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부재가 만든 역사학자 박지향의 지적 허영심

[새책] 윤치호의 협력일기 (박지향, 이숲, 2010년 2월22일, 238쪽)

저자 박지향은 1953년에 태어나 유신이 한창이던 1975년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나와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치고 유신이 마지막 발악을 하던 한국사의 역동기인 1978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에서 유럽사학을 공부해 1985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위를 받은 박지향은 곧바로 미국에서 2년간 뉴욕프랫(Pratt)대에서 조교수 생활을 하다가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귀국해 인하대 조교수 자리를 얻었다. 9년만의 귀국이었다.

박지향은 박정희의 죽음도, 전두환의 12.12 쿠데타도, 5.18 광주항쟁도, 80년대 치열했던 대학과 공장의 싸움도 보지 못했다. 역사학자로는 치명적인 부재다. 이 부재가 나중에 인식의 부재로까지 확장한다. 그녀가 태어나 본 한국은 초등학교 2학년 때 5.16 쿠데타의 주역 박정희가 미국 유학차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여전히 권력을 잡고 있었다.

존재의 부재가 인식의 부재로 확장

박지향은 1992년 모교인 서울대 조교수로 옮겨와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서양사학과 교수로 있다. 영국사를 전공해 주요 저서도 대부분 영국사를 중심으로 출판하고 영국사학회 연구이사도 지냈지만 정작 공부는 미국에서 했다. 1997년 <영국사>(가치글방)에 이어 2000년 <제국주의>(서울대), 2002년 <슬픈 아일랜드>(새물결), 2006년 <영국적인, 너무나 영국적인>(기파랑), 2007년 <중간은 없다. 마거릿 대처의 생애와 정치>(기파랑) 등이 그녀의 영국 관련 주요 저서다.

나는 잠시 그녀가 공부하던 시절 영국 사회가 대처의 망나니 같은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그녀가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해 본다. 지식인은 원래 갈대처럼 나약하게 외부 환경에 휘둘리기 마련이니까. 지식 생활 내내 영국과 미국 언저리에서 헤매던 그녀가 2006년 어줍지 않게 <한국노동운동과 미국, 1945-1950>(책세상)을 논문 형식으로 펴냈다. 그녀의 가장 최근 연구서가 이 책 <윤치호의 협력일기>다.

이 책은 참고문헌과 찾아보기를 빼면 200쪽 남짓하다. 원고 5백매 가량의 책을 들고 연구서라고 발표하는, 그것도 곳곳에서 서양사학에서 편식한 글을 짜깁기한 채. 프롤로그(16~37쪽)와 1장(40~65쪽), 2장(68-92쪽)까지 서술 내용은 서양사학사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전문 연구자의 명성이 부끄럽다. 결국 실제 그녀의 생각은 만화책 크기의 100여 쪽에 담겨 있다.

문장은 전체적으로 명료하지 않고 대부분 인용의 뒤로 숨어 있다. 중요한 팩트는 대부분 “--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식으로 빠져나가고, 책의 줄기를 이루는 문장도 다른 사람의 말을 옮겨 적은 인용문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머리말은 그녀의 생각을 온전히 담고 있어 흥미롭다.

“왜 윤치호인가?”라는 박지향의 변명

박지향은 1970년대 자신이 영국사를 공부한 이유를 2개로 들었다. 하나는 근대 형성에 가장 많이 기여한 나라였고, 다른 하나는 유신정권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했다. 두 번째 이유는 납득하기 힘들지만 당시 청년지식인 눈에는 불량국가인 조국에 대한 반발이 ‘모범국가인 영국’을 연구하게 만들었다. 영국을 모범국가로 인식하는 그녀의 태도부터가 비틀어져 있다.

연구를 하면서 박지향은 우리보다 더 비참한 민족이 많다는 데 충격을 받고 <슬픈 아일랜드>를 썼다고 했다. 영국과 아일랜드를 공부하다보니 일본과 한국도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 일본을 통해 박지향은 “민족사관은 이젠 졸업할 때도 됐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에 대한 미움을 극복한 과정이 우리에게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박지향의 말을 좀 더 옮기자.

