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논쟁 수준이 얼마나 천박했던가

[낡은책] 한국논쟁사 4 - 사회.교육편 (손세일 편, 청람문화사, 1976~78)

[사상계] 편집장과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손세일은 1960.70년대 한국 지식인 사회의 주요 논쟁 글을 묶어서 이 책 한국논쟁사(청람문화사, 1976) 5권을 내놓았다. 1권은 역사와 철학과 종교를, 2권은 문학과 어학을, 3권은 정치와 법률과 경제를, 4권은 사회와 교육을, 5권은 예술과 민속분야의 논쟁을 묶었다. 여기서는 ‘사회와 교육’분야를 묶은 4권을 소개한다.

이 책에는 지식인의 고뇌가 담겨있기 하지만 우리의 논쟁 수준이 얼마나 천박했는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4권의 주제인 ‘사회’는 해방 이후 최초의 한국사회구성체론(사구체)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사구체 논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의 고려 시대가 최초였겠지만.

60년대의 글이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낡은 표현들이 많아 당사자의 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최소한으로 문장을 가다듬었다. 4권에 실린 3종류의 논쟁을 소개한다. 첫째는 1965년에 신동아와 사상계 지상에서 벌어졌던 고영복(당시 이화여대 교수)과 이효재(당시 서울여대 교수)의 <한국 사회구조>논쟁이다. 두번째는 1967년에 잡지 <정경연구> 지면에서 벌어진 송건호(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과 안해균(서울대 교수)의 <한국 지식인의 역할논쟁>이다. 마지막으로 1960년 4.19 직후 대학가에서 벌어진 어용, 무능교수 퇴진투쟁을 둘러싸고 당시 연세대 교수로 있던 최재서와 장덕순 두 사람의 <대학의 위기> 논쟁이다.

한국 사회구조를 어떻게 볼 것인가 (1965년)

고영복은 1928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나 54년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하고 62년 이화여대 교수였다. 이후 고영복은 서울대로 옮겨 정년퇴직했다. 이효재는 1924년 마산에서 태어나 47년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하고 57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원을 나와 논쟁 당시엔 서울여대 교수였다. 이후 이효재는 68년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로 옮겨 정년퇴직했다.

  고영복, 이효재 선쟁의 모습

고영복과 이효재 두 사람은 아직 살아 있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아직 학문의 길에 남아 있다. 고영복은 2002년부터 사회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1981~82년 현대사회연구소 소장과 1994년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초대원장(차관급)을 지냈다. 1992년엔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주의(사회문화연구소)를 썼다.

이효재는 여성사회학의 선두주자로 초대 여성민우회 회장을 지내다가 지금은 목사였던 아버지가 일했던 진해에서 경신사회복지연구소 소장으로 일한다. 이 교수는 광주항쟁 때문에 1980~84년까지 이대 교수에서 해직됐다. 복직한 뒤 1987~90년 여성민우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90~92년엔 여성단체연합 회장을 지냈고, 정대협 공동대표를 거쳐 1996년부터 진해로 내려갔다. 1985년 한국 여성노동사 연구서설과 90년 한국 가부장제의 확립과 변형, 94년 이데올로기와 가족, 95년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가족 등의 논문을 썼다. 연구를 하고 싶은 욕심과 지역사회를 위한 조사연구를 위해 서울을 떠났다. 해방 직후 진해에서 고아원을 시작한 아버지(고 이약신 목사)의 전기를 집필 중이다.

해방 이후 급작스레 개방체제로 바뀌고 ‘전통’은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온 서구의 ‘근대’와 불가피한 충돌과 마찰이 있었다. 신동아의 권두논문으로 실린 고영복 당시 이대교수의 <한국 사회구조의 분석>은 우리 사회구조가 어디에 와 있는가를 진단했다. “근대화로 이행과정에 있다”는 가설에서 시작해 우리 사회가 과도기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추적했다.

반년 쯤 지나 당시 이효재 서울여대 교수가 사상계에 고영복의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 “접근방식의 잘못 때문에 현실을 잘못 인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하면서 ‘부정과 부패현상’을 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해 “우리 사회구조를 낳은 근본 원인인 ‘빈곤과 궁핍’”을 통해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영복은 동아일보에 ‘한국사회구조의 분석 재론’을 실어 “자신의 오판을 필자의 실책으로 돌린다는 것은 실례”라고 주장하며 이효재의 견해를 반박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이효재가 재반론을 제기하지 않아 끝났다. 나는 이효재 교수쪽에 좀더 점수를 주고 싶은데 재반론을 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이 논쟁은 구미의 사회과학 방법론을 한국적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 우리나라 사회구조의 분석을 둘러싼 접근방법에 대한 학술적 논쟁이다. 사구체 논쟁의 원형쯤 될까 한다.

