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퇴물, 혹은 퇴물의 아름다움

[배고프다! 영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토리노 Gran Torino, 2008>

부시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제법 큰 이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다. 오바마의 시대가 왔다는 것 역시 제법 큰 이슈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천동지의 희망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부시의 시대가 끝나고 오바마의 시대가 왔다는 것은 왠지 사건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미국 시민들이 단순히 부시의 시대에 염증을 냈을 뿐만 아니라, 오바마가 주도할 변화를 원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국의 오바마인가 오바마의 미국인가 라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겠지만, 그리고 미국의 이성이 원하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강한 미국인가라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형식적인 측면만을 본다면 오바마는 새로운 형태의 미국에 대한 표상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일지도 모르지만,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미국의 백인권력이 사라지려는 지평에 우리는 서 있을지도 모른다. 이 선거의 결과를 미국의 정치사에 기록될만한 큰 사건으로 본다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그랜토리노 Gran Torino, 2008>는 그럴싸한 시간에 도착해 이 변화를 관조하는 영화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법하다.


영화 <그랜토리노>는 약간 복잡한 영화다. 월트가 느끼는 세상에 대한 불만과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이 조금 복잡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불만은 젊은 세대에게서 희망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젊은 세대는 나약하고, 예의가 없으며, 세속적이고, 무능하다. 월트가 생각하는 남자다움에 근접한 남자도 없으려니와 그런 남자에 어울릴 멋진 여자도 없다. 남자답지 못한 남자애들이 거친 욕설과 무력을 이용해 약한 자들을 제압하려 하고 여자애들은 그런 남자를 좋다고 따라다니니, 그 꼴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두 번째 불만은 월트를 포위하고 있는 유색인종들이다.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자신의 집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이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의 내면에는 한국전쟁에서 저질렀던 범죄에 대한 월트의 죄의식이 숨어 있다. 마지막 불만은 월트의 가족이다. 가족답지 않은 가족, 월트의 재산 외에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는 자손들에게 월트는 환멸을 느낀다. 영화 <그랜토리노>는 월트가 이 불만들을 해결하는 과정에 대한 영화이며, 이 과정 속에서 현대 미국에 대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식, 혹은 현대 미국에서의 이스트우드의 포지셔닝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이스트우드는 유명한 공화당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설마?”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이스트우드는 공화당원이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한국의 보수 정치세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합리적이다. 어찌보면 이스트우드의 위치는 천민보수라기보다는 오히려 ‘양반 계급’에 더 어울린다. 이스트우드는 한국의 주류 보수세력이 가지지 못한 품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불만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천천히 확인된다.