‘친일’은 미운 사람을 망가뜨리는 가장 손쉬운 수단이다. 친일의 극렬한 심판자가 돼 대중의 공감을 얻어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까지 있다. ‘잘못’ 태어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조금 더 성숙한 태도로 과거를 정리할 때가 됐다. 친일 청산을 말자는 게 아니다. ‘제대로 하자.’ 더 많은 연구와 역사적 사실 규명된 후에야 가능하다.
프랑스는 1970년대 레지스탕스 신화의 해체 움직임이 있었다. 저항과 협력은 이분법이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유치하고 정략적인 정치놀이다. ‘친일’의 탈신화로 조금 더 진실해지자. 윤치호(1965-1945)는 미국 체류 5년도 안되지만 훌륭한 영어로 일기를 썼다. 경이롭다. 일기는 그의 친일 때문에 평가절하됐다. 나의 관심은 서울대 외교학과 하영선 교수님이 이끄는 전파모임에서 윤치호의 일기를 완독하면서 시작했다.


이쯤 되면 그녀가 말하는 “좀 더 성숙한 태도”와 “제대로 하는 친일청산”이 궁금해진다. 동시에 “친일의 탈신화”와 “평가절하된 윤치호의 영어일기”가 이미 결론을 말하고 있다. 이런 류의 교수들은 책 서문에 꼭 이렇게 말한다. “연구년을 맞아 LA의 파란 하늘아래에서 원고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 2010년 벽두 관악에서, 박지향”이라고. 미국 가서 영국사를 배우고, 한국 사람에 대해 “LA의 파란하늘 아래에서” 원고를 쓰면서 ‘2010년 벽두 관악에서’라는 3어절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지적 허영심을 드러내는 교묘한 수사다. 참 글로벌해서 좋겠다.

말장난으로 시작하는 프롤로그 : 협조, 협력, 협력자

박지향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 “저항은 좋은 것, 협력은 나쁜 것으로 간주”하는 극히 잘못된 이분법을 갖고 있었다고 비판한다. 박지향의 착각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분법으로 살지 않았다. 우리는 “협력은 출세와 영달, 저항은 3대가 가난”이라는 이후의 삶에 주목했을 뿐이다.

다시 박지향은 말장난 같은 궤변을 늘어놓는다. “협력자는 불가피한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주었던 사람, 협력주의자는 자발적으로 협력한 사람으로 정의하자. 협력과 구분되는 또 다른 개념은 ‘협조’다. 서양학계에서는 저항과 협력의 경계선이 무척 모호하다”고 한다. 나아가 박지향은 “저항만이 자립을 위한 투쟁이었고 협력은 자립의 회복이라는 목표를 아예 포기한 행동이었다는 주장 역시 옳지 않다”고 말한다.

협조, 협력, 협력자를 구분하면서 박지향은 국어학자처럼 군다. 말장난이다. 핵심은 저항과 협력의 경계선 허물어뜨리기다. 경계선을 허무는 논리적 근거는 <서양학계>다. 역시나 박지향의 머리 속은 온통 ‘서양’이다. 박지향 교수에게 <난 몇 퍼센트 한국인일까>(책세상, 2004)를 권한다.

윤치호를 다시 생각하다

윤치호의 일생은 잘 알려져 있는데 박지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1840-1911)은 갑신정변에 합류하지 않았지만 쿠데타 세력이 그를 형조판서에 내정하는 바람에 정변 실패 후 유배당했다. 윤웅렬은 이후 중국 망명했다가 대한제국 때 법부대신, 군부대신을 지냈고 합방 후 남작작위를 받았다.

윤치호는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 갔다가 남아서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고 귀국해 통역관이 됐다. 갑신정변 후 중국 상해에서 5년 가량 유학했다. 1888년 미국에 가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서 공부하고 1893년 11월 상해로 돌아왔다가 1895년 귀국해 학부(요즘 교육부)의 협변을 역임했다. 윤치호는 1897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2대회장을 지내고 서재필 도미 이후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이 당시 윤치호는 중국인 마애방과 결혼해 윤영선(맏아들) 윤광선(차남) 윤봉희(맏딸)를 낳았다. 1095년 사별하고 당시 18살이던 백매려와 재혼했다. 나이 40에. 첫 중국인 부인에겐 존경심을 가졌다. 재혼한 두 번째 부인에겐 “심술궂은 성격과 막돼 먹은 언어사용, 무식”이라고 적었다.