한국 사회구조의 분석 (고영복, 신동아 1965년 2월호)

우리 사회구조의 목표를 근대화로 설정하고 그 가설의 성립을 위해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모순을 여러 측면에서 지적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사회구조가 어떠한 것인가’의 전망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우리가 살지 못해 허덕이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사회구조도 파지(破紙) 투성이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런 모순의 사회구조를 꿰뚫어 보고 개선의 전망이 없이는 건전한 사회란 백일몽에 그치고 만다는 사실을 특히 정책입안자들에게 충고하고 싶다.

우리의 사회구조는 누구에게 가장 유리한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한국의 사회구조가 외국인이나 상류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바라고 환영하는 사회구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제도적으로도 상호간에 불신이 없는 일치점을 찾도록 하고 그 원리가 민중에게 뿌리박아서 호응을 받도록 체제화해야 한다.

한국사회학의 과제 - 고영복씨의 ‘한국~’을 비판함 (이효재, 사상계 1965년 8월호)

사회학자의 궁극적 관심 연구과제는 ‘사회구조의 분석’이다. 한국사회학계는 지난 몇 해 동안 여러 종류의 사회조사를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그러나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데 좀 더 비판적이고 이론적 뒷받침이 있는 개념체계가 부족하거나 수집한 자료를 무책임하게 해석하는 문제가 있었다.

우리도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적 구조를 제시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그러나 인구의 사회경제적 특성이나 사회 여러기관의 제도를 단순히 서술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오히려 일반적 구조 모델을 확립해야 한다는 의욕이 더욱 강하게 든다. 고영복씨의 논문 ‘한국사회구조의 분석’(신동아 65년 2월호)은 “근대화로 이행과정에 있다”는 가정하에 ‘개인’이 지닌 전근대적 또는 근대적 ‘태도’를 고찰하는 자료로 발표했다. 고씨는 후진성에서 조속히 탈피하지 못하고 쓰라린 고통 속에 있는 원인을 개인의 태도적 측면에서 추궁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논문은 우리의 현실을 오히려 잘못 인식하는 결과를 낳았다. 고씨의 불행은 접근방법의 실책에서 비롯됐다.

고씨는 퇴니스와 파슨스 식의 이분화 유형 도식을 본따 전근대성 대 근대성을 표시하는 태도 유형을 5개 측면으로 설정했다. 이것은 정서성 대 공식성, 전통성 대 합리성, 귀속성 대 업적성, 분파성 대 보편성, 권위성 대 평등성이다. 조사결과를 놓고 고씨가 첨가한 해석과 설명이 시사하는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려고 한다.

‘전근대적 태도’를 나타낸 사람은 대학 졸업생이 16.2%, 고교 졸업생이 14.9%, 중학 졸업이 14.4%, 소학(초등학교) 졸업이 30.0%, 국문 해득자가 48.3%이었다. 대학졸업자 중에서 전근대적 태도를 표시한 사람이 고교나 중학 졸업생보다 더 많았다. 소학 졸업자와 그 이하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의 전근대적 태도는 전체 응답자의 80%였다. 이 때문에 고씨는 대다수의 인구가 ‘전근대적 심성하에 있다’고 추정했다. 고씨는 이를 “대학교육에 큰 기대를 걸 수 없다는 경종을 울려주는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해석했다.

우리 사회의 전근대적 성질의 여러 문제를 이렇게 무식대중의 보수성에만 결부시켜 설명한다면 다음의 여러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고씨에게 묻고 싶다. 각 기관 및 조직체를 휩쓸고 있는 정실주의와 권위주의에서 생기는 ‘부정부패’가 사실상 무식자층의 보수성에 연유한 것인가? 사회구조의 전근대성을 개인들이 지닌 ‘태도’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피상적 구조분석이다.

과도기의 개인들은 전근대성과 근대성을 함께 지닌다. ‘태도’를 사회구조의 성질을 측정하는 지표로 삼은 것은 적절치 못했다. 한국식의 혼합적 유형을 오히려 모색해야 한다. 태도에 대한 질문보다는 오히려 개인들의 ‘행동’를 물어야 했다. 현재 우리 사회구조의 성격을 가장 적절히 대표하는 것은 부정과 부패다. 우리는 그동안 한국사회의 부정 부패를 도덕적으로 규탄하며 개탄해 왔을 뿐이다.

