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의 도시빈민과 연대운동

[우리사회의 빈민운동사](5)

1980년대 전두환 군부독재가 들어서면서 사회적으로 폭력적 억압은 한층 강화되어 나갔다. 따라서 1980년대 초반은 1970년대 이후 종교를 기반으로 한 활동가와 몇몇 지역의 주민들만이 종교적 성향의 빈민운동에 결합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도시빈민운동은 이들의 꾸준한 활동을 통해 공부방과 탁아소, 야학 등으로 점차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기독교도시빈민선교협의회 (이하 기빈협)와 천주교도시빈민회 (이하 천도빈) 등의 새로운 조직이 결성되는 성과가 나타나기에 이른다.

기빈협은 목회자, 탁아소와 공부방 교사모임, 청년, 활동가 모임을 정착시키고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단위별 지역협의체 건설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며 천도빈은 지역위원회라는 명칭으로 신부 수녀 일반빈민지역 활동가와 철거민 지도자들을 통해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철거지역과 빈민지역의 현장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및 주민들을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헌신적인 운동을 펼쳐나갔다.

물론 눈에 보이는 흐름 못지않게 일부에서는 1980년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사회적인 문제와 도시빈민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들은 서울의 각 지역에 목적의식적으로 소모임을 조직하고 학습과 토론을 전개하면서 빈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잡으려는 노력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현실에서 이들은 비공개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으나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은 1987년 7월 17일의 ‘서울지역 철거민협의회’와 1987년 10월 19일의 ‘도시노점상연합회’ 등의 건설에 산파 역할을 했다는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들 활동가조직은 기존의 종교운동 못지 않게 빈민 대중조직이 만들어지고 발전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한편 1980년 들어서 주목할 부분은 보건사회부의 노동청을 노동부로 승격하면서 산업안전보건법과 최저임금 법등을 제정 시행했으며 1990년대에는 보건사회부가 보건복지부로 개편되면서 4대 보험제도인 국민연금제도, 고용보험제도, 의료보험제도, 산재보험제도 등이 실시되기 시작했다. 민심으로부터 이반된 정권의 위기를 관리하고 통제할 정책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민중교회와 혀 잘린 하나님

1980년대 진보적인 종교성향의 탁아소와 도시빈민 교회 등의 활동을 전개했던 난곡의 낙골교회를 주목할 수 있는데 1978년 2월경에 서울대와 이대, 서강대 학생들 그리고 지역의 일용직 청년 10여 명이 중심이 돼서 관악구 신림동 난곡의 오래된 교회에 야학을 설립하면서 부터였다.

원래 난곡은 60년대 도심 불양주택단지와 용산 청게천 서울역 등지의 판자촌의 철거 후 이곳으로 이주해 오면서 구청에서 8평씩 분필로 금을 철거민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난곡이란 명칭은 햇볕이 잘 들어 난초가 무성히 잘자라 생겨난 고유 명칭이라는 설이 있고 ‘낙골’이란 명칭은 뼈들이 굴러다니는 공동묘지에 도심지에서 강제 철거된 집단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쓰레기처럼 내던져진 자신들의 삶을 낙골(落骨)에 빗대면서 붙인 것이었다. 어쨌든 당시 다른 지역의 야학이 대부분 검정고시나 노동야학 위주로 진행되었던 데 반해 낙골야학은 생활야학에서부터 출발하였다.