을사조약 체결 직후 공직에서 물러났다. 합병 직후 해외여행을 떠나 1912년 돌아왔다. 105인 사건으로 1912년부터 2년 수형생활. 1915년 2월 출옥 이후 어떤 민족운동에거 불참. 서울 YMCA 회장을 지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중추원 고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상무를 맡고 해방직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됐다.


박지향은 “우리에겐 친일을 바라보는 경직된 시각이 아직도 널리 퍼져 있다. 해방 직후엔 ‘친일파’에 대한 관용의 태도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경직된 인식으로 변화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협력에 이르는 길은 획일적인 비난으로 단순화하기엔 너무 복잡다단한 동기와 신면, 심리상태가 작동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윤치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윤치호를 위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박지향은 윤치호가 제 아버지마저 비난한 부분을 예로 든다. 특히 러일전쟁 때 아버지의 행동을 비판한 일기의 내용을 인용한다. <“비참한 조선”을 애통해하는 윤치호는 이용익에 대항해 나라의 지주인 내장원을 없애고 군부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아버지가 “이제 그 자리 책임자가 되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기록한 부분을 들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아버지의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나지 못했던 서자 출신의 깔려 있는 분노를 늘 이런 식으로 표출했을 뿐이다.

윤치호의 실력양성론

박지향은 1887년 4월 상해에서 미국 남감리교도 세례를 받은 윤치호의 사상을 기독교와 사회적 다윈주의였다“고 지적하면서 조선이 정치적 독립을 얻기 전에 경제적 문화적 지적으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윤치호의 생각을 전한다. 실력양성론은 안창호, 이광수와 궤를 같이한다.

동시에 박지향은 “윤치호가 내선일체에 호응하지 않았고 가능하다고 믿지도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일본의 식민정책에 비판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을 바라보는 윤치호의 생각은 오락가락한다. 박지향도 이 부분에 동의하면서 “그는 조선왕조의 실정에 절망해 일본에 잠시 기대했지만, 일본 통치가 고종기보다 나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기에 윤치호는 일본의 군사적 승리에 탄복해 대일 협력에 다가간다. 윤치호는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대일 협력만이 조선민족의 살길 이라고 믿었다”고 적었다. 강한 자에게 기대는 지식인의 전형적인 나약함일 뿐이다. 나치즘을 그렇게 싫어하는 인간이 나치 독일의 동맹국 일본과 협력해 나가는 모습은 어떻게 설명할까.

국내 독립운동에 대한 윤치호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박지향은 “윤치호는 단순히 만세 부르고, 망명정부 수립하고 변경에서 사소한 무력투쟁을 벌인다고 조선에 독립이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고 서술한다. 이 부분 박지향의 서술이 더 소름끼친다. 다시 그런 역사가 반복돼도 자신은 윤치호 식으로 살겠다는 소리다.

68혁명 이후 영미역사학계의 이론 비틀기

박지향은 이 책 1장에서 분량을 채우기 위해 주로 영미역사학계에서 흘러다니는 이론과 사조들은 모아 정리했다. 서양학계에서 협력문제를 첫 제기 학자는 주변부 이론을 제시한 영국의 로널드 로빈슨이라고 소개하거나, 역시 영국의 역사학자 필드하우스의 주변부 강조론을 소개하고, 영국 역사학자 린다 콜리의 포스트식민주의를 소개하는 등등이다.

박지향은 1970년대 이후 프랑스의 ‘되돌아보기 사조’를 매우 이상하게 재해석했다. 박지향은 당시 프랑스를 “드골이 만든 신화의 파괴와 전쟁 중 프랑스 국민의 행동에 대한 비판과 각성”이라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척하다가 1974년 드골과 다른 노선의 지스카르 데스탕(1926~) 대통령 당선 이후 프랑스의 역사 바로보기를 왜곡한다.

박지향은 ‘4천만이 저항한 프랑스’라는 드골식 신화의 전복을 소개하면서 1) 레지스탕스의 역할을 축소하고 연합군의 노력을 인정 2) 레지스탕스 활동가는 극히 미미했음을 인정 3) 프랑스국민 대부분이 승자의 편에 섰음을 인정 4) 프랑스인이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는 드골의 날조된 신화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이는 부분적으로만 맞다. 레지스탕스의 역할을 축소한 건 드골이 당시 영국에 도망 가 있었음을 재확인하는 것이었다. 68혁명 이후 프랑스 역사학계는 승자의 편에 섰던 광범위한 하층 관료까지 보게 됐다.