우리 대학사회는 아직도 전근대적 정실주의, 파벌주의, 권위주의가 지배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부정 부패를 늘 개탄하지만 우리 자신을 현상에 넣어 투시할 만한 객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민주적 합리주의가 각종 사회기구의 운영을 꿰뚫치 못하고 있다. 그 속의 인간관계가 원칙에 부합하지 않고 편차적 관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현실은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혼합을 이루고 있고, 우리가 모색하는 한국적 혼합형의 적절한 모델을 이루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각종 사회기관내 공적 역할에서 시작해 어떠한 경우에 개인의 대내, 대외적 역할이 공적 입장에서 이탈하는지 또 어느 정도로 이탈하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공식적 원리원칙에 따라 합리적으로 처리해야 할 사무들을 사적 기준에 따라 처리한다. 그러므로 부정과 부패의 현상은 ‘인간관계의 구조적 측면’에서 분석해야 한다. 사회구조를 제시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현 사회구조를 초래한 선행적 사회여건, 즉 독립변수를 추궁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부정과 부패를 흔히 우리의 민족성에다 결부시켜 통탄해 한다. 이는 사회구조의 원인을 ‘민족성이란 심리적 차원’에서 찾으려는 시도 때문이다. 이는 지나친 단정이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온 ‘빈곤’ 상태가 현재 사회구조의 문제을 낳은 근본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빽’과 연줄을 따라 소수만이 행운의 기회와 물질적 혜택을 누리는 ‘비민주적 부정부패’는 사회 제 부문에 걸쳐 빈곤상태를 면하기까지는 우리 사회의 구조를 지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빈곤’을 우리 사회구조를 설명할 선행요소로 본다. 따라서 우리 한국의 사회학을 ‘빈곤의 사회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사회구조의 분석 재론 - 이효재씨의 반론에 답함 (고영복, 동아일보, 1965년 8월5일자)

이효재씨의 논점은 내가 한국사회의 구조를 분석하는데서 ‘태도’ 변수만을 중심에 둔 접근방법이 ‘실책’이라고 꾸짖었다. 또 이씨는 내가 사용한 전근대성과 근대성이란 개념도 이분법적 도식이라서 이상형에 지나지 않고 우리나라와 같은 과도기적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는 것인데 왜 ‘무비판적’으로 사용했느냐고 논박했다.

그는 태도보다는 ‘행동’을 분석 틀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한국 사회구조의 성격은 ‘부정과 부패’이며 부정부패를 낳은 원인은 ‘빈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빈곤을 구조외적 요인이 아니고 구조내적 요인이라고 본다. 이씨는 ‘인간관계의 구조’만을 사회구조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씨가 말한 인간관계적 사회구조는 계층적 구조 속의, 제도적 구조 속의 집단관계에서 일어나는 하위적 개념이다. 그는 “빈곤이 있는 한 부정부패는 불가피하다”는 논조를 끌고 가는데 이것은 위험한 현실 타협이다. 아무리 빈곤해도 정치력만 건실하면 부정부패는 막을 수 있다.


한국 지식인의 역할 논쟁 (1967년)

한겨레신문을 만든 언론인 고 송건호씨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안해균은 1928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54년 서울법대 졸업하고 논쟁 당시엔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였다. 안해균은 에드워드 톰슨의 논문 ‘사회사 방법론’을 처음 한국에 소개한 사람이다.

편집자인 손세일은 두 사람의 논쟁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대상황의 변천에 대처해온 지성의 ‘적응’과 ‘굴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지식인의 오늘의 모습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 당시 조선일보 논설위원 송건호가 1967년 가을 ‘정경연구’에 발표한 <한국지식인론>은 이 문제에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접근을 시도했다. 지식인의 풍토와 상황, 지식인과 지성, 지식인과 현실참여 등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거론하면서 대학교수 특히 사회과학자들의 학문자세를 비판하고, ‘교수들의 학문을 통한 현실참여’를 강조했다.

