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박병학의 글쓰기 삶쓰기] 용산 살인 진압 140일 현장 문화제

6월 10일은 용산 살인 진압 현장에서 '용산 참사 140일 해결 촉구 및 6.10 항쟁 22주년 현장 문화제'라는 긴 이름을 붙인 집회가 열린 날입니다.

생목숨 여섯이 학살당한 지 벌써 140일입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죽인 사람은 없고, 누가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벌을 받거나 죗값을 치르지 않았습니다. 여태껏 장례조차 치러 주지 못한 여섯 주검들은 아직도 냉동고 안에서 꽁꽁 얼어붙은 채 한 많은 이 세상 어서 떠나갈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삶과 죽음마저 공들여 때깔 좋은 화보로 만들고 동영상으로 얼기설기 간추려 내는 인터넷 세상은 더 이상 용산 철거민들에게서 빨아들일 단물이 없음을 알고서 이미 오래 전에 미련 없이 등을 돌렸습니다.

해거름에 집을 나설 때까지도 망설였습니다. 시청으로 가야 할지 용산으로 가야 할지 얼른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기준 하나를 붙들고 오롯하게 세워야 했습니다. 아마도 시청 앞에는 지난해 6월 10일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정부를 이끌었던 이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먹고 살 길이 하도 막막해진 끝에 이대로 죽을 순 없다는 생각으로 나온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장 급하게 거꾸러뜨려야 하는 적이 이명박 정권 하나라면 어차피 그럴 바에야 여기저기 다른 쪽에서 비수를 겨누고 화살을 쏘아 대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옛말에도 썩은 정권 타도할 때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시청 앞에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바글바글 모여들었다고 해서 스물 두 해 전 군사 독재 정권에게 되살아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입힌 그날처럼 온 세상 사람들 마음에 불길을 확 댕길 수 있을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믿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천막 농성장을 세우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있거나 밥을 굶고 있거나 감옥에 갇혀 있거나 두들겨 맞고 있거나 일터에서 쫓겨나고 있는 노동자들이 과연 드넓은 시청 광장의 어디쯤에 자리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을 거꾸러뜨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과정과 뒷갈망에 대해서는 모두들 생각이 달랐습니다.

87년 6월 항쟁은 그해 여름 내내 노동자들이 일어서서 싸워 가는 데에 큰 힘이 되어 주었고, 지난해 여름 밤을 환히 밝힌 촛불들도 이랜드나 기륭전자 같은 비정규직 장기투쟁 사업장들에까지 줄곧 스며들어 노동자들의 어깨를 든든하게 해 주었습니다. 어쩌면 뜻 있는 사람들이 가야 하는 곳은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짓눌려 꼼짝 못하고 있는 현장이지 촛불 켜지 않아도 온갖 불빛들 때문에 환하기만 한 시청 앞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청 앞에 모여든 사람들의 진심을 함부로 깎아내려서는 안 되겠지만, 어차피 몸뚱이는 하나이니 갈 곳도 한 곳이어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외로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차라리 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시청 앞에는 어차피 양복쟁이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용산 살인진압 현장에 다다르니 저녁 일곱 시였습니다. 신부님들이 앞에 나와 미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송경동 시인을 만나 인사를 하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사진을 좀 찍었습니다. 눈을 주는 곳마다 서로 다른 손글씨 꼴로 적혀 있는 글귀들이 제가 쓰는 글보다 아마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을 것이기에 굳이 군소리를 덧붙이지 않으려 합니다.


벽에 내걸린 천에다 사람들이 손으로 쓴 내용들입니다.