협력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이 책 2장은 70년대 프랑스가 자국의 나치 저항운동을 깎아내리는 작업과 동시에 협력과 협력자를 ‘복권’시켰다고까지 진화한다. 박지향은 1975년 루이 말 감독의 영화 <라콩브 루시앵>을 예로 들면서 “협력 동기가 거대하고 심각한 게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주인공은 삶이 지루한 젊은 노동자다. 자극을 찾아 레지스탕스에 지원했지만 거절당하고 친나치로 향한다. 계산적 협력이 아니라 상황의 산물이고 생각 없는 행동이었음을 보여준다. 협력자는 특별한 악한도 아닌 불행한 개인”이라는 거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협력’의 긍정적 역할로 교묘하게 전이시키고 있다. 나아가 박지향은 뷔랭의 ‘적응’ 개념도 소개한다. 저항에서 협력을 넘어 적응까지 나왔다. 박지향은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가 말한 “점령된 프랑스에서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억압의 묵인을 포함했다”는 표현까지 동원해 저항과 협력에 물타기를 시도한다.

일제하 조선의 협력자를 위한 변명

반민특위 때문에 1948년 후반기부터 관련 책이 몇권 나왔다. 이에 대해 박지향은 “저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선정적이고 선동적”이라고 폄훼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연민이 엿보인다”고 소개한다.

박지향은 당시 나온 책 <친일파 군상>의 편집자가 “여기 등재될 인물 중에는 진정 협력자도 많지마는 위협과 강요에 부득이하여 협력적 행동을 하게 된 자, 또는 형식적으로 협력하는 체한 자 절대 다수라 아니할 수 없다. 관헌과 그 주구배의 강요 위협 등에 부득이 협력적 태도를 보인자, 혹은 전향 성명을 하게 된 자 불소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부류의 인물들에 대하여는 그 환경과 처지에 도리어 연민할 점이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한 부분에 주목하면서 당시 친일파에 대한 관대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포악해졌다고 지적한다. 지금이나 당시나 친일파의 이후 태도 여부에 따라 관대함의 진폭은 있기 마련이다.

윤치호의 사상과 그의 시대

윤치호는 일기에서 선교사 스코필드(1889-1970) 박사의 말은 인용한다. “하나님은 조선 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셨는데 조선 사람은 긴 손톱을 택하고 나라를 버렸다”고 한 그의 말에 윤치호는 조선 사람들이 게으름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감탄한다. 윤치호의 자유주의는 점진적 개혁을 선호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자유주의자 윤치호는 영국을 찬탄하고 독일을 혐오했다.

조선 사람이 게을러서 나라를 잃었다는 시각은 지식인의 자기 변명이다. 조선은 지식인의 무능과 탐욕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 조선 민중은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새벽에 나가 해질 때까지 논밭에서 일해야 겨우 먹고 살았다. 정작 게으른 쪽은 조선의 지식인이었다. 갑신정변을 비판했지만 윤치호는 그 정변의 내각에 이름을 올렸다.

조선 독립의 불가능성

윤치호는 일본이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환호했다. 전쟁에 대한 사랑이 유럽인의 피에 내재한다고 믿었던 윤치호는 그런 유럽을 이긴 일본을 좋아했다. 조선이 아직 독립 국가를 운영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윤치호의 믿음은 1945년까지 일관됐다. 윤치호는 한때 고종에게 개인적 정을 느끼고 일정시점까지는 왕을 설득해 조선개혁의 꿈을 지녔다. 러일전쟁 중 제물포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고종황제는 점쟁이들의 말을 듣고 궁궐 기둥 밑에 큰 솥을 묻는 짓이나 하느라고 바빴다. 윤치호는 이후 조선 ‘최대의 적’은 바로 황제라고 결론짓는다.

윤치호는 1920년 일기에서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지 않고 계속 조선왕조가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추론한다. “황제의 궁정은 가장 사악하고 잔인한 악한들로 채워졌을 것이고, 나라 전체는 도둑과 강도로 들끌었을 것이고, 관리들은 강도나 도둑들 못지않게 백성을 착취했을 것이고 미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는 조선의 모든 천연자원을 다 갈취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선을 병탄한 일본에게 감사했던가.

