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정책과 도시빈민

[우리사회의 빈민운동사](8)

마침내 한국 사회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이 단일 후보로 내세운 김대중 씨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됨으로써 최초의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었다. 당시 김대중 정권은 대외적으로 외환위기 극복과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병행 발전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당선직후 부터 국정 전반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임기 중 소위 햇볕 정책이라 할 수 있는 남북 화해 협력 정책을 추진하여 남북 교류를 크게 확장시켰다. 처음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고 남북 이산가족이 만나는 등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외형적으로도 빈곤정책은 과거 정권과는 다른 혁신적인 정책이 들어섰다. IMF 이후 확산된 실업과 빈곤 문제 해결에 있어서 최후의 안전망이라 할 수 있는 공공부조, 즉 과거의 생활보호제도를 통해서는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기존의 생활보호제도가 18세 미만과 65세 이상의 연령의 폐질자나 임산부와 같은 근로무능력자로서 부양의무자가 없는 제한된 계층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근로능력을 갖췄으나 근로 기회를 상실한 빈민들의 생활보장에는 해결책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김대중 정권은 실업과 빈곤에 따른 위기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고 이에 따라 ‘생산적 복지정책’이 도입하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임기 내내 97년 이후 경제위기에 따른 대중적 불만을 정권의 지지로 전환하는 데에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통한 경제성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보통 신자유주의 정책아래서는 사회복지나 공공서비스의 축소가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나 김대중 정권시기에는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전문가 집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결국 2000년대 김대중 정권하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이하 기초법)는 기초법연대회의 소속의 일부 시민단체의 합의를 통해 ‘부양의무자기준과 조건부수급조항 도입, 소득기준과 재산기준의 구분’ 등의 문제를 잠재한 채 2000년 10월부터 제정이 이뤄진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기초법은 수급권 자격의 엄격한 제한으로 말미암아 그 사회적 보장의 실효성은 대단히 미비한 상태였다.

한편 사회적 빈곤문제는 기초법의 도입과 시행을 통해 한쪽에서는 이를 성과로 받아들이는 시민단체 측과 실업과 지역복지운동이 활성화되고 수급권운동에 관심이 고조되지만 또다른 한쪽에는 소위 빈곤인구 천만명 시대라는 당면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의 시민단체 주도의 반(反) 빈곤운동의 영역을 넘어서 새롭게 빈곤문제에 관심을 갖는 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반(反)빈곤운동 진영에서는 기존의 시혜적인 법과 제도의 부분적인 재편만으로 전개되는 빈민, 빈곤운동은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는 계기가 기초법의 제정 과정을 통해 마련되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2001년 ‘복지’의 영역을 운동의 영역으로 확장하려는 ‘민중복지연대’가 구성되었다. 2001년 하반기에 제 사회단체들이 함께 추진한 민중복지 한마당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보건의료, 장애인운동, 실업자운동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이 되기도 했다. 사흘 동안 열린 이 행사를 통해 각 조직의 상황과 투쟁의 요구를 정식화하며 반빈곤 운동의 새로운 연대를 모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최옥란 열사추모제에 놓여있는 영정사진

한편, 2001년 12월 장애인이자 노점상이었던 최옥란 열사의 죽음은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 정책과 기초법이 허구적임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최저생계비의 본질을 자각하면서 최저생계비의 현실화를 위한 본격적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노동권과 생활권 운동의 연대를 위한 시초가 되기도 했다. 이 밖에도 건강보험에서의 노동자 부담의 증가 문제와 고용 보험이나 산재보험과 같은 수급권 제한의 문제 그리고 국민연금의 자본축적 수단화 등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부동산 대책에서도 과거 독재정권보다 건축규제 완화가 가속화 되면서 주거생활권은 여전히 심각하게 위협을 받게 되었다. 더불어 공교육의 파괴와 사교육비의 증가로 말미암아 가족의 위기 등이 김대중 정권 아래서 폭넓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사회의 정권교체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반 계급적 한계가 드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뉴타운 정책과 철거민

한편 우리사회의 재개발정책의 변화를 살펴보면 60년대 ‘철거정비와 집단이주’ 그리고 시민아파트건립의 정책에서 70년대 ‘주택개발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등장하였고 ‘도시재개발법’이 제정되어 불량주택 재개발 사업이 제도화 되었다. 이후 80년대 합동재개발사업을 거쳐 90년대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등장하였다. 그동안 재개발 정책은 법과 제도적인 측면에서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 못하여 정책입안과 관리에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을 2003년부터 시행하게 되었고 이법에 따르면 ‘주거환경개선사업’은 전과 동일하고 ‘주택재개발사업’ 은 정비기반시설이 열악하고 노후, 불량건축물이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사업이며 ‘주택재건축사업’은 정비기반시설이 양호하나 노후 불량건축물이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환경개선을 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사업이다.