나는 알고 있다. 1월 20일 새벽에 너희가 철거민을 어떻게 죽였는지
- 노점 노동자 김인자

철거민 운동은 변혁의 도화선이다. 열사의 뜻을 잇자.
- 한국인권뉴스 대표 최덕효

대통령 잘못 만나 온 국민이 개고생이다.
- 지금 상공 철대위

나에게는 있어서 최고의 아버지 였는데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슬픕니다.
- 고 윤용현 열사 둘째 아들

명예 회복하고 테러범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가족 곁으로 가고파요!
- 고 윤용현 열사 처 유영숙

사람 죽이는 대통령이 대한민국 대통령 맞냐?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 고 이상림 열사 손자 올림

나는 소망한다. 우리에게 금지된 주거 생존권을.....
- 용산 신계 철대위

용산 참사 관련 수사 기록 3000쪽 공개하라!
- 고 한대성 열사 미망인 신숙자

구속자를 석방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라!
- 고 양회성 열사 미망인 김영덕

철거민도 사람이다 살고 싶다. 명박 퇴진
- 용산 4 연사부장

우리들의 시대는 집이 헐린 채 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도심 속의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있다.
- 정희성 시인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 이시영 시인

용산은 우리의 슬픔이자 아픔이고 부끄러움이자 분노입니다. 먼저 가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 김별아 소설가

우리 시대의 악은? 우리 시대의 선은? 용산이 묻는다.
- 공선옥 소설가


<망루>
불타 버린 망루
마주보이는 전선줄에
새 몇 마리 앉아서 운다
지상에서 영원히 철거 당한 몸
몇 달째 땅속에도 들지 못한
차가운 주검
냉동실에 잠시 두고
아 저녁 마실 나오셨는가
바람이 분다
“차라리 떠나 불자”
새가 운다
- 김해자 시인

근조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둔 슬픈 시인의 격문을 이 한 줄에 담는다 . “누구도 더는 죽이지 마라”
- 손세실리아 시인


미사가 끝나자마자 북과 장구, 꽹과리 소리가 고요하고 엄숙했던 분위기를 와락 뒤흔들었습니다. 한바탕 흐벅지게 놀아제끼려는 듯 신나게 두들겨 대니 사람들이 악기잽이들을 빙 둘러싸고는 흥겹게 몸을 까딱거렸습니다.


병신춤이 나오자 흥이 치솟은 사람들이 함께 나와 어울려 가며 들썩들썩 춤을 추었습니다.


악기잽이들이 물러가고 잔뜩 달구어져 흐트러진 분위기가 추슬러진 뒤 양회성 열사의 아내인 김영덕 씨가 나와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오늘 6.10 항쟁 22주년 기념일에도 이렇게 용산 현장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사에 참여해 주신 300명이 넘는 예술인 여러분들께도 감사 말씀 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날인데도 불상사가 있었지요. 행사를 방해하려는 용역 깡패들한테 가서 그쪽 관리인에게 저희가 물었습니다. ‘오늘 같이 예술인들이 행사를 해 준다고 한 날에 당신들이 양심이 있으면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용역 깡패 관리인이 그러더군요. ‘저희가 하는 게 아니라 용산 경찰서가 지시를 해서 어쩔 수가 없어요.’ 어찌 민중의 지팡이가 용역 깡패를 위하고 대기업을 위하는 지팡이가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검찰청을 방문해서 3000쪽 수사 기록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검찰청을 방문할 자격이 없는지 그냥 나가라고 하더군요. 검찰청장을 꼭 보고 가야 되겠다고 면담 요청도 했지만 그것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문을 잠가 버려서 저희는 20여 분 동안이나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3000쪽을 달라, 아니면 검찰청장이 나와라’ 그렇게 계속 주장을 하니 어떤 사람이 나와서는 대화로 하자고 하더군요.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뒤로 20여 분간 엘리베이터에 갇혀 있었는데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으로 내려갔습니다. 저희를 엘리베이터 안에 감금해 버린 겁니다. 엘리베이터 안의 불도 껐습니다. ‘사람 죽이려고 하느냐!’고 항의하며 문을 두드리자 그제서야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주더군요. 나와 보니 서초 경찰서 경찰들이 저희를 현행범으로 체포하려고 와 있었습니다. ‘공영 건물 무단 침입죄’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범죄자입니까? 저희는 검찰이 감춘 수사 기록 3000쪽을 달라는 말을 하려고 갔습니다. 저희들에게 걸어서 나가라고 해서 ‘못 나간다, 1층으로 다시 올려달라’고 항의하니 저희를 1층 민원실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거기서 정문 밖으로 나가자고 해서 순진한 저희는 그 말을 믿고 정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정분 밖에서 3000쪽을 달라고 외쳤더니 무단 침입죄로 저희를 연행해 갔습니다. 서초서에서는 저희를 왜 연행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은평 경찰서로 이송되고 거기서도 너댓 시간 동안 감금 당했습니다. 은평서에서도 저희 유가족들이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 채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저희는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할 때까지 용산을 잊지 않고 찾아 오시는 여러분들과 함께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시청으로 갔는지 사람들이 많이 줄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이 조금 꼬여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왕 그렇게 된 거 촛불들이 무지막지하게 모여 이명박 정권이 찔끔 오줌 지리도록 우왕! 하고 놀래켜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지 않아도 시청 앞이 어떨지 눈앞에 삼삼했습니다. 번들거리는 투구들과 번쩍이는 방패들, 험상궂은 전경 버스들.... 다치거나 잡혀가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노래와 몸짓을 비롯한 여러 공연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전경 버스와 전경들은 살인 진압이 있었던 건물을 확실하게 지켜 주고 있었습니다.


