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치소에서 눈물로 맞이한 ‘전노협 창립’

[전노협20년] 지역연대, 우리는 집단으로 진한 사랑에 빠졌다(2)

조합원, 아름답고 무서운 사람들

지역에서는 89임투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단결과 투쟁을 통해 힘있는 공동임투를 결의했고 그 성과로 전노협을 건설해야 한다는 희망찬 역사적 책임감으로 공투는 시작되었다. 어쩌면 지금의 금속노조 탄생에 한 개의 씨앗으로 떨어졌을지도 모를 전자업종모임을 시작했다.

15개~17개 전기전자 업종모임. 그 모임에는 인노협 미가입 노조도 같이했다. 같은 업종이라는 말에 간부나 조합원들이 쉽게 다가올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인 노조는 임금을 모아 평균임금을 정했고 그 적정 수준의 정액 2,487원을 공동으로 요구하기로 했다. 모두가 100%타결을 결의하며 투쟁에 들어갔다. 4공단에서, 작전동에서, 효성동에서, 주안 5,6공단에서 가는 곳마다 ‘2,487원 완전쟁취라!’는 플래카드가 공장 담장을 수놓았다.

우리 노조는 조합원 설문조사에서 임금인상 3천 원 이상이 되어야 적당하다고 다수가 답했다. 이에 대의원과 간부들은 액수도 중요하지만 액수만큼 중요한 연대투쟁에 대해, 교섭도 가능하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하는 이유 등을 교육함으로 조합원을 설득할 수 있었다.

각 부서에서는 전자업종 신문을 만들었고, 대의원들은 조합원들에게 선전했다. 교섭 마지막 단계가 왔다. 교섭일정상 내일부터는 전면파업이었다. 2,487원을 쟁취하지 못하면 무조건 파업이라고, 모든 파업 준비를 끝낸 조합원들은 점심시간 이후 4시간 파업을 하며 교섭결과를 기다렸다. 그 날 교섭대표들은 조합원들과 두 가지를 약속하고 교섭장소로 갔었다. <30분만 교섭한다! 1원도 깍지 않는다!>

회사는 30분이 되자 5분만 더 시간을 달라했다. 7원만 깍아 달란다. 자신들도 사장단 모임에 가서 기 좀 펴자고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다. 7원을 가지고, 5분을 줄 수 없어 파업에 들어가야 하는가? 교섭대표들도 고민 끝에 5분을 더 주기로 했다. 회사는 정확히 5분 후에 왔고 도장 찍자고 했다. 2,487원과 교섭과정의 모든 것들에 대해 서로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분위기 좋게 악수까지 하고 교섭을 끝냈다.

  인노협신문 1989.3.8일자 첫번째 지면 [출처: 한내]

그런데 아뿔사! 4시간 파업을 하며 정문에 모여있던 조합원들에게 교섭보고를 하려 단상에 올라섰을 때 분노에 찬 조합원들의 싸늘한 눈빛과 분위기와 마주해야 했다.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데 한 간부가 울먹이며 외쳤다.

“어떻게 교섭대표도 우리를 속여요? 우리가 그런 지도부를 믿고 투쟁한 것이 맥 빠져요!”
그랬다. 그 5분! 사실 돌아와 조합원들에게 물었어야 했다. 5분을 더 줘도 되는지. 결국 우리의 요구액은 100%달성했지만 그해 임투는 그 놈의 5분 때문에 꽝이 될 위기에 처해있었다.

사실 변명 같지만 그 당시 5분 말미와 7원을 가지고 파업하기란 곤혹스런 일이었다. 그렇지만 교섭대표들이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은 분명했다. 조합원들 앞에서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사과했지만 도무지 힘없는 박수조차 나오질 않았다. 결국 위원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하겠다고 밝히고 진심으로 사죄한다고 했더니 그때서야 박수치며 사퇴는 없는 걸로 하자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무서운 사람들을 그 뒤로 본 적이 없다.

우리 사업장 임투가 끝났지만 임투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인노협을 중심으로 한 공동임투’, ‘전자업종 똘똘 뭉쳐 2,487원 쟁취!’를 위해 조합원들은 집단조퇴, 전체 교육시간 등을 이용해 미타결 노조 지원투쟁에 나섰다. 공장의 벽을 넘어 지역과 업종으로 뭉쳐 전노협 건설하고 노동해방 이룩하자고 다른 노조와 연대하여 공단과 거리를 헤집고 다녔다. 모두가 하나였고 모두가 행복했다. 집단으로 진한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구치소에서

현장순회를 끝내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상근자회의를 간단히 했다. 뭔가 예견이라도 한 것일까? “우리가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니 조금씩이라도 저축을 하는 것이 어떨까? 당장 해고되면 월세도 못 내잖아. 그리고 일상활동을 강화해서 전 조합원을 간부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친구이자 사무장이 90년 새해 계획을 제출했다. 부위원장과 나는 이견 없이 좋다고 했다.