이밖에도 ‘도시환경 정비 사업’은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으로써 토지의 효율적 이용과 도심 또는 부도심 등 도시기능의 회복이 필요한 지역에서 도시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사업으로 정의 내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재개발 정책은 사회적 형평성이 미흡하여 가옥주의 경우 어느 정도의 재산증식을 가져 오지만 중대형 아파트 위주로 공급이 되면서 주택가격증가로 자금 부담을 느끼게 된다. 영세조합원이나 세입자는 경제적 부담 때문에 재정착을 하지 못하거나 고밀도 개발로 도시의 정상적인 성장을 막고 주변지역과 부조화를 이루는 경우도 많다.1)

역대정권에 의해 추진됐던 도시개발정책은 많은 국민에게 개발은 성장이며 발전이라는 믿음으로 전파되어 왔다. 이는 느림은 퇴보요 게으름으로 빠름은 근면과 성실함 그리고 발전이 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어느덧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국민성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사회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돼서 당장 눈에 보이는 개발정책을 수립하고 빠른 속도로 집행하는 정치가야말로 유능한 정치가라는 믿음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속도전이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와 병폐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최근의 개발관료와 자본은 환경과 문화 복원이라는 시대적인 명분을 앞세워 새롭게 개발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밖에도 공공과 민간의 동반관계라는 이름 아래 건설자본에 용적률과 건폐율, 토지가, 조세 등에서 ‘유인책’을 제공하여 개발에 소요되는 재원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개발을 확대시켜 나가고 있다.

2천 년대 들어 철거민투쟁은 위와같은 환경과 문화의 복원을 명분으로 포장되어 진행되고 있는 신개발주의를 배경에 깔고 정책적으로 뉴타운과 같은 대규모주택 건설 사업을 통해 개발 사업들을 진행하고 있다. 이것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도시재정비촉진을위한특별법’이 2006년 7월부터 시행되었다. 이사업으로 최근 서울시 35개, 경기 13개 등 전국 60 여 지역이 뉴타운 및 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울 ,수도권 20여 곳에 추가지정을 추진 중에 있다. 또한 서울에서만 재개발 299개 구역, 재건축 266개 구역이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이다. 2)

뉴타운사업이란 종전의 소규모 개별사업을 광역단위(생활권 단위)의 계획으로 넓혀 공공에서 수립함으로 공공부분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기존의 다양한 도시개발방식을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차별화 된 정책이다. 그러나 서울 강북지역의 뉴타운개발 계획으로 10만 명 이상의 세입자와 도시빈민이 사실상 강제로 이주되는 상황이며 이 밖에도 건설경기를 살리고 개발의욕을 높이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분양가에 대한 공개 없이 사업을 추진되고 있고, 건축 관련법을 바꿔 4대문 안에 용적률을 높이는 방법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정작 개발의 당사자이자 수혜자여야 할 거주민 등 이해당사자들은 배제가 되고 분양가의 불법책정, 개발이익독점 등으로 주택공사를 비롯한 공기업과 건설자본의 이익을 극대화 하며 진행되고 있다.

이밖에 가수용단지를 조성하게 되면 임대주택 입주자가 많아지면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30-40억여 원의 철거용역비용을 들여서라도 폭력적인 강제철거를 통해 신속히 공사를 강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이주대상비로 지급되는 3-400만 원의 3개월분의 생계비는 실질적인 이주보상비가 되지 못하고, 개발 이후에도 부동산 투기와 개발이익의 사회 환원 미흡으로 집값이 상승하기 때문에 원거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있다. 덩달아 재개발지역 인근의 집값 역시 상승하여 토지 소유자 중에서도 해당지역에 재입주하는 비율은 10%-20% 넘지 못하는 상황이다. 더불어 개발 이후 제공되는 임대아파트 입주세대와 분양아파트 입주세대 간의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잠재적 갈등도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결국 개발지구 주민들은 도심외곽의 더 열악한 주거환경지구에 내몰리는 악순환이 거듭하는 것이다.3)