  빈민운동가 고 김흥겸씨 [출처: 한겨레 신문]
1985년 중반에는 낙골야학을 통해 나효우 전도사와 김흥겸 전도사를 중심으로 한 교회공동체가 구성되면서 이를 예배공동체로 전환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예배란 한자리에 앉아서 하는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현장을 따라 움직이며 이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따라서 이를 신도들과 공유하면서 이들은 교회 건물을 떠나서 매주 집회현장을 옮겨 다니고 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이 가장 즐겨 함께 부르던 노래는 단연 김흥겸전도사가 작사 작곡한 '민중의 아버지', 그리고 당시 가장 많이 불렀던 '새', 군중의 함성, 아침이슬, 상록수, 임을 위한 행진곡 등 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은 다른 순서 없이 이러한 노래를 돌아가면서 한 곡씩 부르는 것으로 예배를 마치기도 하였다. 낙골의 노래는 삶이며 생활 같은 것이었다. 평일에도 장구와 징으로 장단을 맞추며 목청껏 노래부르고 어깨동무하면서 마음소통을 이루었다. 1)

이들은 사당동과 상계동, 양평동 철거투쟁 현장에 합류하기도 했고,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을 방문하거나 시위 도중에 부상당한 노동자들을 병문안하기도 했다. 또한 택시노조 시위현장에 참여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이 이어졌다. 그 후 이들의 활동은 낙골(난곡)지역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구체화되는데 ‘난곡지역협의회’와 ‘주민회 준비위’ 등이 이러한 실천 활동의 산물이었다. 김흥겸 전도사는 후에 김해칠이라는 가명으로 서철협과 전노련에서 일을 하다가 위암으로 운명을 달리한다. 다음은 김흥겸 씨가 지은 민중가요 ‘혀 잘린 하나님’의 일부다.2)


“우리에게 응답 하소서 혀 잘린 하느님, 우리기도 들으소서 귀먹은 아버지.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느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늙으신 아버지.
하느님 당신은 죽어 버렸나? 어두운 골목에서 울고 계실까?
쓰레기 더미에 묻혀 버렸나? 가엾은 하나님.
얼굴을 돌리시는 화상 당한 하느님, 그래도 당신은 하나뿐인 민중의 아버지…….”



이와 비슷한 활동을 최근 들어 투쟁현장에서 다시 목격할 수 있었는데 작년 용산참사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된 남일당 건물 앞이었다. 한국적 상황에서 모든 운동이 그러하겠지만 엄혹한 시절 종교인들의 양심적인 활동은 언제나 커다란 힘이 되고 위안이 되었다. 아니 실질적으로 이들의 주도적인 활동이 있었기에 새로운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초기 빈민운동진영 안에는 이러한 운동들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간극이 있었으나 최근 들어 어떻게 다른 부문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발전을 해왔는지 새롭게 조명을 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한편 1988년 들어 공부방 연합이 결성되면서 20여 개 이상으로 확대됐으며 1990년대 초에는 그동안 3~4개에 불과했던 지역탁아소가 전국적으로 70여 개로 확대되어 지역탁아소연합회(이하 지탁연)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단위 지역 내 탁아교사모임을 통해 기간 활동에 대한 점검을 하고 경험을 공유하며 공동의 사업과 연합행사, 자체 교육 등을 추진하게 된다. 이당시 도시빈민교회도 10여 개 이상이 설립돼서 도서실이나 도시빈민상담소 등의 활동을 병행했다. 지역단위의 사업들에는 하월곡동의 ‘우리 마을 발전추진위원회’, 성남 중원구 은행동 지역의 ‘은행 골 지역모임’ 등의 공동체운동이 있었다. 이밖에도 제정구씨를 중심으로 써 1986년의 ‘도시빈민연구소’가 결성되었으며 이후 '공간환경학회'와의 통합을 통해 1994년 10월에는 ‘한국도시연구소’가 창립되었는데, 한국도시연구소는 빈민운동과 사회운동의 전문정책 지원단체로서의 기능을 현재까지 수행하게 된다.


