김하돈 시인

저 아득한 세상의 끝으로부터 날아와 겨울 낙동강 하구 갈대숲을 온통 장엄 군무로 물들이던 을숙도 철새들의 전설이 이렇게 속절없이 막을 내리는가. 그래, 가라. 이 천박하고 무책임한 나라의 허울뿐인 문화재들이여! 기념물들이여! 너희들의 죽음을 기념하고 또 우리는 축배를 들 것이다. 완공의 축포를 터뜨리고 만세삼창을 외칠 것이다. 그래, 가라. 부디 저 하늘 넘어 늠름한 ‘조나단 시걸’을 따라 그깟 먹이 따위에는 목매지 않아도 되는 먼 나라로 가라. 가서 결코 다시 오지 않는 아나함과(阿那含果)처럼, 절대 비극의 연인처럼 다시는 오지 마라! 부디 이 땅에는 오지 마라!

   ‘낙동강하구 철새도래지’는 지난 1966년에 이미 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한때 쓰레기매입장으로 사용되는 등 급격한 파괴로 이루어졌다. 을숙도 갈대숲을 관통하는 명지대교 공사가 한창이다./김하돈 시인

  낙동강하구언이 막히고 온갖 개발에 시달린 을숙도의 하구 습지는 이제 대부분 그 기능을 잃었다. 수천 마리의 철새들이 노닐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하구 생물이 서식하던 을숙도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김하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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