김대중 정권시기 철거민 투쟁

한편 김대중 정권은 토지공개념을 도입하고 주택공사를 임대주택 건립의 전담기구로 전환하는 등을 골자로 ‘ 무주택 서민들을 위한 ’ 토지 주택정책을 펼 것을 대선 공약으로 발표하였다. 구체적으로 매년 50만호씩 총 250만호의 주택건설을 계획했으며, 주택 보급률 110% 달성과 1가구 1주택제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선보였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출범과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펴가며 ‘건설자본가들을 위한’ 개발정책으로 급선회 하였다.
주택건설 민영화와 주택분양가 자율화는 건설자본가들에게 무한이윤을 보장하였고, 그에 비해 개발지역내 임대주택 의무비율제 폐지는 서민층과 빈민층의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무산시켜다. 정권의 이러한 무계획과, 무대책의 개발정책은 또다시 철거민의 급증을 초래 하였던 것이다.

- 국민의 정부 취임과 도원동 강제철거

국민의 정부의 취임과 함께 터진 대표적인 철거민 투쟁이 도원동 강제철거다. 1998년 4월 27일 소위 국민의 정부인 김대중 정권이 취임하고 얼마 안돼 서울 용산역에서는 전철연 소속 회원 30여명이 용산구 재개발 지역에 대한 당국의 강제철거에 맞서 항의집회를 개최하였다. 철거민들은 서울 용산구 도원동 재개발지역 안에 망루를 세워놓고 한달 남짓 생 라면으로 끼니를 이으며 철거에 맞서 싸워왔다. 그러다 4월 23일 경찰은 합법적인 법집행이라는 이유로 농성자 30명 전원을 연행해 최광식 씨 등 5명을 특수 공무집행방해로 구속하고 나머지 25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미 이 사건이 있기 직전 용산구 도원동 용역철거반원에 의해 얻어맞아 세입자 두 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세입자만 무더기로 구속되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4)

당시 이범휘(61세 남)는 지역 내에서 경비를 서던 적준(주) 철거용역들에게 붙들려 2시간동안 살인적인 구타를 당하여 전신골절을 당했으며 백석호(28세 남) 씨는 전신 3도의 화상을 당하는 고문을 당해 1급 장애자가 되었다. 서울 용산구 도원동 재개발지역의 철대위는 생존권 차원에서 철거이후의 가수용 단지 설립을 요구하였으며 이 투쟁을 엄호하기 위해 대책기구가 구성 되어 김대중 정권에 항의하고 해결책 마련에 고심했다. 그러나 도원동 철거민들 에 대한 강제철거에서 알 수 있듯이 국민의 정부아래에서도 폭력적인 강제 철거는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5)

- 수원시 권선 4지구 투쟁등 철거민 탄압사례

이밖에도 수원시 권선구 곡반정동에 위치한 권선 4지구도 당시의 커다란 철거민 투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대, 삼성, 한솔, 등 13개 건설업체가 시공업체로 참여하는 토지구획정리 사업지구로 지정돼 1998년 6월부터 철거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자 철거민들은 98년 2월부터 ‘영구임대주택 보장 및 가수용 단지 보장’을 요구조건으로 내세우며 망루를 세워 농성을 전개 하였다. 그러자 1999년 5월부터 약 두 달간 수원시 권선 4지구 주변에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차단하고 강제철거를 감행하였다. 이에 맞선 철거민들의 투쟁도 치열했다. 대외적으로 이 싸움은 철저히 고립되어 전개되어 갔다고 특히 언론에서는 ‘군요새식 농성망루’ ‘인마살상용 전투무기’ ‘도시게릴라’ 등의 표현을 써가며 철거민과 농성자의 요구사항은 철저히 무시한 채 철거민들을 철저히 매도하였다. 결국 소위 외형적으로는 이 땅이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철거민들의 생존권은 이는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망루 농성자 13명과 전철연 남경남 의장과 경철연 고천만 의장 등 총 15인이 구속되었다. 6)

이와 유사한 사건들은 계속 이어졌다. 1999년 2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엄동설한에 경기도 안양시 유진상가건물 전체를 싹쓸이하는 철거를 강행하는 도중 철거민 1명이 쇠파이프에 맞아 잇몸이 함몰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1998년 5월에는 택지개발 예정지구인 김포시 신곡리에 철거용역반 2백여명이 동원되어 철거민 백도근 씨의 대퇴부가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고 대수술을 받아 평생장애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되었다.