도시빈민공동투쟁위원회의 등장

1988년 건설된 도시빈민 공동투쟁위원회는 6월 13일 전개되었던 도시노점상연합의 투쟁과 6월29일 반민중적 올림픽으로 탄압받는 도시빈민 생존권 쟁취대회 그리고 서철협 창립 1주년 기념집회를 계기로 천도빈, 기빈협의 교회 등이 결합하면서 결성되었다. 이로써 최초로 빈민단위의 역량을 결집시킨 연대투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당시 도시빈민투쟁에 있어서 커다란 성과는 바로 ‘도시빈민 공동투쟁위원회’의 결성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과거에 이러한 움직임과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로소 도시빈민공동투쟁위원회를 통해서 서철협 집회와 투쟁에 노점상 대중이 결합하고 노점상 투쟁에 서철협 대중이 동원 지원하면서 대중 간의 연대와 단결 그리고 협력의 기운이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도시빈민 공동의 처지와 운명에 대한 대중적 자각의 경험을 확보한 것이다.

특히 1980년대 후반 군부독재의 통치가 극에 달하던 시기에 각 부문별로 진보적인 운동세력과 대중조직들이 결성되고 이를 통해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기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도시빈민 공동투쟁위원회’는 빈민진영 공동투쟁의 본격적인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빈민공동투쟁위원회’ 연대투쟁의 출발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경험이 축적되지 못한 데서 오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각 단체 회원들의 의식수준과 이해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공동투쟁은 많은 어려움을 낳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여전히 각 지역과 단체들의 독자적인 활동방식과 조직운영에 차이가 존재했다. 따라서 상호 간에 이러한 고유성을 침해하지 않는 가운데 서로를 풍부하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3)

한편 도시빈민 공동투쟁위원회 결성에 즈음하여 1988년 9월 17일 경희대에서는 반민중적 올림픽에 맞선 노점상 올림픽문화제를 개최되었고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당시 전두환 군부독재를 뒤이은 노태우 정권에게도 88서울올림픽은 대단히 중요한 국제적인 행사였다. 노태우 정권은 국내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따라 항시 위협받고 있었다. 따라서 올림픽을 계기로 국민을 통합하고 정치적 위협을 무마하려고 기도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언론매체를 동원하여 올림픽 열기를 조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결국 민족의 대축제라는 올림픽은 기층 민중들을 소외시키는 행사일 뿐이었으며 올림픽 축제는 그림의 떡이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변색되고 민중들을 소외시키며 가진 자들의 잔치로 전락한 올림픽에 맞서 ‘다함께 즐기고 참여하는 민중을 위한 올림픽을 전개해야 한다’ 는 구호를 내세우며 ‘노점상 올림픽문화제’가 경희대 대운동장에서 개최된 것이었다. 비록 노점상들의 올림픽은 잠실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것보다 외형상으로는 초라했을지 몰라도 노태우 정권의 본질을 폭로하고 도시빈민들도 훌륭한 자기 문화를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성공적인 행사였다. 나아가 모든 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서 진보적인 문화를 어떻게 우리 운동 속에 반영하고 심화 시킬 것인가라는 고민의 단초를 제공한다 할 것이다.

이는 문화를 단순히 풍물이나 노래패를 조직하는 정도의 기능적인 측면에 그치지 않고 사회구조 속에서 소외받고 억눌려 있는 도시빈민의 일상 속에서 우리 민중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어떻게 건강한 삶을 유지할 것인가와 직결되는 사안이라 할 것이다.