공연은 밤늦도록 이어졌습니다.



열두 시쯤에 끝날 듯했지만 인천 가는 막차를 타야겠기에 저는 열한 시쯤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못 찍는 솜씨에 그래도 어디 하나 건질 만한 장면이 없을까 사진기를 든 채 어슬렁거리기만 했을 뿐 제가 한 일은 딱히 없었습니다. 용산 살인 진압 현장에도 꽤나 오랜만에 온 것이었습니다.

거푸 담배를 피워 댄 탓에 알알해진 혀끝을 입속에서 궁굴리며 용산 전철역 쪽으로 가는데 웬 반지빠르게 생긴 젊은이가 앞쪽에서 다가오더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속삭였습니다. “아가씨 많아요. 러시아 애들도 있구. 싸게 해 드릴게.”

어허, 이게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청소년 금지구역’이라고 쓰여 있는 장막 너머 새빨간 불빛 속에서 키 크고 늘씬하며 가슴과 엉덩이가 불룩 솟은 여자들이 저를 흘긋흘긋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도 어이가 없어 “긴 밤 얼만데요?”라고 물어보려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그 젊은이를 떨쳐 내고 길을 갔습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가 이르는 곳마다 널려 있었습니다. 너무 많아서 차라리 말하기 쉬운 그들은 조끼 입은 해고 노동자의 모습으로, 가족 잃은 어미와 아내와 자식들의 모습으로, 온몸 불살라 사라져 간 동료를 기억하는 모습으로, 촛불을 든 채 광장을 지키려고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으로, 때로는 몸으로 밥 먹고 사는 여자들의 모습으로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훌훌 털고 일어나 자기가 가고픈 곳으로 날개 달린 듯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140일. 노동조합이 파업에 들어간 날짜가 아니라 벌건 대낮에 도시 한가운데에서 어처구니없도록 잔인한 학살극이 벌어진 지 140일째, 생목숨 여섯이 죽어서까지 범법자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지 140일째, 인정사정 보지 않는 재개발 정책이 기어이 이빨을 드러내고 철거민들을 물어 죽인 지 140일째, 냉동고 안에서 주검들이 추워 견디지 못해 흘린 눈물마저 꽁꽁 얼어붙은 지 140일째라는 소리입니다. 오래 싸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보니 어느새 세 자리 숫자에도 익숙해져 버려 가슴속이 전처럼 놀라지도 않아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제가 둔해져 버린 탓인지 아니면 싸움을 끝내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그 자리에 붙박아 두는 이 거머리 같은 정권 탓인지 뭔가가 제 가슴속에서 잔뜩 뒤틀려 버린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하지만 시대 탓만 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겠지요. 다른 할 말은 없고, 송경동 시인의 시를 허락도 염치도 없이 이 자리에 빌려 옵니다. 우리에게는 얼마나 더 많은 분노가 있어야 할까요.