윤치호는 고종과 집권세력은 물론 조선의 양반에게도 차가왔다. 윤치호가 말하는 조선 양반의 몇 가지 생활법칙은 다음과 같다. 1) 수저를 들거나 붓으로 글 쓰는 것외 자기 손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너무 위대해서 시계조차 자신이 차지 않고” 하인이 가지고 다니게 한 민영익(1860~1914)을 예로 들었다. 조선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사람들이 형편없는 진흙으로 초가집을 짓고 사는지 외국인들도 의문이었다. 1921년 중국행에서 조선을 들른 영국의 신문왕 노스클리프 자작은 “아프리카 토인도 저보다 나은 집에서 산다”고 조선의 초가를 평했다. 윤치호은 이에 조선의 “썩어빠진 정부” 밑에서 아무도 “감히 버젓한 집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과학문명으로 무장한 서구식 자유주의는 결코 초가의 우수함을 알 수 없었다.

박지향은 윤치호는 젊은 시절부터 투철한 민본정신을 갖추고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믿었다고 했다. 딱 미국식 자유주의만큼의 민본주의일 뿐이다. 윤치호는 독립협회 활동 때 당시 대중의 민도에 실망하고 그 운동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보수파의 반대보다도 대중이 민주주의를 하기엔 아직 성숙치 못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선동을 그만두고 경제적 지적 여건 개선에 몰두해야 한다는 게 윤의 확신이었다. 대중에게 실망하는 사람은 역사를 모른다. 그런 윤치호 같은 지식인만 들끓었던 조선은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윤치호의 1920년 8월22일자 일기엔 “조선 사람들이 대우받길 원하면 초가집이 높은 빌딩으로, 더러운 시궁창 길이 도로와 시가지로, 무식이 지식과 영리함으로, 가난이 부로, 허약함이 힘으로 대체하지 않는 한 우리는 미국인처럼 처우받기를 바랄 수 없다”고 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주장이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3.1만세 운동세력은 거지들이다.

박지향은 영어일기를 분석해 “윤치호가 냉정함을 유지한 조선의 엘리트였다”고 설명한다. 박지향은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조선 독립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윤치호의 증거는 1) 국민의 무지. 대중이 신문을 전혀 읽지 않는다. 2) 일본이 독립을 주지 않을 것. 다른 강대국도 조선을 위해 나서지 않을 것 등이다. 1차 대전 직후 파리강화회의 진행 중 대부분 조선 엘리트는 들떠서 조선 독립을 보장받으려 했다. 윤치호는 불가능함을 냉정히 파악했다. 윌슨(1856~1924)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흥분해 송진우는 조선 독립을 예견했다. 윤치호는 파리회의에서 조선은 이슈가 안 되고 어떤 강대국도 조선 문제를 제기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것임을 파악했다.

시몬느 베이유도 두어 달 공장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을 적은 일기에 신문을 읽지 않는 공장 노동자를 보고 실망했음을 토론했다. 당시 어떤 조선 민중도,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도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윌슨식 조선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승만 류의 인간들만 윌슨식 독립에 기대를 걸고 윌슨 면담에 목을 매달았다.

다시 박지향은 “윤치호는 3.1 만세만으로 독립이 어렵다고 냉소했지만 운동의 긍정적 효과도 인정했다”고 소개한다. 즉 3.1만세 운동이 민족의식을 깨우쳤고, 외국 선교사의 태도에 변화를 가져왔다고 봤다는 거다. 그런 윤치호의 1920년 8월14일 일기에 “만세만 외치는 거지들”이라고 썼다. 윤치호 식으로 정리하면 민족주의자 유관순도 ‘거지’란 소리다.

대신 윤치호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언급하면서 “350년간 오스트리아 억압 속에 민족 역량을 갈고 닦은 결과 기회가 왔을 때 잡았다”고 탄복한다. 1918년 12월17일 일기는 중국 건너가 독립운동 하던 양기탁이 체포됐다는 소식에 ‘얼마나 바보인가!’라고 평했다. “벽돌을 발로 찰 필요는 없었다”고 했다. 윤치호는 양기탁 같은 사람이 일본의 불신을 지속시키는 ‘조선인의 적’이라고 생각했다. 참 대단한 궤변이다. 도대체가 독립을 위해 뭘 하자는 건지. 오로지 ‘교육과 계몽’에만 목을 매달았다.