상설적인 연대기구인 전국빈민연합의 결성

도시빈민 공동투쟁위원회의 성과에 이어받아 일년 후 1989년 11월 11일에는 전국노점상연합회와 서울철거민협의회(이하 서철협), 일용건설노동조합 추진위 등이 모여 ‘전국빈민연합’(이하 전빈련)을 결성하고 공동 투쟁을 전개하기로 나섰다. 당시 전빈련은 노점상을 비롯해 철거민, 일용노동자 등 빈민 대중의 연대 조직으로서 도시빈민 공동투쟁위원회의 성과를 이어받고 이를 뛰어넘는 조직으로 성장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이러한 실천은 노점상의 단속저지 투쟁과 철거민의 임대주택쟁취 투쟁, 일용 노동자의 조직건설 작업 등에 서로 힘을 보태면서도 각각의 부문이 처한 문제를 빈민문제의 해결이라는 총체적인 시각 속에서 재조명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측면에서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1989년 11월 8일에는 전빈련 선포식에 앞서 천주교 도시빈민회(이하 천도빈)와 기독교 도시빈민선교협의회(이하 기빈협) 그리고 지역사회탁아소연합(이하 지탁연) 등이 시기상조를 이유로 이에 불참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자 강령과 규약을 아직 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노련과 서철협 그리고 남부 건설일용노조가 결합하여 전빈련을 출범시켰다. 당시 전빈련 건설과 관련된 논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전빈련 결성의 시기를 둘러싸고 아직 역량이 미흡하므로 과도적 형태의 ‘도시빈민단체 협의회’를 구성하자는 의견이 이었다. 이는 천도빈과 기빈협을 중심으로 한 지역교회와 지역센터의 협의회 등에서 제기한 내용이었다. 즉 각각의 부문과 대중조직의 성장 발전을 통해 연합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둘째 도시빈민 운동의 기조를 지역조직과 지역운동론에 두고 이를 강조하는 견해와 도시빈민 부문 조직 강화론을 주장하는 입장 등이 있었다. 먼저 부문조직 강화론의 입장에서는 전노련 소속의 개개인은 노점이란 직업을 통해 단속에 대응하는 노점상 부문의 대중조직이라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에 생존권을 쟁취하고 저항하는 방식이 집회와 같은 대중투쟁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결합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면 철거민 뿐 만아니라 노점상 개개인도 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장사를 하거나 지역을 기반으로 해서 조직이 구성되어 있으므로 장기적으로는 대중투쟁보다는 지역운동을 근거로 한 지역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지역운동론의 입장이 이에 대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의 대립은 지역과 부문의 유기적인 결합과 발전으로 해소될 수 있었다. 가령 철거민을 놓고 보더라도 강제철거에 맞선 지역별 세대 위를 기반으로 한 지역조직이지만 철거민의 주요 구성이 일용 건설노동자와 노점상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지역과 부문에 대한 통일된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견해가 충분히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논쟁은 이후 도시빈민운동에서 주요한 논쟁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다.4)

그러나 빈민운동의 고질적인 병폐인 상층인사들의 출세주의적 경향과 이들을 어떻게 조직의 체계 속에서 배치하고 안배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실질적인 문제였다. 이러한 배경을 둘러싸고 위와 같은 조직내 논쟁의 출발이 전개되었다는 점도 간과 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80년대 철거민 운동의 흐름

  1985년 목동철거민 시위장면 [출처: 경향신문]
다음은 철거민운동의 조직별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역시 이러한 평가와 흐름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으며 이글이 조직들 간의 입장과 상충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다만 빈민운동의 과거를 살펴보면서 왜 이렇게 수많은 연대체와 조직들이 등장하고 사라져 갔으며 갈등을 빚었는지 그리고 시기시기 제대로 된 평가가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점에 조금이라도 보템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간의 경과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익히 알려졌듯 지역별로 분산돼 있던 철거민투쟁이 조직적 결합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 진행된 종교진영의 사회적 개입이 결국 80년대 접어들어 목동 투쟁에서 본격화되면서다.

