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지만 아픈 도시 케이프타운

[방방곡곡99절절](1) 유럽에 의한 유럽을 위한 아프리카 속 유럽같은 도시

케이프타운은 일단 멉니다. 직항이 없어 더 오래 걸립니다. 삼시세끼를 기내식으로 채우고 얼굴과 머리가 떡 지면 도착할 때가 됩니다. ‘꼼짝 마 자세’로 꼼지락거리는 것 정도나 가능한 일반석, 사람들이 먹을 밥과 사람들이 싼 배설물을 함께 싣고 하늘을 나는 그 거대한 티타늄 덩어리 안에서 그냥 멍하니 있으면 뭐 그럭저럭 지낼 만도 합니다. 밥 주고 커피에다 술까지 주는 예쁜 언니들의 미소가 억지인 게 느껴질 때쯤이면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합니다. 케이프타운까지는 2시간 더 가야 합니다.

케이프타운은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가장 잘 산다는 남아공의 입법 수도입니다. 아프리카 안의 유럽이라는 별칭처럼 유럽의 한 도시에 온 것 같다는 착각을 들게 합니다. 밝은 색상의 유럽식 건축물들과 정말 아름다운 하늘, 그리고 눈부신 바다가 케이프타운 내 주요 도시 씨포인트(Sea Point), 그린포인트(Green Point)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백인 중심의 거주지로 아파르트헤이트가1) 철폐되기 이전에는 흑인의 출입이 통제되던 곳이라고 합니다. 당시 패스법2) 이라는 것이 있어 흑인이 통제되는 특정 지역을 출입하려면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대신 흑인들은 한 곳으로 몰아넣어 집단적으로 살게 합니다. 그 지역이 지금도 게토화 되어 남아있는 타운십(Town ship)이라는 곳입니다.

케이프타운의 타운십은 꽤 규모가 큽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서 보면 꽤 오랫동안 인포멀하우스(Informal house)라고 불리는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실제 가서 보면 삶의 조건은 생각보다 열악합니다. 공공수도가 아예 없는 곳도 있고 정부가 쓰레기를 치워가는 등 공공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서 도로에 쓰레기 던지는 시위를 하기도 한답니다.

  씨포인트의 바닷가. 실제로 보면 훨씬 멋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케이프타운이라고 하면 희망봉이 있는, 인도양과 대서양이 만나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지닌, 뭐 이런 수식어를 떠올리죠. 여기서도 케이프타운은 백인거주지가 있는, 도시와 문화가 있는 씨포인트를 위시한 지역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남아공 내 백인 거주자는 10% 정도입니다. 그들이 아프리카 남단 작은 도시의 예쁜 자연환경과 잘 구축된 도시 인프라와 천연자원을 쪽쪽 빨아먹고 자기들의 나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원조 흡혈귀 제국주의자 ‘보어인’(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인들이 자기들 스스로 이렇게 부른답니다. 네덜란드어로 농민을 뜻한대요. 이 말 듣고 한참 웃었는데 뭔 농민들이 그리 학살과 땅뺏기를 잘한답니까)과 이 사람들이 가진 게 탐나 뺏으려고 한, 흡혈귀의 피를 빠는 영국 제국주의자들 덕입니다.

아프리카는 아름다운 자연과 차고 넘치는 천연자원, 빛나는 다이아몬드 덕에 피가 철철 넘치는 착취의 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이 아프리카지 박물관에서 그 역사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전까지 케이프타운은 정말 백인에 의한, 백인을 위한, 백인의 도시였습니다. 흑인들은 백인의 재산을 지키고 백인에게 술과 음식을 날라다주는 등의 허드레 일이나 쓰레기를 치우는 등의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진보적인 체하며 다른 나라의 현실을 과대포장하여 식자인척하고 싶은, 백인 남자들이 부자로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속이 뒤틀어진 아시아 여성의 편견일거라고 저도 믿고 싶었습니다. 열흘 정도 백인 거주지에 머물며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본 거라고, 아마 아파트르헤이트는 정말 폐기되었다고 저도 믿고 싶습니다. 아, 물론 만델라 집권 이후 흑인중산층이 형성되고 있다고 하네요.

