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온 날 농성장 풍경

[연정의 바보같은사랑] (44) 첫눈

하늘에서 하얀 눈이
서울 산업은행 노숙농성장에서
첫눈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어봅니다.
11/28 9:02 pm


‘아, 첫눈이 오는구나.’
쌍용자동차비정규직지회 복기성 수석부지회장 동지에게 문자를 받자마자 창문을 열었다. 눈이 오는지 알 수 없어 밖에 나가보니 지나가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발 날리는 게 보인다. 다시 들어가 카메라를 챙겨갖고 나와 동네를 돌아다녔다. 작은 눈송이가 제법 촘촘하게 내린다.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도 보내본다. 그러다가 멀지않은 시청역 재능교육 사옥 앞에서 농성 중인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동지들이 생각나서 전철을 탔다.
역을 나오니 눈이 조금 잦아들었는데, 작은 농성장 텐트 위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있다. 사진 촬영을 하는데, 작은 텐트가 들썩인다. 눈이 녹으면서 물이 고이니 물을 털어내는 것이리라. 텐트 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와 웃음소리도 흘러나온다.

  학습지노조 재능교육지부 농성장 [출처: 연정]

“뭐 그런 걸 찍어요?”
텐트 바깥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담배를 피던 ‘간접고용철폐 파견제폐지 불법파견 정규직화를위한공동행동’에서 활동하는 임용현 동지가 살짝 눈을 흘긴다.
“연정동지네. 들어와요.”
텐트 안에서 오수영 사무국장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지나가는 길에 들렀다고 하니 임용현 동지는 “발레오에 가시는 길이냐?”고 한다. 그렇다고 하고 재능 농성장을 떠나 다시 전철을 탄다.

[출처: 연정]

기륭동지들 생각이 났다. 기륭 투쟁이 시작되고 처음 몇 해 동안은 20대 초중반 젊은 조합원들이 보낸 문자메시지로 첫눈을 느꼈다. 2005년, 파업투쟁을 시작한지 100일이 될 즈음 첫눈이 내렸다. 기륭동지들도 나도 100일이나 투쟁을 한다는 게 엄청난 일로 생각되던 때였다. 공권력 투입 후, 천막농성이 시작되면서 처음에는 없던 수납장이며 거울, 반짓고리 까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는 조합원들은 “도대체 이 싸움이 언제까지 갈까?”싶어 많이 심란했을 게다. “나이가 어려도 외로운 건 안다구요^^”라고 새초롬하게 말하던 20대 초반 조합원의 야무진 입매가 생각난다. 조합원들이 비정규직권리보장입법 투쟁과 전용철․홍덕표 농민 열사 투쟁, 최대주주인 아세아시멘트 투쟁을 하느라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밤. “와 첫눈이당^.^” 한 조합원의 문자를 받고, 창문을 여니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조합원들이 있다는 광화문에 나갔다가 조합원들이 떠나고 없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혼자 함박눈을 실컷 맞고 온 기억이 난다.

함박눈이 온다고요 뚜렸했었던 발자욱도
모두 지워져 없잖아요 눈사람도 눈덩이도

아스라히 사라진 기억들 너무도 그리워 너무도 그리워
옛날 옛날 포근한 추억이 고드름 녹이듯 눈시울 적시네


충무로역에 내려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조합원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프랑스 대사관 앞으로 간다. 전철역에서 박스를 들고 추운 밤을 보낼 곳을 찾는 노숙인들과 이미 자리를 확보한 노숙인들의 간이 집을 보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눈 온다고 찾아오는 이가 있는 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조금은 더 행복한 건지...

  프랑스 대사관 앞 발레오공조코리아지회 농성장 [출처: 연정]

프랑스 대사관 앞에 도착하니 비닐로 만든 발레오 조합원들의 농성장이 있다. 농성장 앞에는 눈이 쌓인 퀵서비스노동조합 김현 동지의 오토바이가 세워져있다. 역시 두런두런 말소리가 새어나온다. “안녕하세요” 인기척을 내고 비닐을 들추니 몇 명 동지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다가 반겨준다. 농성장 안에서는 동태탕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김현 동지가 재능 농성장에서 편육도 실어왔단다. 발레오지회는 주말에도 문화제를 한다고 한다. 오늘도 첫눈을 맞으면서 문화제를 했단다.

[출처: 연정]

“왜 여기 계세요? 첫눈도 오는데...”
“그러게요. 만날 사람도 없고... 동희오토 이백윤 동지가 소개팅 시켜준다 했는데, 믿을 사람 하나 없다니까요.”