이 시기에는 수많은 학생운동 세력이 철거투쟁에 결합하였고 이를 통해 주거권과 도시빈민운동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 시기에 5년 간 30여 개 철거지역에서 주민조직인 세입자대책위원회를 건설되는 등의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에는 민주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마침내 서울의 철거지역에 있는 수많은 세입자 조직의 참여로 ‘서울시 철거민협의회 (이하 서철협)’가 만들어 진다. 그 규모 면에서도 서철협은 당시 서울지역 대부분의 철거조직을 망라한 대중적인 협의체였으며 철거반대 투쟁의 전투적 폭발력과 파급력을 이끌면서 빈민운동의 대중화에 지대한 이바지를 했다. 내용적으로도 선진적 활동가와 학생정치조직의 결합의 성과에 기반을 둬 결성된 서철협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세력과 종교단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이러한 다양성과 복합성은 크고 작은 갈등이 잠재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마침내 천도빈과 상계동 철거민 등이 서철협의 강경 투쟁노선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990년 6월에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연합(이하 주거연합)’을 결성하게 된다. 이후 주거연합은 한국도시연구소와의 유기적인 결합을 통해 철거투쟁을 넘어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였다. 주거연합은 2천 년대 들어서도 임대주택법 개정 등 공공 임대주택 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주거기본법 제정 등의 꾸준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5) 비교적 온건한 철거투쟁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1980년대는 대도시의 주택난이 정점에 이르고 이에 따라 토지와 주택에 대한 투기현상이 극심해지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때는 세입자용 아파트를 얻고자 방 1칸의 딱지가 1천만 원이 넘는 프리미엄이 붙어 팔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불만과 저항이 점점 높아지자 노태우 정권은 어쩔 수 없이 일련의 변화된 주택정책을 발표하였다. 특히 2백만 호 주택공급을 약속하고 기존의 철거재개발을 지양하면서 이를 현지개량 위주의 주거환경 개선사업으로 전환한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합동재개발 시에도 세입자용 임대주택을 짓지 않으면 사업 승인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이밖에 임대주택 정책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신도시 개발을 비롯한 대규모의 택지개발 사업을 약속하는 등의 주택문제 해결이 당장에라도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시키는 데 주력하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정권이 가진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 서민들의 생활에 직결되는 주택문제 해결을 통해 정권의 지지기반을 다지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물량위주의 계획도 정권 임기 후반에 대부분 수정되었다.

1980년대 말 서울시 외곽과 경기도 지역에서 대규모의 택지개발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지역에서 밀려나는 철거민들은 더욱 강경하게 투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산층을 겨냥한 중대형 아파트의 공급으로 인해 투기가 조장되면서 가난한 일반서민들이 감당하기 힘든 전월세 값의 폭등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철거민들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철거로 인해 총 18명이 넘는 철거민들이 목숨을 잃는 희생을 치르게 된다.

철거투쟁은 그야말로 전시상태를 방불케하는 투쟁을 불러오게 되었다. 이러한 희생과 투쟁의 성과로 이시기 다양한 방식의 개발방식이 추진이 되거나 1986년 이후에는 철거민에 대한 법적 보장이 명문화되기도 하는데, 1987년에는 주거대책비 지급이나 소형아파트 7평에 대한 분양권 중 택일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지고 1989년에는 2개월분의 주거대책비가 3개월로 상향 조정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1989년 주거환경개선 사업이 시행되었는데, 합동재개발 사업과는 달리 공공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사업방식으로 현지개량방식은 지자체장이 결정시행자로 지구 내 필요한 도로 상하수도 등 공공시설을 설치하고 주민은 각자 건축허가를 받아 주택을 개량하는 방식이 추진된다. 그러나 여전히 건축규제완화로 과밀개발이 발생하는 문제점 등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공동주택방식 또한 지자체장, 공공기관이 법정 시행자로 토지건축물을 전량 매수하여 전면철거 후 공동주택을 건설하여 주택을 분양하는 방식으로 토지 및 건물보상을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으며 사업기간 동안 주민의 주거대책이 소홀하고 원주민의 재정착률도 낮은 문제점이 있었다.6)


각주)-----------------
1) 김기돈, 『낙골 교회 이십년 역사 읽기』 2001년 1월 28일
2) 김흥겸씨의 유고집으로 <낙골연가>가 있다
3) 전빈련, “도시빈민연대 운동의 흐름” 내부자료
4) 최인기, “빈민운동의 검토와 방향”『해방수레를 끌며 9호』(전노련 2007년) p121-125
5) 길윤형, “두 개의 길, 전철협과 전철연” (한겨레 21 제558호)
6) 박현주, “도시재개발지구의 주거권 운동의 연구” 한남대학교 사회문화 대학원 2006년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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