이에 서울대 행정대학원교수 안해균은 송건호의 교수관과 지식인관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반박했다. 송건호는 재반론 <한국지식인 재론>에서 송씨의 글이 ‘잘 돼 갑니다’라는 라디오 드라마의 제목을 연상시킨다고 비난하면서 안씨의 ‘무감각’을 개탄했다. 후일 두 사람은 “표현이 좀 지나쳐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고 술회했다. ‘상아탑 안주’냐 ‘전문가의 충고’냐의 선택이나 평가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두 사람이 자인했듯이 논쟁의 내용보다는 거친 문투가 더 인상적이다. 어쩜 요즘 우리들의 논쟁과 닮았는지. “그 사람 책 다 읽으나 봤냐”는 식의 시비 거는 형식도 비슷하다. 서로 비문(非文) 투성이의 글을 쓰면서도 서로 “문장 공부나 하라”고 질러대는 것도 요즘과 닮았다. 아무데나 영어 단어쓰는 풍습도 닮았다. 특히 10번쯤 반복해서 나오는 송씨의 ‘어프로치’와 끝없이 이어지는 안 교수의 수동태 문장도 압권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글솜씨에 대한 송씨의 지적은 기분 나쁘고 아프지만 사실이다.

송건호가 <정경연구> 1967년 9월호에 쓴 ‘한국 지식인론’은 장황하게 길지만 결론만 한 문장으로 줄였다. 안 교수의 반론 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안 교수의 반론은 “송건호씨의 한국 교수.지식인관은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한국 지식인론 (송건호, 정경연구, 1967년 9월호)

지식인이 단순한 박식에 그치지 않고 사상가의 자세를 갖추려면 지금 이 땅이 요청하는 과제에 정면으로 대결할만한 용기와 투지를 가져야 한다.

‘한국 지식인론’에 박(駁)한다 (안해균, 정경연구 1967년 10월호)

발표의 모랄(도덕) : 왜 그렇게도 자칭 권위자가 많고 애매하고 논리성을 결한 글이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네임 밸류를 평가 받으려는 동기도 있겠고 값싼 고료를 많이 받으려고 상식적인 글을 길게 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교육기관이라든가 대학교수의 연구활동을 논점의 대상으로 삼을 때는 신중을 기하고 과학적 자료의 분석과 평론에 따르는 책임 있는 글을 체계있게 전개해야 한다.

대학생활 과정에 기초학문의 체계적 이해와 연구방법의 훈련이 부족함에도 불행중 다행으로 지적, 지도적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자신이 발표를 위한 발표보다도 발표 이전에 진지한 연구에 더 시간과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키호테식, 즉흥적 자아확대적 또는 과대망상적인 언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사회과학도의 한 반성 : ‘정경연구’지 9월호는 <한국의 지식인론>이란 주제와 <사회과학도의 한 반성>이란 부제가 달린 장장 30쪽짜리 논문을 실었다. 평소 지상을 통해 아는 송건호씨의 글을 읽어 가던 중 나는 송씨의 지식인관과 사회과학을 논하는 기본 태도와 실태파악이 너무나 객관성과 논리적 체계성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사회과학도인 송씨 자신의 반성이 아니라 송씨 자신이 마치 한국 사회과학의 지도자인양 자신을 착각하고 교수와 지식인에게 훈화라도 하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부제와 본문의 내용간의 큰 모순을 발견했다. 송씨는 한국의 지식인을 왜곡해 파악하고 경멸했을 뿐 아니라 사회과학의 연구현황 실태를 제대로 파악도 못한 채 자기의 주관과 단편적 지식을 체계 없이 다루었다.

‘일그러진 지식’은 없다. : 송씨는 한국의 지식인과 교수를 생활고와 연구비 부족으로 ‘학문의 행상, 어용화, 지적 매소(買笑), 학문의 유행가(流行歌)화’를 주업으로 하는 사람들로 파악했다.(9월호 15~16쪽) 송씨는 “학문의 수준이 지지부진하고 볼 만한 업적이 희소하다”(16쪽)거나 “소신을 권력 앞에 굽혀 권력행동을 합리화시켜 사상과 양심을 지키기 힘들고”(17쪽) “체제의 정당성 합리성을 형성하는 사업 ... 합리화시키는 데 동원되었는데...”(18쪽)라고 말했다. 송씨는 지식인 가운데 “그밖의 사람들은 냉소파로 주로 보신 때문”(19쪽)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교수가 그렇다고 해서 마치 대부분의 교수가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학자가 자기의 이념과 소신을 존중하는 권력층이 좋은 대우를 하겠다고 해서 권력체제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그것이 공공정책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찌 악행과 치행(治行)이 될 수 있으며 어용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송씨가 지적한 것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이미 도태되었을 것이고 대부분 지식인 교수는 아직 건재하다. ‘일그러진 지식인’은 대학사회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학문의 유행가수는 신문 잡지 라디오 TV와 같은 매스미디어에서나 찾아볼 수 있지만, 진지하고 엄숙한 가운데 이념과 양심만이 지배하는 강의실 안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송씨는 “학자들의 학문수준이 지지부진, 볼 만한 업적이 거의 없고, 있다면 한 두 학자 밖에 없다”고 단정했는데 과연 송씨는 한국의 자연과학자와 사회과학자들이 발표한 논문이라든가 연구성과를 다 정리하고 읽어보았는지 궁금하다. 송씨는 어떤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남을 헐뜯는 악습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

