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조작하는 안기부장에 분노했던 조갑제

[낡은책 19] 국가안전기획부(조갑제, 조선일보사, 1988.11.20, 317쪽)

이 책은 ‘조갑제의 대사건 추적’이란 부제를 달고 4권까지 나온 시리즈물의 3번째 책이다. 표지 사진을 구할 수 없어 1권 <군부>의 사진으로 대신했다. 3권 역시 검은 바탕에 노란 글씨를 새긴 다소 촌스런 표지 그대로다.

조갑제는 이 책(316쪽)에서 “안기부장이란 자리의 높음과 크기와 강함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던져야 할 질문사항은 많다. 간첩수사라는 것이 사법 절차뿐 아니라 인간 윤리까지 무시하고, 간혹 자신의 양심까지 속여가면서 무기수와 사형수를 만들어야 할만큼 고귀한 작업인가? 고문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당신네들은 단 한 번이라도 고문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역사의 평가’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역대 국가안전기획부장들에게 질문한다.

안기부를 해부했던 조갑제

1988년에 나온 이 책의 이름대로 조갑제는 국가안전기획부를 해부했다. 조갑제는 이 책에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안기부장들에게 분노했다. 조갑제는 이 책(56쪽)에서 ‘간첩조작을 고발한다’는 소제목으로 안기부의 고문조작의 한 사례를 소개한다.

1988년 9월3일 오후 서울대 교수회관서 열린 한국형사정책학회(회장 이수성, 서울법대 학장) 학술발표회에서 박경준(朴京俊, 55세, 전남 진도군 고군면 지막리 1513)씨는 ‘간첩수사를 고발한다’는 강연을 했다. 박씨는 6.25때 행방불명된 형이 북한에서 간첩으로 내려왔을 때 만나 포섭된 혐의로 1980년에 구속돼 징역 7년을 살고 1987년 5월 광주교도소를 출소했다. 박씨 일가 다섯 명은 공범으로 구속돼 모두 실형 살고 나왔고, 조카는 무기수로 아직 교도소에 있다. 박씨는 검찰 간부와 판사들이 회원인 이 학회에서 “안기부가 60일간 영장없이 우리 가족을 불법감금, 끔찍한 고문으로 사건을 완전 날조했다”고 주장했다. “온몸을 맞아 퉁퉁 부어 옷도 벗지 못하고 수사실 옮길땐 굼벵이처럼 굴러서 이동했다. 친척인 여자들을 참고인으로 데려와서는 알몸으로 벗겨놓고 몽둥이질했고, 저의 성기를 종이로 감싸고 불을 질렀다. 서울구치소로 이송시키는 차안에서 수사관들은 이번 사건으로 누가 승진하고 누가 보상금을 타고, 수고한 댓가로 화전놀이를 간다는 등 잡담을 했다. 짐승 앞에서도 차마 못할 이야기 아닙니까” 부면장을 지낸 공무원 출신 박씨는 이 일로 패가망신했다고 말했다.

고문에 치를 떨었던 조갑제

한창 때 KBS <미디어포커스>는 대단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별들이 광주의 5.18를 피로 진압한 뒤 기념파티장에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연예인들을 불러놓고 술판을 벌이는 모습까지 공개했다. 당시 미디어포커스가 공개한 화면에는 유명 여가수가 추근대는 장군의 집요한 스킨쉽을 피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장면도 나온다.

KBS <미디어포커스>는 2005년 1월 전세계 최고의 탐사보도기자들을 찾아가 그들의 언론에 대한 신념을 들어 4부작으로 내보냈다. KBS가 처음 찾아간 인물은 60대 후반에도 왕성하게 미국의 이라크 전쟁 비리를 파헤쳐 세상을 놀라게 한 전 뉴욕타임스 기자 세이무어 허쉬(‘시모어 허시’라고 쓰기도 함)였다. 허쉬 기자는 베트남 밀라이 마을에서 미군이 벌인 잔혹한 민간인 학살을 폭로해 베트남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다.

최근엔 허쉬 기자의 책이 국내에도 번역돼 나왔다. <세상을 바꾼 탐사보도 - 밀라이 학살과 그 후유증에 관한 보고>(번역 김석, 세종연구원, 2009)는 KBS 김석 기자가 당시 허쉬 기자를 취재한 뒤 허쉬 기자의 책을 뒤늦게 번역한 것이다. 나는 강주헌씨가 2004년에 번역한 <지휘계통>을 더 좋아한다. 이 책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라크 전쟁의 추악한 실상을 파헤쳤다.

조갑제는 한국의 기자들이 허쉬 기자는 물론이고 탐사보도가 뭔지도 모를 1980년대에 이미 시모어 허쉬 기자의 책을 읽고 그로부터 배웠다. 조갑제는 1960-1980년대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졌던 3건의 비행기 격추사고를 추적하면서 허쉬 기자의 도움을 받는다.

우리 땅에서 일어난 3건의 비행기 사고

조갑제는 먼저 1969년 4월 14일 동해 공해상에서 미군 해군 전자첩보기 EC-121이 북한 공군기의 공격으로 격추돼 승무원 31명이 몰사한 사건을 이 책 218쪽에서 추적한다.