첫 번째 불만에 대하여, 이스트우드는 자신의 완고함을 유지한다. 이스트우드가 ‘남자답다’고 여기는 덕성들은 이를테면 포기할 수 없는 덕성이다. 약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가족을 지켜야 한다. 밥벌이는 스스로 하고 이웃에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스트우드의 판단 속에 여전히 남자의 역할은 있다. 대부분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미련하지만 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속에서 남자의 역할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남자들이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남성으로서의 덕과 오해하고 있다. 이스트우드는 이웃의 타오에게 남자다움을 가르친다. 이 대목은 보수주의라기보다는 일종의 전통주의에 속하는 대목이다. 두 번째 불만에 대하여, 이스트우드는 스스로의 생각을 수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참회의 과정이기도 하다. 유색인종들은 알고 봤더니 나름의 합리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에 감사할 줄 알고 그 마음을 전달할 줄 안다. 백인들의 사제 못지않게 유색인종들의 샤먼도 현명하며 통찰력이 있다. 세 번째 불만에 대하여 이스트우드는 가족을 사랑하지만, 가족의 범위는 단순한 혈족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느새 그의 삶에 들어온 타오의 가족도 이스트우드의 가족이다. 그랜토리노는 결국 타오에게 계승된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대단히 상식적이다. 전통 중에도 존중할만한 것들은 존중하고 스스로 바꿀 것은 바꾸고 자신의 생각을 보편적 관점에 비추어 그 지평을 확대해가는 것 말이다. 비록 이스트우드의 남녀관이나 국가주의 혹은 다른 비전들이 ‘정의’롭지 않다고 하더라도 영화 속에서 이스트우드가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하나의 유의미한 준거점이 된다. 월트는 곧 미국일 수도 있고, 미국의 보수층일 수도 있다. 그 둘은 전 세계에서 “건드리면 안 될 존재”로 군림해왔다. 그러나 앞서 오바마에서의 변화가 보여주듯, 이제 그들은 자신의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시대에 뒤늦게 합류했다.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나 불만은 없지만, 그리고 미국의 보수층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들이 쫓겨나듯 갑자기 사라지지 않고 혹은 지키려고 추해지지 않고 자신들이 다음 세상에 꼭 전해주고 싶은 가치어린 것들을 잘 정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겨야 할 것은 자신들의 천년왕국이 아니라 천년왕국이 가능하도록 기능했던 보편적으로 선한 가치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꼭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겉으로는 상당히 단단해 보인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비가역적인 단계까지 왔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은 건국한 지 겨우 60년 된 나라이고,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군부’에서 민간에 이양된 지 20년도 되지 않은 나라다. 역사라는 긴 시간을 돌이켜본다면 한국은 그다지 안정된 나라가 아니다. 특히나 요즘의 정국을 본다면 한국의 민주주의가 비가역적인 단계에 왔다고 확언하기에 힘들다. 적지 않은 부문에서 정치적 사회적 퇴행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독재를 강요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해줬으면 하는 ‘선진화’의 걸림돌들이 적지 않게 있다.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의 발목을 잡는 돌부리가 되지 말고 새로운 시대가 딛고 올라설 수 있는 주춧돌이 되도록 스스로를 가다듬어 준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론이 영화 <그랜토리노> 속에 있다. 우선 월트가 그랬던 것처럼 50년간 조금씩 모아온 소중한 도구들을 잘 정리해서 다음 세대가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월트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과거의 영웅주의에 젖어 행동하는 것이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도 잘 숙지해둘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자기 응시가 필요하다.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불만을 불안과 구별할 수 있는 응시 말이다. 아주 자주 우리는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감이 급격히 사라질 때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사회에 대한 엉뚱한 불만과 걱정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내면이 공허할수록 그 답을 외부에서 찾게 된다. 한국의 보수권력을 규정하는 것은 불안인가, 불만인가. 자기 응시가 필요하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이야기다. 이스트우드는 영화 <체인질링>에서 ‘회개’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이미 던진 바 있다. 영화 <밀양>의 한 대목을 보는 것 같았던 부분 말이다. 도대체 누가 저 죄인을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가, 혹은 신이, 혹은 신의 대리인이? 이스트우드는 <그랜토리노>에서 매우 분명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신에게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고, 피해자에게 직접 용서를 구해야 할 문제가 있으며, 자기 자신이 끝까지 지고 가야할 숙제도 있다. <그랜토리노>의 타오는 <친절한 금자씨>의 제니에 해당한다. 월트는 타오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 월트가 타오 앞에서 고백하는 순간, 월트와 타오 사이에 존재하는 쇠그물망은, 고해성사 때에 월트와 사제 사이에 존재하던 쇠그물망과 동일한 것이다. 타오에겐 월트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 다만 타오는 월트가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체험한, 일종의 증인인 셈이다. 타오 앞에서의 고백 후 월트가 선택하는 것은 일종의 ‘순교’다. 이 순교는 십자가의 예수 같은 자세로 월트가 누워있던 탓에 종교적인 뉘앙스가 과잉으로 덧입혀지기도 했거니와, 그 맥락적 흐름은 결자해지다. 월트가 어린 소년병을 쏘고 훈장을 받았던 순간부터 이미 결정된 결말인 것이다. 어쩌면 근본적인 수준의 결자해지는 신에게나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풀지 못한 매듭을 남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다음 사람에게 이어진다. 이것이 인간적이다. 그러나 꼬장꼬장했던 월트는 현실 세계의 복잡성과 자신의 내면에 남아 있는 복잡한 응어리를 풀기 위해 인간의 길을 포기하고 만다. 이것은 분명 과잉된 설정이다. 그리고 이 과잉은 이스트우드의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이스트우드가 자신이 출연하는 마지막 영화에 새겨 넣은 이스트우드-다움이다. 수많은 영화에서 수많은 악당들을 처치했던 이스트우드의 기억들과 상념이 뭉친 덩어리 말이다. (이 영화에서 영화 속 월트와 영화 밖의 이스트우드를 구별하는 것은 대단히 복잡한 작업이면서 꼭 필요한 작업이다.) 그리고 이 문제, 즉 회개/용서의 문제와 이에 조응하는 현실의 복잡성 문제는 계속해서 이스트우드의 작업 속에서 그 성찰의 발전을 확인하고 싶은 대목이다.


영화적으로 볼 때, 좋은 어른이 셋 있다. 기타노 다케시, 주성치,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주성치는 <장강8호>에서 자기 영화의 의미를 외계에서 온 인형에 투사한 바 있다. 그의 영화는 시험에서 백점을 맞게 하거나 체육시간에 영웅이 되게 하는 화려한 맛은 없지만, 정말이지 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소중한 회복력을 가지고 있다. 세계를 회복시키며 주성치는 늙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 어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추악한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세상은 세상이고, 웃을 수 있는 포인트는 어디에나 있다. 다만 그 포인트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외로울 때면 그를 따라서 바다에 가라.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완고한 어른이다. 우리에게 전통적 가치를 이렇게 설득적이고 세련되게 애정을 담아서 전해줄 어른은 이제 많지 않다. 그러니 <그랜토리노>의 엔딩크레딧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타오의 차 그랜토리노가 지나간 도로에서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모두 올라가도록 이스트우드는 노래를 부르고 강물은 쉼 없이 흐른다. 영화 가득 담겼던 이스트우드의 목에 찬 숨소리가, 언제고 그리울 것이다.


by(e) G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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