사회과학계의 동향에 대한 오해 : 송씨는 한국의 교수들이 “기껏 외국학설을, 그것도 한국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현실을 이론에 갖다 맞추려 하거나, 아니면 아예 현실을 도외시하고 이른바 상아탑의 고고(孤高) 속에 잠기기도 했고”(23쪽) “요즘의 학계를 보면 기껏 외국학설의 소개 해설 정도, 그것도 어느 정도 정확한지 확실치 않으며, 외국학설로 우리의 현실을 해석하려고 고심하는 것이 고작이라고 할까? 그 이상의 발전을 볼 수가 없다”고 지적했는데 송씨는 왜 그러한 어두운 면만 보고 밝은 면은 보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사실 한국의 사회과학자들 중에는 그러한 유형의 사이비 교수들이 어느 정도 있고 이들이 약삭빠른 상혼을 발휘해 송씨가 말하는대로 논문 하나로 출판사를 바꾸어 가면서 한 가지 내용을 가지고 여러 개의 제목을 붙인 책을 출판해 업적을 늘리는 사이비 권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과도기는 이미 지나갔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외국학설의 소개보다도 한국을 연구하고 실태를 분석하고 문제점과 과제를 지적하면서 자기 학설을 차근차근 체계화해 오히려 외국의 학설을 비판까지 하고 있다.

정치학 분야에서 윤천주의 <한국정치체계의 서설> 이종항의 <한국정치사> 이기하의 <한국정당발달사> 등 단행본을 위시해 한국의 정치현실을 분석한 우수한 저서와 논문이 수백종에 달한다. 사회학 분야의 단행본은 이만갑의 <한국 농촌사회구조의 분석>, 고영복의 <한국 사회구조의 분석> 홍승직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연구> 등 수많은 우수 논문이 허다하다.

역사과학과 행동과학 : 사회과학의 방법에서 송씨는 <역사과학>이란 입장을 강조한다. 송씨의 이른바 ‘역사주의’는 19세기 독일의 국민적 통일운동에 지도적 역할을 했으나 19세기 중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역사적 상대주의와 지배적 가치체계의 상실에 빠진 후 비판의식과 건전한 가치형성에 장애물이 되었고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20세기에 들어와선 논리성과 역사성의 통합을 지향하고 있다.

송씨는 제임스 오코넬, 로스토우 같은 이들을 지명하면서 이들이 행동과학의 방법론을 대표하는 학자같이 말하지만 그들은 행동과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일뿐 행동과학의 대표자는 아니다. 송씨류의 인식은 행동과학과 정치행태, 정치과정의 연구방법을 인간관계 또는 심리주의라는 대명사로 부르며 사회학을 사회학보다도 사회‘심리’학으로 특징지우고 있다.

오늘날 정치체계과 정치과정, 행정과정, 사회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건 송씨의 이른바 심리주의, 또는 인간관계의 이론이 아니라 ‘신논리실증주의’다. 송씨가 ‘역사주의의 입장’에서 한국의 행동과학의 현황을 비판하려면 우선 탈코트 파슨즈의 일반행동이론을 검토하고 이에 따라서 성립한 신윤리실증주의를 도전의 대상으로 했어야 했다.

지식인의 현실참여 : 교수나 지식인은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대안을 가진 비판과 저항이 필요하다. 참여 그 자체가 아니라 참여하는 방식이 문제다.

한국 지식인 재론 - 어느 독자의 물음에 답한다 (송건호, 정경연구 1967년 11월호)

비판이 무엇인지 모르는 비판론 : <잘 돼 갑니다>는 아첨으로 마침내 나라를 망치고 자기를 망친 고 이승만 박사 들러리들의 간사스런 혀끝을 풍자한 어느 라디오 드라마 제목이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조교수라는 안모 씨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문든 <잘 돼 갑니다>라는 라디오 드라마를 생각했다.