이 비행기는 1968년 납치된 푸에블로호처럼 공산국 통신감청을 전문으로 했다. 당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북한에 무력 보복을 주장했다. 전 뉴욕타임즈의 퓰리처상 수상기자인 시모어 허쉬는 <권력의 댓가>란 책에서 당시 비화(秘話)를 소개했다. 허쉬에 따르면 미국 NSA의 통신감청기지가 북한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고의 도발이 아니고 전투기 조종사에 대한 관제실수로 드러났다. 이에 따라 미 CIA는 온건한 보복정책을 주장해 백악관은 이를 택했다. 그런데 닉슨이 기자회견때 중대 실수를 했다. “격추될때 EC-121이 공해상에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격추 당시 우리는 북한 레이더가 뭘 보여주고 있었는지, 소련 레이더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도 안다. 미국, 소련, 북한 세 나라의 레이더는 똑같은 위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은 김현희의 KAL기 격추 9년 전인 1978년 4월20일 파리를 출발한 대한항공 902편 보잉 707기가 앵커리지를 향해 날다가 항법사의 근무태만으로 소련 무르만스크 상공으로 들어가 소련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조갑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한다.

KAL 007 사건을 추적해 <목표는 파괴되었다>는 책을 쓴 미국의 시모어 허쉬 기자에 따르면 미군 기지는 소련 요격기의 통신주파수에 다이얼을 맞추고 미사일을 맞는 상황을 생생하게 들었다. 소련 조종사가 KAL에 접근해 “꼬리에 KAL 표시가 있다. 군용기가 아니라 민항기다”고 지상에 보고했다. 그래도 관제사는 격추 명령했다. 조종사는 “내가 한 말을 못 알아듣는군. 민항기란 말이야”라고 다시 소리쳤다. 소련이 민항기를 격추시키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미국은 KAL에 아무 경고도 하지 않았다. (253쪽)

이 책 255쪽에는 1983년 9월1일 새벽 3시 KAL 007기가 또 소련에 격추된 장면을 기록했다.

미국이 KAL 007기의 이탈을 알고도 소련방공망의 대응방식을 알아보려고 일부러 가만히 있었다는 의심을 지금껏 받고 있다. 시모어 허쉬기자에 따르면 캘리포니아에서 휴가중이던 레이건 대통령이 격추보고를 받은 게 한국시간으로 1983년 9월1일 15:30분이었다. 내(조갑제)가 확인한 사실은 다르다. 이보다 앞서 9월 1일 15시에 김포공항 어느 사무실에는 미국 정부가 한국으로 급히 보낸 KAL 007의 상세한 항적도가 도착해 있었다. 이 역시 미국이 먼저 상세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1988년에 이미 허쉬 기자의 <권력의 댓가>와 <목표는 파괴되었다>를 읽은 조갑제는 1983년 세 번째 사건에선 김포공항 어느 사무실에 들어가 미국 정부가 보낸 KAL기의 항적도까지 빼냈다. 지금도 모든 국제공항에는 국정원의 별도 사무실이 있어 내외국인의 모든 출입국 기록을 갖고 있다. 그 방은 공항에선 대부분 ‘101호실’로 부른다. 그 방에 기자가 들어가 자료를 빼내는 건 80년대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초대형 비리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다.

대형 국책사업은 늘 비리와 밀접하다. 미국산 고물 전투기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김영삼 정부 시절 린다 김과 이양호 당시 국방부장관의 커넥션 같은 비리는 지금도 일어난다. 러시아와 합작해 쏘아올리려다 두 번이나 실패한 나로호 발사에서 주목할 점은 러시아 연구원의 할복자살 기도다. 그 구멍을 파고 들면 큰 건이 숨어있다. 그러나 최근엔 어떤 기자도 이런 비리를 파헤치는 인간이 없다. 한국 언론의 위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1960-1980년대 개발독재 시절엔 정유회사와 제철회사, 화력발전소, 시멘트공장, 원자력발전소, 심지어 전화설비까지 수입하는 과정에서 비리는 곳곳에 늘려 있었다. 조갑제는 이 책에서 개발독재 시절 한국의 대형 국책사업을 도입하는 과정에 전문적으로 개입해 엄청난 뒷돈을 챙긴 국제 브로커 ‘사울 아이젠버그’를 추적했다.

국제 브로커 사울 아이젠버그는 1920년 독일 뮌헨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났다. 2차대전 직전 나치를 피해 스위스로 갔다. 로테르담, 상해를 거쳐 도쿄에 정착했다. 오스트리아 남자과 일본인 여자 사이에서 난 처녀와 결혼했다. 2차대전 직후 일본에 진주한 미군가족을 위해 프라이팬, 욕조, 화덕 등을 수입 판매해 100만불을 벌었다. 철광석 수입으로 한몫 잡고, 해운회사도 차렸다. 파나마도 진출해, 아이젠버그(주) 본부를 설치했다.