동희오토 투쟁에 열심히 연대를 했던 꺄아아님과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여의도 쌍용자동차 동지들의 농성장에 간다고 이야기했다. 역시 오늘은 그냥 들린 거라며 다음에 문화제 때 오겠다고 했는데, 지난 번에도 비슷한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전철을 타고,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 있는 쌍용자동차 동지들의 농성장에 갔다. 농성장 옆에는 경찰들 몇 명이 서있고, 조합원 세분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 나누시며 무언가를 드시고 계신다. 추워서 김치찌개를 데워 드시는 거라 한다. 내가 카메라를 꺼내니 연출도 해주신다. 이제 눈은 내릴 만큼 내린 모양이다. 옆에 준비해둔 잠자리를 보니 위에 비닐도 치지 못하고, 침낭만 깔려있다. 물기가 별로 없는걸 보니 눈이 한참 올 때 잠깐 가렸다가 경찰들 때문에 다시 걷은 것 같다. 몇 마디 이야기 나누면서 그동안 자주 뵙지 못한 조합원들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쌍용자동차 동지들이 아니라 공무원노동조합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공무원노조 탄압 중단과 142명의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농성을 진행 중이라 한다.

  여의도 노숙농성 중인 공무원노조 해고노동자들 [출처: 연정]

[출처: 연정]

[출처: 연정]

“잘못 오셨는데, 연출을 괜히 했네요. 이런 일이 종종 있어요.”하시며 웃는다. 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산업은행 바로 앞에 있는 쌍용자동차 동지들의 노숙농성장으로 이동했다.
다행이 여기는 비닐을 쳤다. 피켓 위에 어른 주먹 두 개만한 눈덩이 뭉쳐놓은 게 올려져있다.

  산업은행 앞 쌍용자동차지부 농성장 [출처: 연정]

잘 채비를 하는 중인데, 염치 불구하고 인기척을 한다. 조합원 동지들이 놀라는 듯 하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안에 들어가니 생각보다는 아늑했다. 평택에는 눈이 안 왔단다. 작년 쌍용차 투쟁 당시. 비가 너무도 간절하던 그때, 서울에는 비가 와도 평택에는 오지 않았던 그때 생각이 났다.
“첫눈 온다는 문자를 보내니 남성동지들하고 여성동지들의 반응이 달라요.”
복기성 동지가 첫눈 문자에 대한 답장을 몇 개 소개 해준다. “서울에서 고생 많으시죠? 힘내세요.”라고 보낸 동희오토 조합원의 답 문자를 읽어준다. 다른 여성동지와 내가 보낸 문자는 짠했다고 한다. 나는 가수 이정석의 <첫눈이 온다구요> 노래 구절을 보냈는데, 그는 이게 노래 가사인지는 몰랐다고 했다. 이 노래가 86년 대학가요제 수상곡이니 여차하면 ‘세대론’까지 나올 분위기인데, 함께 있던 한 조합원이 이 노래를 안다며 부른다.

“슬퍼하지 마세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그때 옛말은 아득하게 지워지고 없겠지요.”
“와~ 노래 잘 하시네요.”
“제가 얼굴도 잘 생기고, 노래도 잘 해요.”
늦은 시간에 조합원들이 귀찮아하지 않고, 웃으면서 이야기해주니 고맙다. 과자를 먹으라고 내준다. 여기 동지들은 발레오 동지들의 이야기를 한다. 발레오 농성장 다녀온 소식을 전해주니 반가워한다. 공무원노조 농성장 이야기를 하니 걱정 되서 이미 다녀왔다 한다.

  노숙농성중인 쌍용자동차지부 조합원들 [출처: 연정]

“소원은 비셨어요?”
“작은 소원 빌었는데, 이뤄질지... 현장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어요. 유물론자가 이러면 안되는데...”
복기성 동지가 멋쩍어한다. 이번 산업은행 앞 노숙투쟁은 이달 말까지 하는데, 이후에도 산업은행 투쟁은 쌍용자동차 정문 앞 투쟁과 병행할 거란다.

오늘, 울산에서는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이 노가바 경연대회를 했다한다. 서울서부비정규센터 회원으로 활동하는 신혼부부가 결혼식 축의금으로 들어온 5백만 원을 투쟁기금으로 내겠다고 들고 와서 조합원과 가대위 동지들이 힘도 많이 받았다 한다. 울산에도 눈은 오지 않았다한다.

밤에는 정겹게 느껴지는 이 눈이 아침에는 춥고, 성가실지도 모른다. 어쩌면 날이 밝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많은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따듯한 위로를 나누고, 마음 설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왔으니까 말이다.

슬퍼하지 말아요 하얀 첫눈이 온다구요
그리운 사람 올 것 같아 문을 열고 내다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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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 농성장 ,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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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능수영

    앗 그때 총총히 사라지셔서 서운했는데...
    이류희원동지 소식도 참 따듯하네요. 난 절대 못할일이예요.동지들이 있어 한겨울 농성장도 견뎌내는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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