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날리네”

연정의 바보같은 사랑(26)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슴이 벅차다가 먹먹해진다. 그러다가 아려오다가 다시 벅차오르기를 반복했다. 머리 속에서 멜로 영화의 메인 스틸 컷 같은 한 장면이 떠나지 않았다.
지난 4월 12~13일, 충북 영동 마음수련원으로 조합원 수련회를 갔다. 조합원들에게는 투쟁 중 마지막 수련회였고, 나도 이 사실을 떠나기 전부터 어렴풋이 직감하고 있었다. 어디 머나먼 곳으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라도 하는 듯, 구미의 한국합섬 HK지회 동지들과 코오롱정투위 동지들이 와서 극진하게 대접을 해주었다.

아침을 먹고 한합.코오롱 동지들과 함께 김천 직지공원에 갔다. 공원 안에서 미끄럼틀과 시이소를 타고, 뻥튀기도 먹고, 사진도 찍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공원 밖으로 나오는데, 기륭 동지들이 꽃이 흐드러지게 핀 벚나무 아래로 달려간다. 한 두 동지가 손으로 나뭇가지를 흔들고는 재빨리 포즈를 잡으면서 벚꽃 눈을 맞는 장면을 연출한다. 한합 HK지회 박성호 동지가 기꺼이 나뭇가지를 흔들고 사라지는 조연을 맡아준다. 그런데 주인을 닮아 눈치도 주책도 없는 나의 카메라가 여러 번 타이밍을 놓쳤던 모양이다. 나중에 보니 나뭇가지를 흔드는 장면과 이미 꽃이 다 떨어져 버려 다소 머쓱한 장면도 몇 장 있다.
행복해 보이는 저 얼굴들 위로, 간밤에 구미 동지들이 정성스레 구워준 고기를 배불리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 노래를 불렀던 저 싱그러운 입술들 위로 날리는 저 꽃잎들.

꽃그늘 아래 맑은 웃음들 모두 어디로 갔나.
꽃 보다 아름다운 얼굴들 모두 어디로 갔나.


“꽃잎 날리네 햇살 속으로 한세상 지네 슬픔 날리네
눈부신 날들 가네 잠시 머물다 가네
꽃그늘 아래 맑은 웃음들 모두 어디로 갔나
바람 손 잡고 꽃잎 날리네 오지 못할 날들이 가네
바람 길 따라 꽃잎 날리네 눈부신 슬픔들이 지네”

이 벚꽃이 질 때쯤, 천일 투쟁이 시작되었다. 2차례의 고공농성과 단식농성도 진행되었다. 하지만, 새벽 내내 기륭투쟁에 대한 나의 기억은 2008년 4월 13일, 벚꽃 날리던 그 순간에 멈춰있었다.


사흘이면 끝날 줄 알았던 투쟁이 기약 없는 투쟁 전망 없는 투쟁이 되어 버렸을 때, 세상에 우리만 있는 것처럼 외로울 때, 수백일 함께 해온 동지들이 떠나갈 때, 떠나는 동지를 붙잡을 수도 같이 떠날 수도 없었을 때,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다고 느껴질 때, 기륭 동지들은 ‘수련회’를 갔다. 자연을 만나러 갔다.
본래 자연을 보거나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돌아다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기록’을 한다는 이유로 기륭 동지들이 가는 곳이면 집회든, 산이든, 바다이든 거의 ‘스토커’처럼 따라 다녔다.

인간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때
나는 숲을 찾는다
숲에 가서
나무와 풀잎의 말을 듣는다
- 정희성, 숲속에 서서 -

힘들었던 시간도 다 같이 모여 고기 한 번 구워먹고, 밤새도록 술 잔 기울이며 깔깔 웃고, 바다 가에서 숲에서 꽃밭에서 온갖 폼 잡고 사진 몇 장 찍어버리면 견딜 수 있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던 시간도 민박집이 떠나가라 밥상이 부서져라 젓가락 장단에 맞춰 <포장마차> 몇 번 부르고, 어깨를 걸고 <만남>을 부르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부르고나면 또 다시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들이 이 동지들을 만난 지 1000일 하고도 80일이 훌쩍 넘은 지금에 와서 이리도 사무치게 그립고 아플지 몰랐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1080일을 기륭동지들이 거리에서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용역 깡패들과 경찰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투쟁해 왔다는 것도,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50리를 걸었던 것도, 축축한 아스팔트에 까닭모를 절을 했던 것도, 저 높은 철탑에 올라갔던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이고, 꿈이어야 한다. 두 동지가 60일 동안 뼈 속까지 타들어가는 단식을 하고, 이를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 속이 타들어가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다.

“한 나절 이렇게 웃고 울다 고개를 들면 그 날 그 눈부신 꽃잎이 날리고 있을 거야.”

“언제였던가 꽃피던 날이 한 나절 웃다 고개 들어보니
눈부신 꽃잎 날려 잠시 빛나다 지네
꽃 보다 아름다운 얼굴들 모두 어디로 갔나
바람 손 잡고 꽃잎 날리네 오지 못할 날들이 가네
바람 길 따라 꽃잎 날리네 눈부신 슬픔들이 지네“
- 벚꽃지다, Malo(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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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농성 , 기륭전자 , 기륭분회 , 천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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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씨

    눈 오는 날
    한국통신비정규노동자들의 외침을 들을수 있었다.
    첫 눈은 투쟁의 고역마저 감상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첫눈은 살을에는 눈보라에 견뎌야 할줄 꿈에도 몰랐던 것 같다.
    이렇게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의 트럼펫은 목동을 울렸다.

    봄날 벚꽃아래서 벚꽃이 휘날리는 그 아래서
    지나온 투쟁은 어쩌면 한폭의 그림 일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벚꽃지고 발아래 잎이 밟히자...1000일은 어느듯 성큼 세월을 파 먹고 있었다.
    두려운 것이었다.

    어쩌면 모든것을 잃는 1000일라면 그 속에 절박함의 60일은 예정되어 있는지 모른다.

    한국통신비정규노동자들의 외침으로 부터
    기륭전자비정규노동자들의 외침은 이제 비정규노동자들의 삶에 새로운 정치투쟁의 서곡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본다.

    곡기를 끊은 동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감상적인 가리봉동의 블루스 보다
    가리봉동의 복합디지털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건설되고 새로운 IT가리봉동비정규노동자들로 기륭을 이을 것이다.

    가리봉동 블루스여
    너의 슬픔은 감상적인 벚꽃일수 없다.
    새로운 노동운동의 울산은 가리봉동에서 비정규노동자들의 성큼 내딛는 저항의 함성에서.....
    한국통신비정규노동자들이여/기륭비정규노동자들이여 이제 한 매듭을 짓자.

  • 시간

    아, 참좋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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