9시경 회사 정문을 나섰다. 인노협 실무자회의와 운영위원회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회사 정문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그 당시 인노협 노조였던 대양전기, 대우정밀, 동성상공, 코스모스를 지나면 버스정류장이 나왔고 왼쪽으로 가면 대우자동차와 심익악기가 서로 마주보는 개천이 흐르는 짧은 뚝길이 나오는데 그곳을 지나면 갈산동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갈까, 왼쪽으로 갈까, 가방은 놓고 회의자료만 가져갈까, 회의자료는 가서 보고 놓고 갈까, 이렇게 대여섯 번을 노조와 정문에서 서성이다 가방은 놓고 회의자료 한 장 돌돌 말아들고 오른쪽 공단 쪽을 택해 걸었다.

3분쯤 걸었을까 느닷없이 건장한 청년 셋이서 내 양팔을 잡고 한사람은 입과 눈을 가리고 검은 승용차에 태웠다. 그 길이 영영 명성노조로 돌아갈 수 없는 길이었음을 내 마음은 알았나보다. 그렇게도 정문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던 걸 보니...

그때가 1989년 12월 말이었을 거다. 그렇게 인천대공분실로 연행 돼 1990년 1월 7일 학익동 구치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국가보안법이었고 그들은 나를 8개월 동안 미행했다고 했다.

“하루 아침에 들이닥친 싸움이라 막막하기만 합니다. 아침마다 머리채를 휘어 잡히고 구둣발로 걷어 채여 시퍼렇게 멍이 들어 목욕을 못갈 정도이고, 회사에서는 평택으로, 수원으로, 고향집으로 끌고 다니며 사직서를 강요했고, 더 심하게는 관을 만들어 그 속에까지 집어넣었지만 이미 시작된 싸움 끝내는 승리하리라는 각오로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민주노조를 사수하고 다시금 인노협과 며칠 후면 건설될 전노협에 중심적 역할을 해야지요. 언젠가 치러야 할 일, 지금 한다 생각해요. 보고 싶고, 걱정되는 맘 서로 마찬가지겠지요. 반드시 우린 가진 자들의 횡포를 깨부수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우리들도 부둥켜안고 울고 웃을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열심히 투쟁합시다.”

노조 교육부장은 구속 된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저벅 저벅 밤새 군화발 소리, 끌려 나가는 조합원들의 비명소리, 절대로 잡혀가면 안 된다고 사무장과 부위원장을 꼭꼭 숨겨놓고 인간벽을 만들었던 조합원들이 2개 중대 전경차에 실리는 비명소리가 내가 경찰에 연행당하는 그 순간보다 더 고통스러웠어!”

나 구속되고 위원장 석방투쟁을 하다 구속된 사무장이 내가 있는 병동을 지나며 살짝 귓가에 남겼던 말이 지금도 어제 일만 같다.

그 속에서 명성 조합원들은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우리 노조가 깨지면, 회사가 문을 닫으면 우리가 갈 곳은 또다시 공장이다. 거기서 우리가 노조를 만들면 된다. 지금은 명성노조가 하나이지만 우리가 모두 흩어져 다른 공장에 가서 노조를 만들면 450개가 된다는 확신이었다.

눈물로 맞이한 전노협 창립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은 그렇게 탄생했다. 많은 노동자들의 분신과 죽음, 구속, 수배, 해고와 기나긴 농성투쟁, 그리고 차가운 바닥에서.

휑하니 찬바람이 창살 틈으로 기어들어 오던 날,
조용히 손을 깍지를 낀다.
제발, 제발 성공하기를 기도하고 기도한다.
7방, 8방에 있는 사무장과 홍보부장은 큰 소리로 부른다.

“우리 오늘 전노협 창립대회 그 역사적인 자리에 가지 못하지만 단식으로 기쁨을 나누자. 지금부터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결성식을 자축하며 묵념합시다.....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 ”

혹여 저들의 봉쇄로 창립총회가 무산될까 가슴 조이며.
이렇게 우리 셋은 학익동 구치소에서 뜨거운 감격의 눈물로 전노협 탄생을 자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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