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이수호의 잠행詩간](9)

아카시아꽃 향기는 치명적이다
아카시아 줄기에 가시가 돋은 이유이다
달 밝은 밤 가볍게 봄바람 불 때
그 일렁이는 달콤한 향기는
칠흑 어둠이라도 안고 싶은 유혹이다
내 어릴 적, 배가 고파 아카시아꽃 주루룩 훑어
한 입 입에 넣고 넘던 보릿고개
청보리 시퍼렇게 흔들리던
허기를 달래던 언덕길을
오늘 너의 손을 잡고 넘는다
선봉령 고갯길 응달에는 아직도 눈이 남아
자작나무 하얗게 눈 속에 푸르고
고마나루 옛 성터 오르는 길
굽이굽이 흑비단 강물 속으로 들고
지리산 자락 어디쯤 바위틈에서
야생 찻잎을 따며 슬픈 노래 부르는 밤
꽃잎, 먹어도 먹어도 가시지 않는 허기
아, 어쩌다 오늘이 보름이어서
흐르는 구름 틈틈이 달빛 출렁일 때마다
지독한 향기 더 지독한 유혹 넘쳐흐르고
이런 날 너를 안고 네 속으로 들어
내 허기를 숨길 수 있다면
내 이 밤 아카시아꽃보다 더 달콤한
저 하얀 절망과 입 맞추리

* 그날 우리는 대전 대덕 대한통운 앞에서, 21세기 보릿고개를 넘다가, 하얗고 달콤한 꽃을 단 아카시아 나무에 목을 매고 죽은, 어느 특수고용노동자를 추모하는 집회에 참석했었다. 오늘은 택배노동자를 포함한 화물노조(연대)의 허기진 총파업이 실시된다.
최신기사
기획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온라인 뉴스구독

뉴스레터를 신청하시면 귀하의 이메일로 주요뉴스를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