안모 조교수는 <한국 지식인론에 박한다>라는 제목을 내걸고 처음부터 필자에게 비방을 일삼았다. 야비한 문구로 가득차 있다. 안씨는 짤막한 비판문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 의미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유치한 문장으로 가장 중요하고도 논쟁점이 될 만한 허다한 다른 문제점에 대해선 거의 한 마디의 의견 발표도 못한 채 필자가 약간 언급하고 지나쳐 버린 비헤이버리즘의 이른바 심리주의론에 대해서만은 악을 쓰며 물고 늘어졌다. 안씨는 파슨즈의 신윤리실증주의라는 것을 신주(神主)처럼 추켜 올렸다. 안씨는 아마 요즘에야 겨우 파슨즈의 존재를 발견했는지 파슨즈 이론을 모시고 감격해 하는 태도가 가관이다.

글 공부가 필요한 문장 : 안모씨는 좀더 문장 쓰는 공부를 해야 하겠다. 잡지의 하찮은 문장조차 제대로 다룰 능력이 없는 친구들일수록 이른바 교수니 조교수니 하고 떠벌리며 행세하고 싶어한다. 제 나라 말의 글쓰기부터 우선 배워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연구생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교수 : 안씨의 주장은 대학의 ‘기업주’나 ‘주주’들이 들어 환성을 올릴 소리다. 안씨는 “권력층은 교수가 생활과 연구의 이중생활을 하는데 얼마나 비용이 드는지 알 리 없다”고 했다. 그는 끝내 권익옹호나 대우개선을 위해 분투하자는 말을 하지 않고 있다. 돈이 많아지면 그들도 인간인지라 대우 개선을 해주겠지 정도로 순종하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 지금의 학문연구는 돈과 돈과의 싸움이다.

오늘날 많은 서구 학자들이 미대륙을 찾아가는 까닭은 학문연구를 위해서 따라서 연구비를 더 많이 주는 나라를 찾아간다. 안씨는 각종 학회가 활발히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나는 대학의 학회가 간판 뿐, 이렇다 할 활동을 못한다는 개탄은 들었어도 희망에 찬 기대의 말은 못들었다.

안씨는 내가 지식인을 마치 무시한 것처럼 제법 지식인을 위하는 말투를 하지만 나는 한국의 지식인을 무시하기는커녕 그들을 누구보다도 동정하고 이해하고 그렇게 때문에 그들에게 권위와 긍지와 자존을 되찾자고 요구한다. 나는 한국 교수들의 능력을 존경한다. 안씨는 언론인이라고 그들의 비평 수준까지 너무 무시해서는 안 된다.

현실참여론 : 내가 가장 힘에 겨웠고 또 자신을 못가진 채 쓴 문장이 있다면 그것은 지식인의 현실참여론이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몇번이나 쓰다 찢고, 쓰다 찢곤했다. 그런데 안씨는 이 문제에 대해 거의 아무런 관심도 없는듯 권력의 부름이 없어서 탈이지 부르기만 하면 그에 흔연히 응해 자기의 지식을 살리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는 논조다. 안씨의 글에는 도대체가 ‘비판’이나 ‘저항’이라는 어휘를 발견할 수 없고 자기의 지식을 정책과정에 반영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는 말만 되풀이 강조하고 있다. 권력에 참여할 기회를 못가져 애태우는 심정이 역력히 들여다 보인다.

안씨는 내가 지식인을 경멸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그러나 좀 더 침착하게 읽어주면 지식인을 한없이 동정하고 이해하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권위와 양심을 되찾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신생국 지성의 자세 : 안씨가 가장 자신을 가지고 나를 공격한 대목은 지성 문제였다. 그는 가소롭게도 필자에게 비헤어버리리즘을 공격하려면 차라리 파슨스의 일반행동이론을 도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사뭇 자신있는듯이 설교까지 했다. 가장 생기를 가지고 쓴 대목인 <역사과학과 행동과학>도 비판문으로서는 낙제점수 밖에 줄 수 없다.

나의 지성론은 비헤이버리즘을 공격하자는 목적이 아니다. 나는 신생국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원리를 지적했다. 첫째 민족주체의식을 견지하고, 둘째 한국적 특수성을 파악하기 위해 역사적 과학을 앞세워 현실인식을 해야 하고, 셋째 한국은 역사적 전환기에 처해 있기에 시대를 하나의 전체적 차원에서 인식해야만 전환기의 본질이 비로소 부각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넷째 지난날 이 땅의 학문적 전통이나 학풍이 너무 추상적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에 현실인식에서 특히 경험적 어프로치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다섯째 사물을 대할 때 논리적으로 보는 눈을 기르도록 해야 하는 점을 강조했다.