교육과 계몽, 또 교육과 계몽

윤치호는 젊은 시절부터 정치적 독립보다 더 중요한 게 ‘교육’이라고 믿었다. 윤치호는 학생들이 일본에 저항한다며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한심하다고 비판한다. 1920년대 들어 근대교육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입학 지원자가 정원을 넘는 상황에 윤치호는 “좋은 징조”라고 고마워한다. (1920년 4월2일 일기) 윤치호는 조선의 근대식 교육이 늘 총독부의 따사한 품 안에서만 기능한다는 기본적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윤치호가 건립한 한영서원은 14명으로 시작해 1910년 학생 수 329명이 됐다. 학교는 농업, 목공, 축산법, 직물 등 실업교육을 가르쳤다. 윤의 장남 윤영선이 축산업에 종사하고 해방 후 제3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했다. 윤치호는 교육에 실용성을 가장 먼저 고려했다. 영국에 유학한 5촌 윤보선(1897~1990)이 “단지 문학공부에” 학비 800파운드를 보내 달라고 했을 때 고소를 금치 못했다. 윤치호는 철학 따위를 공부한 조선학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윤치호는 1919년 10월 26일 일기에서 “게으른 혀를 굴리는 데 사회주의는 이상적 분야”라고 조롱했다. 윤치호는 1924년 1월 25일 일기에서 레닌의 죽음에 대해 그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진지한 이상주의자였다고 평하면서도 그런 위대한 인물이 “학술적 이상을 비현실적인 결론으로 이끌기 위해” 위대한 국가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것이 비극이었다고 한탄했다.

1940년 12월 26일 일기에서 “조선 사람이 아직 일본 사람들과 동등해질 희망이 없다”고 판단했다. 윤치호는 일본 정책을 비난하면서도 조선이 따라야 할 교사는 일본이라고 믿었다. 일본을 저항의 대상이 아닌 모범 전형으로 인정하는 윤치호는 근대교육이 곧 제국주의 지식인을 양성하는 기관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조선과 일본에 대한 양비론

박지향은 “윤치호가 조선과 일본에 대해 양비론”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독립을 위해 윤치호는 대중이 사회적 지적 역량을 키우고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공덕심’을 키우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윤치호가 보기에 대부분 조선인 기업이 망하는 이유는 자본 부족이 아니라 성실하고 정직한 노동자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거다. 윤치호는 공덕심 부족을 유교 때문으로 봤다. 윤치호가 봤을 때 조선인의 두 번째 문제점은 공통된 대의를 위해 결코 통합하지 못한다는 거다.

유교는 윤치호 같은 지식인에겐 뼈 속까지 영향을 미쳤지만 조선 민중에겐 유교나 기독교나 모두 중세 봉건주의일 뿐이었다. 윤치호는 폭력적 저항운동에는 치를 떨었다. 1919년 9월 2일자 일기는 가관이다. “민족주의자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이 조선의 합병을 서두르게 했음을 기억하지 못하고 1919년 신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려 한 기도는 ‘형편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윤치호는 조선 독립은 암살로 확보할 수 없다고 믿었다. 윤치호는 상해 임정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윤치호는 임정을 “산적”이라고 불렀다.

윤치호는 1920년 9월 27일 일기에서 갓 창간한 동아일보가 영국의 인도 지배를 비판하고 일본의 신도에 불경한 발언을 해 정간당할 때 동아일보를 비판했다. 조선 사람들이 똑똑한 시민이 되도록 계몽하고 교육하는 게 일본에 대한 증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윤치호에게 일본은 애시당초 비판의 대상일 수 없었다.

윤치호가 일본을 자신의 일기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다. 윤치호는 1920년 총독부 임시교육조사위원 자리에 자신을 임명하려고 하자 거부했다. 이완용과 같은 위원회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이완용이 백작에서 후작으로, 송병준이 남작에서 백작으로 신분상승하자 윤치호는 “배반자”라고 말했다. 윤치호는 1934년 최남선이 일선동조 책자를 발간하는 댓가로 일본인에게 1만엔의 집을 받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 일본을 비판하던 윤치호는 5년도 안돼 친일 협력에 적극 뛰어든다.

