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이수호의 잠행詩간](70)

고여서 썩은 희미한 곰팡이 냄새를 맡으며
빈집에 들어서면
먼저 꼼꼼히 살핀다
거실이며 주방이며 방이며 화장실이며
머릿속에 정확하게 그린다
흩어져 있는 쓰던 물건들의 위치와 모양
먹다 만 빵조각이나 펼쳐져 있는 책의 쪽
꺼져 있는 TV의 채널
그 집을 나올 때는
거기 머물렀던 시간을 거꾸로 돌려
들어설 때 그대로 뒷걸음쳐야 한다
소개해준 분에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지만
부재증명은 도발이의 생명이다
그래도 참 좋아요
하루 이틀이라도 이런 편안함이 어디예요
두 겹 세 겹 문을 잠그고
비로소 갇힌 자유를 확인하며
너는 오히려 들뜬 기분이다
샤워부터 하세요
난 저녁 준비 할 게요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욕조에 벗은 몸 밀어 넣으며
천 길 만 길 깊은 물속으로 들어간다
마음껏 태평양을 가르는 외톨이 고래
그 충만한 외로움의 기쁨에 잠긴다
저 멀리서 은은히
된장 끓는 냄새 들려온다
때로 너는 나의
빈집

* 잘못한 게 없으므로 경찰소환에 불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밖에 있어도 감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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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qnseksrmrqhr

    잔잔한 흐름에 담겨있는 이야기들이 정겨운 마음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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