내가 비헤이버리즘 내지 심리주의를 언급한 것은 대상을 특히 역사적 입장에서 어프로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비역사적 경향이 있는 비헤이버리즘적 어프로치를 약간 스쳐가는 정도로 비판한 데 불과하다. 안씨는 주요 비판대상을 나의 다섯 가지 원칙에 두었어야 했다.

마르크스론자들은 이데올로기 상의 논쟁을 할 때 누가 어느 책에서 무슨 말을 했고 누구는 무슨 말을 했으니 결국에는 자기 이론이 정당하다는 식으로 글을 쓴다. 이처럼 자기의 견해는 거의 발표하지 못하고 남의 학설을 나열하는 것이 일부 무능한 사이비 교수들의 연막전술이다.

역사학이라고 하면 기껏 19세기 독일의 역사주의 밖에 이해 못하는 학문을 가지고서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이해할 까닭이 없다. 나는 인식론의 일부로 역사과학을 강조한 것이지 독일의 역사주의 학파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다. 같은 의미에서 나는 미국 사회과학이 지닌 심리적 요인 즉 심리주의적 학풍을 문제로 지적한 것이지, 미국 사회과학계의 다양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미국 사회과학이 대체로 역사의식이 박약한 어프로치의 경향이 많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미국적 학풍에서 심리주의나 비역사적 어프로치의 경향을 발견하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런 학풍이 우리나라 학계에 큰 영향을 주는 것도 부인 못할 사실이다. 문제는 심리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주의를 받아들이는 우리 학자들의 자세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을 따름이다.

외국학설만을 공부하고 해설하고 그것을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려는 노력 속에서는 어쩐지 진지한 고뇌보다 안일과 공허감만을 느낀다. 그렇다고 외국학문을 연구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학문발달을 바랄 순 없다. 문제는 외국학설에 있는 게 아니고 그러한 외국학문을 받아들이는 우리 학자들의 정신적 자세에 있다. 민족적 국가적 주체의식이 없이 외국학문을 받아들일 때 그런 사람들의 정신상황이 어떻게 되어지는가는 ‘정경연구’ 10월호에 실린 안모 조교수의 위태로운 한글 문장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한국지식인 문제는 비단 지식인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도 진지한 분석과 반성이 있어야만 하겠다.


4.19 직후 ‘대학의 위기’ 논쟁 (1960년)

이 글을 쓴 최재서는 참 용감하다. 대동아전쟁에 혈안이던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친일잡지 <국민문학>을 창간하고 조선문인보국회 이사였던 그가 대학사회를 평론하는 글을 쓴 것 자체가 그렇다. 하긴 학교에서 쫓겨나는 판에 무엇을 못할까.

반론자인 장덕순은 군사정권이 무서워 강원도 철원 태생이라고 출신지를 숨겨야 했지만 실제론 1921년 만주 용정에서 태어나 49년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 당시 연세대 교수였다.

4.19 직후 학생들이 ‘어용’ ‘무능’ ‘부패’ ‘독재’에 해당하는 학교 책임자나 교수의 축출을 요구하고 나섰다. 학생들 요구에 상당한 이유가 있고 학원민주화의 앞날을 위해서도 최소한의 관련 교직자의 퇴진은 불가피했다. 학교마다 학생들 배후에 교수들간 알력이 개재돼 있느니, 외부의 입김 때문이니 하는 별별 루머가 다 떠도는 가운데 대학가 곳곳에서 성토 농성의 소요가 꼬리를 물었다.

1960년 5월 하순 문교부는 ‘학원 정상화 긴급초지요강’을 발표해 1) 지난 선거에 적극 가담해 국민의 지탄을 받은 자 2) 구 정권을 배경으로 독재와 불법 부정을 자행한 자 3) 불순한 동기로 학생 또는 동료 교원을 선동한 자 4) 4.19 이후 부정입학을 시켰거나 부정경리를 자행한 자를 해임할 수 있다고 천명했다.