이밖에도 2002년 월드컵 주경기장을 건립한다는 이유로 97년 상암 택지개발지구로 지정이 되었으며 99년부터 개발 사업이 본격화 되자 서울시청과 도시개발공사는 철거깡패들을 동원하여 지역을 원천봉쇄 하며 철거를 자행하였다. 이밖에 2002년 동절기에는 철거용역반원과 공권력 약 2천여 명이 동원이 되어 동절기 불법철거를 강행 하였다. 철거에 항의해 민주당사에 항의 차 들어간 이동수씨 역시 구속되어 1년 6월의 실형을 선고 받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김대중 정권 들어서 실질적으로는 세입자를 비롯한 원 거주민, 이해당사자를 배제된 ‘사람’이 아닌 ‘시장중심’이자 ‘자본 중심’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7)

유통센타의 확산과 노점상

1990년대 들어서 노점상 단속 중 새롭게 주목할 부분은 전국적으로 대규모 유통센터의 확산을 들 수 있다. 특히 경기도 수도권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방상권이 크게 늘어난 것이라 할 것이다. 백화점 등의 대형 유통시장이 1980년대 이전에도 존재했었지만 당시에는 주로 중산층 이상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유통구조에 머물렀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 대형 쇼핑몰과 대형 유통 마트 등이 등장하면서 이들은 소비자들을 상대로 엄청난 물량 공세와 함께 저렴한 가격과 다양한 물품 등으로 서민들을 유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통시장의 변화는 동네 재래시장은 물론 슈퍼나 구멍가게들 까지 몰락하는 사태를 가져왔다.

대형 유통마트의 등장은 영세유통구조의 몰락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쇼핑몰 주변의 노점상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으로 이어졌으며 이곳들은 절대금지 구역으로 묶이기도 하였다. 특히 재래시장 주변의 노점상들은 민원과 기존 상인들과의 갈등으로 왜곡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IMF 구제금융 이후 정리해고와 실업으로 말미암아 잉여 노동력들이 대거 노점상으로 유입되기도 했다. 따라서 거의 배 이상으로 노점상들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노점상의 증가는 당시 노점상 단체 회원의 증가로 이어졌으며 회원이 늘어남과 동시에 그만큼 단속의 빈도도 높아져만 갔다. 철거와 마찬가지로 강제단속은 김대중 정권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서민생활 향상과 실현의지를 위한 기획단’을 출범시키고 ‘노점상 등 도시자활 부문의 제도정비’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단속은 단속대로 계속되었다. 역대정권이 단골로 써먹는 ‘노점 단속을 하지 마라’는 언론 플레이도 김대중 정권 들어 단골메뉴로 등장하였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노점상들의 일말의 기대가 없었던 아니지만 오히려 강화된 단속에 노점상들의 저항은 곧 바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 대전역 노숙인의 벗 윤창영 열사

1999년 7월 7일에 대전시 동구청의 무차별적 노점단속에 항의하던 노점상 윤창영(남 42세) 씨가 분신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전역 지하도 한쪽에서 허리띠와 라이터 등을 판매하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던 윤창영 씨는 1급 장애인이었다. 그는 대전 역 근처의 노숙인들에게 형으로 불리우는 사람이었다. 그조차 적은 수입으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 나갔지만 그는 수입의 일부를 자신보다 어려운 노숙인 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다니던 교회를 통해 노숙인 들을 도와주거나 자신이 직접 나서서 헌신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단속에 항의하고 분신을 감행한 윤창영 씨는 충남병원에서 곧바로 서울의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6백만원의 보증금이 없어서 하루 동안 방치되어있다 시피 하였다. 결국 타들어가는 분신의 고통 속에 운명하였다. 윤창영 열사가 운명하자 대전지역의 시민사회, 종교단체가 모여 ‘故 윤창영 열사 분신사망 진상규명 및 민중생존 대책위원회’을 구성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뜨거운 여름날 대전시는 80년대 6월 항쟁과 같은 커다란 투쟁이 도심에서 계속 이어졌다.

결국 약 열흘 만에 대전시 동구청으로 하여금 사과와 유가족 보상을 받아 내게 된다. 이 사건은 도시빈민의 분신사건 중 보기 드물 게 단시일 내 커다란 성과를 얻어낸 사건으로 ‘대전지역 노점상연합회’의 결성과 지역사회단체의 연대를 굳건히 한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이후 김대중 정권은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을 존중한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집권 2년을 지나는 시점부터 당시 검찰의 파업유도 사건 그리고 공안 대책협의회 구성 이밖에도 집시법 개악 등 일련의 보수적이고 반 인권정책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실패한 재벌정책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김대중 정권의 반민중적인 속성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와 노점상


