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배추밭에서

[이수호의 잠행詩간](96)

산골짜기 비탈밭 뽑히지 못한 배추가
겉껍질부터 허옇게 얼어가고 있다
내 꼬락서니를 보는 것 같아 민망스럽다
가을바람 야물어지고 계곡물 딴딴해질 때도
속도 채우지 못하고 퍼렇게 건들거리다가
뽑혀 가도 기름 값도 안 나오는 신세가 되었다
겉보기는 생김생김도 그 놈이 그 놈 같구만
농사꾼은 안다 그냥 척 보면 안다
어떤 놈이 여름을 제대로 난 놈인지
어떤 놈이 속이 제대로 찬 놈인지
슬쩍 만져만 보아도 안다
내가 얼굴에 분칠이나 하고
갖은 말솜씨로 그럴듯하게 얄랑거리며
카메라 앞에 기름 바른 대가리를 들이민다 한들
그걸 국민이 모르겠는가? 시민이 모르겠는가?
또 한 계절을 보내며 내가 할 일은
저녁안개 아침서릿발일망정 남은 햇살 아끼며
깨끗하고 하얀 속을 채우는 일
날로 먹어도 맛날 노란 고갱이를 만드는 일

*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후원의 밤’, ‘출판 기념회’, ‘출마 선언’ 등이 이어지고 있다.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으면 좋겠다. 산길을 걸으며 겨울배추밭 가에서 몹시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