이 냉동고를 열어라 - 송경동

불에 그을린 그대로
134일째 다섯 구의 시신이
얼어붙은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갇혀 있다

까닭도 알 수 없다
죽인자도 알 수 없다
새벽나절이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토끼처럼 몰이를 당했다
그들은 사람이었지만 쓰레기처럼 태워졌다
그들은 양민이었지만 적군처럼 살해당했다

평지에선 살 곳이 없어 망루를 짓고 올랐다
35년째 세를 얻어 식당을 하던 일흔 둘 할아버지가
25년, 30년 뒷골목에서 포장마차를 하던 할머니가
책대여점을 하던 마흔의 어미가
24시간 편의점을 하던 아내가
반찬가게를 하던 이웃이
커피가게를 하던 고운 손이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 절박하다고
호소의 망루를 지었다

돌아온 것은 대답없는 메아리였고
너무나도 신속한 용역과 경찰의 합동작전이었다
6명이 죽고 십여 명이 다치고
또 십수 명이 구속되었다
이웃이 이웃을 죽였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이었다
단지 쓰레기를 치웠을 뿐이니
단지 말을 잘 듣지 않는 짐승 몇을 해치웠을 뿐이니
경찰과 용역깡패들과 정부와
대통령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그렇게 6명이 죽고도
이 사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수의 시민들이 차벽과 연행에 맞서
양심의 촛불을 들고
추운 겨울부터 더운 초여름까지
어둔 거리에서 쫓기며 항의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들 역시 수배되거나, 체포되거나, 소환당했다
용산참사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용산참사를 추모하는 것조차 금지당했다
유가족들이 다시 경찰에 밟히고 희롱당했다

하루 이틀 날짜가 쌓여 넉달이 되었다
하,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넉달이 되었다
하, 이웃들의 원통에 찬 한숨이 넉달이 되었다
하, 죽어서도 무슨 죄를 그리 지어
저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날이 넉달이 되었다

민주주의 사회라고 한다
민주주의가 용산에서 아직도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데
열린 사회라고 한다
억울한 죽음들이 넉달째 차가운 냉동고에 감금당해 있는데
살만한 사회라고 한다

134일째 다섯 구의 시신이
차가운 냉동고에 갇혀 있다
134일째 우리 모두의 양심이
차가운 냉동고에 억류당해 있다
134일째 이 사회의 민주주의가
차가운 냉동고에 처박혀 있다
134일째 이 사회의 역사가 전진하지 못하고
차가운 냉동고에 얼어붙어 있다
134일째 우리 모두의 분노가
차가운 냉동고에서 시퍼렇게 얼어붙어가고 있다
134일째 우리 모두의 뜨거운 눈물이
차가운 냉동고에서 꽁꽁 얼어붙어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는 우리의 용기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의 권리가 묶여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자식들의 미래가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모두의 것인 민주주의가 볼모로 갇혀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이 냉동고에 우리 모두의 소망인
평등과 평화와 사랑의 염원이 주리 틀려 있다
이 냉동고를 열어라
거기 너와 내가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사랑이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연대가 갇혀 있다
너와 나의 정당한 분노가 갇혀 있다
제발 이 냉동고를 열자
너와 내가, 당신과 우리가
모두 한 마음으로 우리의 참담한 오늘을
우리의 꽉 막힌 내일을
얼어붙은 시대를
열어라. 이 냉동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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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 문화제 , 610 , 14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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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nseksrmrqhr

    산더미 같은 피와 눈물과 땀의 덩어리 같은 무게가 느껴집니다.우리의 눈앞에 민주가 보이는 그날까지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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