  타운십 주거지. 같이 간 활동가에 의하면 우측 빨간 글씨는 ‘내 집앞에서 똥싸지 마시오’라네요.
타운십에 사는 활동가 한분에게 들으니 자기도 돌아다니기 무서운 지역이 있다고 합니다. 40%가 넘는 흑인 실업률은 자연스레 범죄의 증가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살인과 강간 발생 비율도 세계 최고라니 아무래도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는 어려운 지역입니다. 투어가 있다고 해서 알아봤더니 가격도 비싼데다 유치원, 에이즈 병동 및 교회를 돌아 기부하는 센터에서 마무리되는 걸 보니 그리 땡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타운십에 사는 활동가 한 분이 선뜻 안내를 자청해주어서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그 곳의 느낌은 자세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말해봐야 빈곤과 처절한 삶 어쩌구 공공서비스와 인간의 조건 저쩌구... 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박혀있을 때는 한국만큼 복잡하고 불행한 현대사를 지닌 나라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불행하기로 따지면 우리는 명함도 못 내밀 듯 싶습니다. 그러나 또 그만큼 투쟁과 저항의 역사도 찬란하지요.

  무엇이 대안인가라는 발표가 준비되고 있는 와중에도 활동가들의 춤과 노래는 멈출 줄을 몰랐답니다.
지금 케이프타운에 있는 활동가들은 세계화, 물 사유화와 에이즈를 주요 이슈로 싸우고 있고요.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모순의 극단에서 제 살 길을 찾은 제국주의의 또 다른 모습으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국제연대를 강화한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보고 있습니다. 활동가들이 자신들이 사회주의자임을 신나게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볼 때는 정말 가슴이 벅차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사회주의자라서 저렇게 신났던 적이 있었을까요?

케이프타운에서 아시아인은 대개 중국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사를 건넬 때는 주로 “니하오!”(중국어로 “안녕!”)라고 하지요. 중국은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로 급부상 중인 듯합니다. 아프리카 지역의 땅을 계속 사들이고 있다고 하네요. 난 중국인이 아니라고 대꾸하기도 귀찮아질 때쯤 그냥 중국인인 체해버립니다. 게다가 얼굴 하얀 아시아인은 백인 취급받기도 합니다. 백인은 그냥 피부가 하얗다는 뜻은 아니겠죠. 어쨌든 하얀 거, 긴 거, 마른 거, 이런 게 사람의 아름다움으로 표현되는 듯합니다. 덕분에 좀 긴데다 하얗고 현지인에 비해 마른 저는 자주 뷰티풀이란 감탄사를 뭇 남성들로 부터 듣곤 했습니다. 한국에선 생기다 만 얼굴쯤으로 취급받았었는데 말이죠.

제 또래라면 비슷하겠지만 어렸을 적 ‘뿌리’란 외국드라마를 본 기억 외에는 흑인의 문화를 접해본 적도 없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마 흑인 노예가 탈출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인데도 흑인의 발가락이 잘리던 장면과 노예의 절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시커먼스나 부시맨 정도나 보고 낄낄거리는 수준인데다, 선주민 혹 원주민 아프리카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사실 흑인들의 삶에 대해선 무지했습니다. 근데 이래저래 그들과 함께 있어보니 정말 에너지가 넘치고 솔직합니다. 온갖 체면치레, 거짓웃음과 남성 관료주의, 가당치도 않은 양반의식 등에 찌들어 산 저에겐 그들의 진솔함에 놀래 자빠질 지경입니다.

  글로벌라이제이션 스쿨을 마치고 여성활동가들과 함께. 활동가들 표정이 모두 생동감넘치죠?

제가 만난 사람들이 진보적 노동관련 연구 집단인 일릭(ILRIC)3) 이라는 곳에서 주최하고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에서 후원해서 열린 글로벌라이제이션 스쿨(Globalization School)4)에 참여한 활동가들이었다는 점은 감안해 주세요. 저는 정말 그 사람들이 맘에 들었습니다. 어찌나 섹쉬하기까지 한지 사실 혼자 야한 생각하느라 토론에 집중하기 어려운 때도 있었답니다. 으흐흐...

제가 케이프타운에 머무른 기간은 열흘밖에 되지 않는 데다 주로 백인 거주지에만 머물러 있어서 사람 사는 재미를 느끼기엔 아쉬운 점도 많았습니다. 다만 제가 머무른 씨포인트의 하늘과 바다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해변가로 시멘트 길이 잘 발라져 있어 백인들은 개를 끌고 산책을 하거나 이어폰을 꽂고 아침, 저녁으로 조깅을 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자기 건강도 잘 챙기는 거 같습니다. 해변가 곳곳에는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노을도 정말 아름답습니다. 케이프타운에 가실 일이 생기면 이 아름다운 것들을 다 누려보세요. ‘슬레이브 롯지’라고 동인도회사 시절 노예수용소였던 곳에 가시면 노예의 역사와 만델라의 행적을 돌아보실 수 있습니다. 만델라가 수감되어 있었던 로빈 아일랜드도 멀지 않고요. 와인도 맛있답니다. 테이블마운틴도 유명하죠. 산 정상부분이 진짜 테이블처럼 평평하더군요.