태평양전쟁기의 친일 협력

윤치호는 1930년대 후반부터 더 적극 대일협력에 나섰다. 박지향은 윤치호의 변절에 대해 “윤치호는 내선일체 구호에 현혹돼 협력한 게 아니다”라며 변호한다. 박지향은 창씨개명한 직후인 1924년 1월3일자 윤치호의 일기에 “내 아들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할 수 없다”는 변명을 소개하면서 윤치호를 변호하지만 구차하기 이를데 없다.

박지향은 “윤치호는 1938년까지는 일본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윤치호는 1941년 고사했던 중추원 고문직을 수락하고 흥아보국단 위원장이 됐다. 1945년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됐다. 박지향은 40년대 초 윤치호의 변절이 일제의 철저한 억압 때문이라고 하면서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윤치호는 1920년대에 창씨개명하고 1931년 만주사변 때도 일본의 정책을 지지했다. 만주사변 때 윤치호가 일본을 지지한 이유는 “일본이 성공하면 조선인 정착민들에게 더 나은 삶과 일자리를 제공해 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국제정세에 그렇게 눈이 밝은 윤치호가 이렇게 생각했다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윤치호의 태도는 결국 지원병제 찬성으로까지 나아갔다. 박지향은 이 부분을 “조선 민중이 일본식 전투주의를 배우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동조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궤변이 어디있나.

무솔리니 신봉하면서 나치 미워하기

윤치호는 제국주의는 다 마찬가지라는 믿음은 사회적 다윈주의가 맹위를 떨칠 때 서양에서 공부한 걸 내면화했다. 윤치호는 앵글로 색슨족이 “이 세상에서 가장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영국이 최고 수준의 문명국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1921년 11월 5일 일기) 이는 박지향도 마찬가지다.

박지향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1920~30년대 유럽에서 시인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등 파시즘에 매력을 느낀 지식인이 많이 나왔다. 윤치호도 한때 무솔리니에게 경도했다. 1929년 2월11일 일기에서 무솔리니의 “에너지와 능력, 고결함, 상식”에 감탄했고 “감상적 국제주의, 짐슴같은 볼세비증, 구역질 나는 사회주의”로부터 이탈리아를 구해 내고 강대국으로 만들었다며 무솔리니를 존경하면서 그와 같은 인물이 조선에도 나타나기를 바랐다. 이런 사람이 국제감각 있는 사람이 맞는지. 나치는 그토록 미워하면서 무솔리니는 신봉하고, 일본에는 친일했던 이런 윤치호를 뭐라고 설명할까.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는 궤변

윤치호의 일기는 1943년 말에 끝나지만 해방 후엔 <좌옹 윤치호 서한집>을 냈다. 윤치호는 해방 후 조선의 정부수립 움직임에 “듣자니 조선 사람들이 민주정부 출범에 관해 거론한다는데 내겐 마치 6살 어린이가 자동차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을 거론한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영국과 미국 두 나라만이 세계에서 민주주의로 성공한 유일한 나라들입니다.”라고 했다. (윤치호, <한 노인의 명상록1> <<좌옹 윤치호 서한집>>, 229쪽 - 해방 이후 쓴 책)

제국주의 영국을 세계의 모범국으로 칭송하면서 그에 발맞춰 따라가는 일본에 부역했던 우왕좌왕했던 지식인이 제 민족, 제 나라에겐 민주주의를 할 능력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사고만은 죽는 날까지 시종일관 유지했다.

에필로그 : 윤치호를 위한 변명

박지향은 이 책 끝(에필로그)에서 “윤치호는 선각자였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였던 윤치호가 한때 영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일본 파시즘에 잠시나마 동조한 것은 치명적 한계였다. 그의 사상에는 언제든 파시즘으로 나아갈 소지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해방된 조선은 윤치호가 보기에 아직 독립국가를 이룰 역량이 모자랐다”는 시각은 윤치호의 생각임과 동시에 박지향의 생각이기도 하다. 박지향은 윤치호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장을 “우리는 분열되지(하지) 말고 단결해야 한다”(좌옹 윤치호 서한집)였다고 소개한다. 윤과 박의 머리 속엔 민중혁명 같은 게 들어올 틈이 너무 없었다. 100년을 사이에 두고 미국만 갔다오면 선각자가 되는 풍토는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다. 바로 그들이 나라를 말아 먹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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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 박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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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식분자

    이렇게 지식은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이 두 남녀를 통해 잘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다.