국제 거간꾼 사울 아이젠버그

조갑제는 아이젠버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게 1950년대 이승만 정권 때부터라고 밝혔다. 이스라엘과 오스트리아 이중 국적자인 아이젠버그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같은 나라 출신인 영부인 프란체스카의 귀여움을 받아 경무대를 수시로 방문해 이승만을 자주 만났다는 것이다. 조갑제는 프라이팬이과 욕조나 수입해 팔던 아이젠버그가 한국에서 어떻게 떼돈을 벌었는지 추적했다. <화폐전쟁>(2008, 랜덤하우스코리아)을 쓴 쑹훙빙은 아이젠버그를 “이스라엘 정보부의 국제 거간꾼”이라고 표현했다.

아이젠버그는 한국의 화력발전소나 비료공장, 제철공자 설립에 관려해 설비수입과 차관 알선으로 엄청난 커미션을 챙겼다. 북유럽에서 수입한 대형버스는 우리 국회에서 문제가 됐고, 인천제철의 보일러가 터져 말썽이었다. 이후락, 김성곤은 아이젠버그의 후견인이었다. 3공 시절 서독 지멘스의 전전자교환설비, 호남비료공장, 영월화력 2호기, 부산화력 3,4호기, 영남화역 1,2호기, 동해화력 1,2,3호기, 동양, 한일, 쌍용, 고려시멘트, 인천화전, 일신제강 등등에 개입해 아주 나쁜 조건의 차관으로 이문을 챙긴 악질 고리대금업자였다. (279쪽)

권력과 자본이 거덜 낸 나라경제

조갑제는 아이젠버그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이젠버그와 연결된 권력실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한국의 천민재벌들도 물고 늘어진다. 이후락과 당시 재벌들의 혼맥을 파악한 뒤 석유 수입과 판매 과정에서 이들이 해먹은 돈을 구체적으로 계산했다. 조갑제는 이들의 검은 혼맥은 ‘국민경제의 희생’을 불러왔다고 결론내렸다.

이후락의 장남 이동진(47년생, 호남정유를 거쳐 LG정유가 된 흥국상사 서정귀 사장의 사위), 차남 이동훈(48년생, 한화 김종희의 사위, 지금 한화그룹 회장 김승연의 매형), 외동딸은 정화섭과 결혼했고, 3남은 현재 최태원 SK 회장(유공)의 사촌매형이 됐다. (288쪽)

(한국에 석유를 판 따개비 모양의 로고를 한) ‘걸프’는 한국에 투자한 1963-80년까지 17년 동안 투자액의 14배인 4억267만5천 달러를 남겼다. 걸프의 해외투자 사상 일찍이 이런 노다지는 없었다. 기자(조갑제)가 알아낸 1963년 6월25일 한국 정부와 ‘걸프’가 서명한 기본협정의 도입 원유가격 산정기준을 보면 같은 종류의 원유라도 일본보다 평균 10% 이상 비싸게 한국에 팔았다. 문제는 미 석유사 폭리를 시정하려는 노력이 정부차원에서 진지하게 나오지 않았다. 걸프 등 미 석유사에 대한 견제를 어렵게 한 사람은 이후락 서정귀씨 등이다. 혼맥과 검은 돈으로 석유재벌과 굳게 유착된 이후락은 그들의 수문장 역할에 충실했다. 걸프가 벌어간 떼돈은 모두 우리나라 소비자들 호주머니에서 나간 것이지 이후락 씨의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에서 지출된 것은 아니다. 미 석유사에 대한 이후락씨의 역할은 ‘미국 이익의 옹호자’란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석유회사와 권력이 유착함으로써 국민경제가 희생됐을 뿐 아니라 미국 석유회사로부터 받아낸 자금은 우리의 정치문화를 굴절, 왜곡, 황폐화시키는 데 이용됐다. (300쪽)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미국에 대한 조갑제의 1988년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나온다. 이 책 144쪽에는 87년 직선제로 치러진 한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미국 관료의 발언이 실려 있다.

조갑제의 미국 생각

  아미티지
리처드 아미티지 미국 국방성 차관보는 1988년 3월16일 미 하원 군사건설공사에 관한 세출소위 청문회에 나와 “17년만에 처음으로 한국서 대통령이 민주적으로 선출됐다. 이건 미군이 그곳에 주둔해왔고, 그 배후에 민주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방패를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주한미군들은 자신들이 한국의 민주화 까지도 돕고 있다고 확신한다. (144쪽)

“주한미군들이 스스로 한국의 민주화를 돕고 있다고 확신한다”고 쓴 조갑제의 글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뒤 문맥으로 본 조갑제의 머리 속은 이런 주한미군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투다. 그런데 ‘리처드 아미티지’란 이름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아미티지가 최근에도 한국을 자주 방문해 여러 신문에 얼굴을 비치는 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2000년대 아미티지의 활동상은 아래와 같다.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 北 연내 핵실험 강행할 것>(조선일보 2006.9.22), <아미티지 김정일 중병땐 북한군이 실권 장악>(조선일보 2007.6.28), <아미티지 북, 계속 조건걸어 핵 포기 않을 것>(조선일보 2007.4.30) 등으로 조선일보에 지금도 이름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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