  정부와 사측과 대치하는 상황극에서도 실제처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활동가들.
참, 에이즈 감염률이 높아 주위에 바이러스 감염자나 에이즈 환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남아공에 있는 동안 가장 친하게 지냈던 여성 페미니스트도 환자였는데요. 뭐 처음에 그 친구가 직접 얘기했을 때는 놀라지 않은 척하려고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같이 밥 먹고 포옹하고 쓰다듬고 침 튀기며 얘기하는 게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근데 한국에 와서 이 얘기를 하니 한국 사람들이 저를 피하더군요. 쩝... 덕분에 에이즈 감염경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야 할 일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기회에 공부 좀 하고요. 그러다 다시 느낀 건데 한국 사람들 정말 편견도 금기도 많은 거 같아요. 이런 부정적 시각을 부추기는 게 사회를 통제하기에 편하다고들 하죠. 에잇...

  만델라 캐리커처. 남아공 민중들의 만델라 사랑은 아직도 뜨겁습니다.
그리고 유의해야 할 게 하나 더 있답니다. 바로 인천공항 도착 후 곧장 생기는 ‘나 돌아갈래’ 후유증이에요. 어떤 도시건 얼마나 소통하고 느끼고 왔느냐에 따라 요양이 필요한 정도도 다르겠죠. 진하게 소통한 만큼 요양도 오래 필요할 테지만 저에게는 이번 케이프타운의 여운이 머물렀던 시간에 비해 매우 길게 이어졌어요. 케이프타운의 하늘과 바다는 한동안 눈앞에 어른거릴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해봤자 해외여행 자랑질이냐고 욕먹을 일밖에 없을테니 혼자 꾹 참는 수밖에요.

현지 음악과 남아공산 와인은 요양에 큰 도움이 됐답니다. 일릭에서 일하는 ‘난디’라는 활동가가 음악 씨디 두 장을 줬거든요. 아, 다른 사람들의 요양방식도 궁금해지네요. 어쨌든 내 철딱서니 없는 인생에 육로로 케이프타운까지 가는 꿈을 추가시켜 놓고 나니 그럭저럭 견딜만해졌어요. 다른 세상을 보는 일은 자본에게 굴복당하고 ‘먹고사니즘’에 포섭당할 위험을 줄여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며 현장을 떠나는 활동가들의 뒷모습 깨나 봤었죠. 근데 인생 뭐 있나요. 주어진 조건을 무조건 즐겨버리자구요. 제 얘기는 여기서 끝~

  케이프타운의 하늘은 저녁에도 환상적입니다.

각주)-----------------

1)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남아공의 백인정권에 의하여 1948년에 법률로 공식화된 인종분리 즉, 남아공 백인정권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을 말한다.1990년부터 1993년까지 벌인 남아공 백인정부와 흑인대표인 ANC와 만델라 간의 협상 끝에 급속히 해체되기 시작해, 만델라가 민주적 선거에 의해 대통령으로 당선된 1994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2) 패스법: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의 하나로 16세 이상의 흑인이 신분증을 소유하지 않았거나, 거주 지역 이탈 시 백인의 농장에 강제 노역을 하게 만드는 악법.
3) 일릭(ILRIC-SA, International Labor Reasearch and Information Group- South Africa: 국제노동연구정보모임- 남아공 지부): 국제노동연구정보모임은 1983년에 시작했으며 교육 운동에 중점을 두고 교육 자료를 생산하는 단체로 교육에 집중하면서 연구 작업을 병행하거나 연결하려고 하고 있다. 2002년에 처음 ‘세계화 학교(Globalization School)’를 개최했으며, 2006년부터는 세계화에 대한 ‘대안(alternative)’에 초점을 두고 진행했고, 2006년 이후에는 젠더에 초점을 맞추면서 진행하고 있다.
4)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 독일에 위치한 독일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기념하여 설립한 재단으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 정치운동을 담당하며, 정치교육과 비판적 사고와 대안 정치에 대한 토의 및 포럼, 그리고 독일과 세계에 걸쳐 진보적 사회관을 중심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 케이프타운(Cape Town)은 아프리카 대륙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한 도시입니다.
* 성냥은 ‘지구지역 활동가를 위한 페미니즘 학교’의 학생입니다.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http://www.glocalactivis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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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 , 케이프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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