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家 맏며느리의 근검절약

[칼럼] 보수 언론은 명계춘씨를 찬사하지만

두산그룹의 창업자 박승직의 맏며느리 명계춘(95)씨가 엊그제 세상을 떠났다. 그녀 역시 서울에서 모시가게를 하던 명태순의 장녀로, 안팎 사돈이 모두 의류업을 했다. 2005년 ‘형제의 난’ 이후 두산가 6형제가 모처럼 모였다.

박승직은 1864년 경기도 광주에서 당시 세도가인 여흥 민씨의 땅을 부쳐 먹던 농민 박문회(朴文會)의 아들로 태어났다. 박승직은 난전에서 장사를 하다 1890년대 종로4가 배오개로 진출해 지금의 두산그룹의 기원이 되는 포목점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1905-1910년 사이 박승직 상점은 크게 성장해 면포의 판매망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당시 박승직의 창씨명은 미키쇼우쇼크(三木承稷)였다.

1917년 박승직 상점은 면포 판매에 판촉물로 <박가분>을 내놓는다. 박가분은 한국 관허 제1호 화장품으로 일제화장품보다 싸게 개당 50전에 팔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여기서 ‘관허’는 물론 조선총독부를 뜻한다. 박가분은 1926~1930년 사이에 불티나게 팔렸다. 박가분 때문에 박승직 포목점은 북촌상가에서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박가분은 화장의 부착력을 높이려고 넣었던 납 파동으로 1937년 생산을 중단한다. 1931년 18살에 시집온 맏며느리 명계춘씨는 당시 <박가분>의 직원들 뒷바라지까지 도맡았다고 한다.

  박가분은 한국 관허(당시 조선총독부) 제1호 화장품으로 일제화장품보다 싸게 개당 50전에 팔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구한말 조선 등 여러나라를 여행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는 명성황후를 만난 기록이 있다. “명성황후는 나이 사십을 넘은 약간 날씬해 보이는 체구에 우미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머리는 칠흑 같고 화장은 진주분을 상용해 그런지 늘 창백한 빛이 돌았다. 눈은 날카롭고 냉정하며 모습 전체에서 느껴지는 인상은 한마디로 기민한 성격의 소유자, 바로 그것이었다.” 비숍은 명성황후의 잦은 화장품 사용으로 인한 납 중독 피해까지 관찰했다.

박승직 상점은 1925년에 자본금 6만 원의 주식회사로 개편한다. 박승직은 1933년 일본 기업인 소화기린맥주(昭和麒麟麥酒)의 이사가 된다. 해방 후 박승직의 아들 박두병(朴斗秉)은 적산기업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을 맡아 두산그룹의 모태로 삼았다. 적산기업 소화기린맥주는 이후 동양맥주(OB)가 된다.

박승직은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그의 아들 박두병 두산그룹 초대회장은 조선은행에 근무하다가 1936년부터 박승직 상점의 상무로 경영에 참여했다. 박두병은 1944년 경성호단의 동대문지구 부단장을 맡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올 초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경제 부문과 친일단체 부문에 박승직을 선정했다.

언론은 그녀의 죽음 앞에 “달걀 껍데기에 남아있는 흰자위”(중앙일보 9월17일 24면)까지 모았다거나 “취사용 가스가 아까워 연탄불에 곰국이나 보리차를 끓였다”(조선일보 9월17일 28면)는 식의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 이 나라 서민들은 곰국은커녕 연탄 살 돈이 없어 절절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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