  • 솔이아빠

    지식이 뭐가 문제겠어요. 어떤 지식인가가 문제고 지식을 쌓아 그걸로 독을 뿜는 사람들이 문제겠지요.

  • 한심한 관료

    민주노총 정책국장이라는 사람이 할 일 되게 없나보군. 조합원들의 조합비 가지고 월급 받는 자가 할 일 없이 이런 쓰잘 데 없는 책에 대해 서평이나 읊어대고 있다니. 박지향이가 누군지 우리 노동자들 중 누가 아나? 그리고 알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다고? 박지향이 책을 누가 본다고? 아무 영향력도 없고 관심도 못끄는 박지향이 책을 난데 없이 소개하는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도대체 월급받아서 자기 취미 생활하는 자인가? 이런 글 장난 하라고 월급주나?

  • 좋은생각

    정책국장님의 식견에 감탄하고 갑니다. 물론 박지향이 누구인지 몰라도 사는데는 아무 지장 없겠지만 식민지시대를 경험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최소한 식민지 시대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한번쯤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 -_-

    과학문명으로 무장한 서구식 자유주의는 결코 초가의 우수함을 알 수 없었다. ---> 이글에 나오는데 초가가 어디가 우수한가요? 그렇게 우수한데 왜 아무도 안사나요? 이것만으로도 이글은 무용

  • 똑똑한 관료

    한심한관료님 저는 민주노총정책국장이 누구신진 몰라도 너무나 쓸데있는 서평을 써주셔서 감사하네요
    어디가 글장난인가요??????

  • 1

    기사 읽고 있는 데 글을 참 중학생이 말꼬루티잡듯이 쓰시네요. 껄껄껄. 저자가 LA파란하늘아래서 글을 쓰건, 자메이카에서 레게를 들으며 쓰던 뭔 시덥잖은 꼬투리, 꼬투리까지 다 잡아뜯는 걸보니, 오죽 박지향이란 사람이 미웠나봅니다. 혹시 옛날에 돈 빌려줬다가 떼먹기라도 했나요? 껄껄껄. 보고 있는 이 쪽이 오히려 민망합니다. 하기사 민노총정책국장이시니, 구호나 운동 이런 거 잘하실테니까 글에다 그런게 아주 잔뜩 있는 거 같습니다. 껄껄껄 책 평가하기 전에 본업에 충실하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 불사조사학과

    포인트는 알겠습니다. 민중투쟁이 필요한 시점에 한심하게 교육,계몽만 외치던 윤치호를 위해 변명하는 박지향 교수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 이군요.(특히 그 분이 서양에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런데 이 글의 부분부분에서 미국 열등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 그럴 까요? "LA의 파란 하늘 아래" 라는 게 어떻게 지적 허영심이 되나요? 250년 도 되지 않는 역사에, 달러와 항공모함으로 패권을 유지하는 제국의 하늘이 어떻게 "지적 허영심"과 관련이되지요?
    적어도 이란이나 중국의 하늘 정도면 모르겠지만..... 제가 볼때는 그냥 필자 분께서 미국을 혐오 하면서도 동경하는 것 같으시네요
    ----------------------------------------
    그리고 존재의 부재가 인식의 부재로 이어진다는 주장에도 동의 할 수 ㅇ없습니다. 인간의 이념이나 생각은 주로 경험에 의해 만들어 집니다. 육이오때 눈 앞에서 가족이 살해되는 것을 본 사람은 공산주의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기가 거의 불가능 합니다. 마찬가지로 국군의 양민학살을 경험한 분도 그의 생생한 경험 때문에 남한을 중립적으로,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없게 됩니다.
    박지향교수가 5.18과 12.12, 등 역사적 경험을 하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문제를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을 것 같네요.


  • 에휴

    돌다돌다 이렇게 돌아서 평생을 살면 술없인 못살겠지. 민주노총이 맨날 헛짓하는 이유를 알겠다. 정책국장을 이런 사람이 맡다니... 당신에겐 '공부 좀 더하고 세상을 따뜻히 보라'는 말도 아깝다 이미 한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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