연세대 최재서, 장덕순 두 교수의 글은 1960년 10월 경향신문 지상에서 학원 내 진통에 관해 견해를 밝힌 거다. 연세대는 교수들의 농성과 몇몇 교수들이 대학을 떠날 정도로 소용돌이가 격렬했다. 4.19 직후의 대학가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될만하다.

대학의 위기 (최재서, 경향신문 1960년 10월 3일자)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4.19 이후 성격이 불분명한 혁명바람이 학원에 불어 밑바닥까지 흔들린다는 게 요새 우리가 겪는 대학위기의 실태다. 대학 약화의 책임을 거의 전부 이사회나 총장의 독재로 돌리는 게 현재의 경향이지만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근본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이사회나 총장의 독재가 심한 대학일수록 정실 인사가 자행되었다. 2) 유능한 독재자가 물러난 뒤 유능한 교수들이 중심이 돼 민주적으로 교수회를 운영하면 그 학교는 향상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지도자 없는 데모크라시’가 될 것이다. 지도자 없는 데모크라시는 무정부상태다. 그것은 정치세계에서도 그러하지만 특히 학문세계에서는 치명적이다. 대학 경영자는 시간수를 채우기 위해 인물과 실력을 미처 조사할 겨를도 없이 다수의 강사들을 닥치는대로 채용했다. 그들은 과거 10여년의 독재온상에서 곱게 자라 부교수 또 조교수로 승진했다. 4.19 혁명 바람이 불자 그들은 들고 일어나 그들의 은인을 축출하고 집단 안전보장을 획책했다. 이들이 오늘 학원의 혁명세력을 형성했다.

3) 학생의 정원초과는 대학 약화의 최후적인 원인이다. 일류대학은 거의 정원의 배에 달하는 학생을 들이고 있다. 뒷문으로 밀려 들어오는 청년들이 학생투위 예비군을 형성했다. 그들은 혁명교수단과 제휴해 캠퍼스를 장악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대학 자체가 독재적 요소를 제거해 급속히 민주적으로 개혁하고 혁신세력을 유도해 질서화해 학문의 권위를 세우는 양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대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 - 최재서씨의 ‘대학의 위기’를 박한다 (장덕순, 경향신문 1960년 10월 10일자)

일제 말기 ‘황도문학’을 선양했던 평론가 최재서씨는 친일어용잡지인 소위 <국민문학>을 주간하면서 최선봉에 나서 이를 적극 지지, 선창했다. 연세대 분규를 계기로 왕년의 친일문인인 최씨가 또 ‘평론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각 일간지에 등장했다.

필사적으로 투쟁해온 애족의 한글학자인 외솔 최현배 선생이 우리 언어말살의 선봉맹장이던 최재서씨와 이름을 나란히 해 각 일간지상에 제자인 학생들을 폭도로 규정하고, 같은 옥중동지인 한글학자 동료 후학들을 모조리 불순 무능 파괴자로 규정하면서 연세학원을 물러났다.

최씨는 아직도 젊은 세대가 주동이 돼 누적된 독재의 부패세력을 타도한 4월혁명의 정신과 그 성격마저 파악 못하고 있다. 최씨는 현재의 ‘대학위기’는 오히려 ‘유능한 독재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8.15 이후 현해탄이 바라보이는 남쪽 항구의 신설대학에 왜인(倭人) 장서를 기증한다는 조건으로 신출(新出) 강사로 빌붙은 왕년의 ‘유능한 문사(文士)’는 진실로 누구였던가? 학자의 세계에 무슨 ‘은인’이 있고 ‘유능한 독재자’가 있단 말인가? 은인을 배신하는 한이 있어도 엄연한 역사적 과정인 대의명분에 반역해서는 안 된다.

최씨는 요즘 대학생을, 하나는 정원초과로 입학한 몇 10%의 비지성적 청년과 둘째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양떼’로 규정했다. 4월 혁명의 투사들은 모두 대학의 뒷문으로 들어온 ‘비지성 청년’뿐이고 ‘양떼’같은 순한 학생은 뒤에서 관망만 했단 말인가? 이런 발언이야말로 ‘대학의 위기’가 아니라 ‘대학의 파멸’을 초래하는 것이다. 4월 혁명은 학생이 주동하고 교수가 뒷받침했고 시민이 호응해 얻어진 성스런 결실이다. ‘대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모든 독재적 잔재를 발본하는 데서 시작하고 권력과 금력에 아부하고 조석으로 변하는 현실정세에 우왕좌왕하는 곡학아세의 교수를 물리치는 데서부터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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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서정

    미치 이게뭐냐 에라 꺼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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