- 2002년 월드컵경기와 박봉규열사 투쟁

언제나 그랬듯이 우리사회에서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는 정권의 치부를 포장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는 암울한 정치현실을 뚫고 4강이라는 신화를 낳게 되었으며 그 열풍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러한 문화가 세계에 소개 되어 한국의 브랜드가치를 한 단계 높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월드컵 경기가 전개되면서 수많은 노숙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배제 되었으며 이들의 목소리는 국민적 축제에 묻힐 수 밖에 없었다. 노점상에게는 국제적인 행사 때마다 반복적으로 진행되던 단속이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특히 외국의 선수단과 관광객이 묶고 있는 호텔과 주요 대로변의 노점상들은 월드컵이라는 국제적인 행사기간에 장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소위 붉은 악마로 상징되는 월드컵 열풍이 커질수록 노점상들의 생계는 철저하게 박탈되었다. 월드컵 행사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제적인 행사들 (2010년 하반기 치러질 G20과 같은 국제행사)들은 분산된 국민들의 의식을 하나로 통합하여 또 다른 국가주의와 폐쇄된 민족주의로 경도될 가능성 또한 배제 할 수 없었다.

당시 노점상들은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는 문제의식아래 다양한 기획들을 준비하였다. ‘한판붙자’ 라는 구호를 걸고 연세대에서 빈민문화제를 개최하고 곧바로 서울시를 상대로 토론회를 제안하였다, 그리고 당시 국제노점상연합과 같은 기구를 통해 각국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적극적인 항의를 조직해 나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당시 이러한 투쟁에 찬물을 끼얹는 세력 또한 있었다. 당시 현 전노련의 이필두 씨가 이끄는 또 다른 노점상 단체는 월드컵경기 기간에는 장사를 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하였다. 하지만 당시 김흥현 씨가 이끄는 전노련은 과거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전개된 단속에 맞서 6월 13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집결하여 적극적으로 항의를 했듯이 2002년 한일 월드컵 경기아래 자행된 노점상 단속에 맞서 ‘노점상이 축구공이냐’ 라는 구호를 내걸고 6.13대회를 개최하여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거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월드컵 경기가 끝난 이후에는 도무지 단속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추진하던 ‘청계천 복원공사’ 가 중구지역 노점상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가 청계천 복원공사 계획을 발표하면서 서울시 중구 지역을 중심으로 단속이 확대되기 시작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또 다시 분신 사건이 터져 나온 것이다. 2002년 8월 23일 오후 3시 20분경 중구 청계3가에서 장사를 하던 노점상 박봉규(63 남) 씨가 중구청 구 청장실에서 휘발유로 끼얹고 분신을 시도하여 전신 80%의 3도 화상을 입고 영등포 한강성심병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9월 6일 결국 운명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봉규 열사는 1남4녀의 가족의 가장으로써 오랫동안 청계3가에서 공구를 팔아 생계를 이어왔다. 그동안 수차례 물건을 빼앗기는 등 단속에 시달려왔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앞으로 “서민을 돕겠다던 공약을 왜 지키지 않는가?” 라는 내용의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박봉규 열사의 죽음은 서울시가 월드컵을 앞두고 '가로 정비 및 노상 적치물 관리'에 입각하여 용역반 공개 입찰 등 예산안 책정을 수억 원대로 넓혀 책정하고 월드컵 경기가 끝나자 청계천 복원공사를 추진한다는 계획아래 노점단속을 강행을 하였던 결과였다. 청계천 복원공사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임기 내에 복원하겠다는 무리한 계획아래 수많은 도시빈민들을 생계 터전에서 밀어내는 대가로 복원 되었으며 결국 허울 좋은 청계천 복원신화라는 성과를 등에 없고 이명박 씨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각주)-----------------
1) 박현주. “도시재개발지구의 주거권 운동의 연구”. 한남대학교 사회문화 대학원. 2006년. p23
2)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의 진실 10문 10답 중 2009년.
3) 최인기, "철거민과 비공식부문 노점상, 그리고 서울시의 행정"『안티서울페스티발토론문』2004년
4) 한겨레 1998년 4월 27일
5) 민교협등 주최 토론회, “김대중 정권 1년 자본을 위한 개혁을 비판한다”. 1999.2.26 p74
6) 빈활, "99년 하계 노동자 빈민 학생 연대투쟁 자료집" 1999년, 6P-7P
7) 빈활, “2002 동계 노동자 빈민 학생 연대투쟁 자료집” 2002년, 18P-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