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이집트, 알제리, 수단...혁명은 어떻게 건설됐나?

[국제통신] 혁명을 잉태한 변혁운동과 계급 대중운동

혁명의 물결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재단된 국경을 가리지 않았다. 튀니지에서 알제리, 이집트, 예멘을 넘어 이제 수단까지 도달했다. 수단의 천여명의 대학생들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집트 민중 또한 여전히 거리를 지키고 있다. 곤봉과 방패, 최루탄, 물대포, 체포와 가택연금, 고무탄과 실탄 발포, 외출금지, 이동통신 및 인터넷 차단, 계엄령, 군대투입 등 권좌에 앉은 살인마의 피로 물든 카드는 이미 모두 꺼내졌지만 민중들을 흔들지 못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은 부통령을 임명하며 회유전술을 폈다. 그러나 정권 퇴진과 민주주의를 향해 단결한 민중은 흩어지지 않았다. 이미 150명 이상이 정권에 희생됐고 수 천명이 부상당하거나 연행됐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민중들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 2월 1일에는 백만 투쟁이 계획됐다.

사회적 봉기에 기름을 부은 사건은 오프라인에서 발생

  29일 알렉산드리아에서의 행진 [출처: http://www.faz.net]

도대체 어떻게? 모두가 가진 물음표다. 서구 주류 언론들이 생산하는 것처럼 페이스북 혹은 트위터혁명인가? <가디언>은 28일 “트위터혁명에 관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회적 봉기에 기름을 부은 특별한 사건은 오프라인에서 발생했다”며 이집트 노동자 계급 운동을 강조했다. 이에 따르면 2008년 전국 모든 지역의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은 여당 NDP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파괴적인 영향을 문제로 수주간 국회 밖 인도를 점거한 후 지속적으로 선동했고 반체제적 활동을 고무시켰다.

카이로대에서 정치과학을 전공했고 미국 조지타운대에서 역사학을 수학중인 모하메드 에쩰딘(Mohammed Ezzeldin) 또한 혁명은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더리얼뉴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이집트 혁명은 체제 변혁운동, 지역과 공장을 함께 정치화한 노동운동 그리고 미래를 착취당한 이들의 청년운동 등 차례로 지속된 세 가지 차원의 저항운동에 기초한다.

대중 시위를 촉발한 세 가지 기반: 변혁운동, 노동운동 그리고 청년운동

먼저 그는 2004년, 2005년 벌어진 케파야(KEFAYA) 운동이 이들 대중 시위의 싹을 틔웠다고 말한다. 세계화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이집트 좌익 세력인 이들은 무바라크 정권에 맞서 “무바라크 정권연장 반대, 그의 아들 게말 무바라크로의 권력 승계 반대”란 슬로건을 확산시켰으며 민중들이 실제적인 변화를 위한 희망을 가지도록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출처: http://english.aljazeera.net/]

또한 그는 2005년 이후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거대한 파업 물결을 주목했다. 예를 들어, 델타의 산업도시인 마할라에서는 2006년, 2007년 그리고 2008년 성공적이며 승리적인 파업이 진행됐다. 이때 파업은 도시와 공장들을 함께 움직였다. 엘 마할라는 섬유산업에 관한 거대한 공장들이 밀집한 산업도시다. 거의 3만명의 노동자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이들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에 나섰고 그 지역 주민들에 의해 지지됐다. 2천명의 노동자들이 2007년에 2008년 4월에도 6번의 파업을 벌였다. 특히 2008년 4월 6일 경찰들은 거대한 짐승같은 폭력을 저질렀고 그것은 거의 거리전투와 같았다고 가디언의 보도와 마찬가지로 회상한다.

그리고 당시 노동자민중들의 파업들이 실제적인 새로운 희망을 만들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것은 첫째로 보통의 사람들에게 파업에 대한 새로운 문화, 새로운 경험을 주었다. 2008년 2009년 2년 동안 이집트 역사상 전례없는, 어림잡아 거의 8백번의 파업이 벌어졌다.

이렇게 우선 2005년 정치적 성격의 운동이 벌어졌고, 사회적 운동이 이집트 전역으로 뻗어나갔으며 2008년 마할라 파업 그리고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요구했던 섬유노동자들의 파업이 강한 영향을 미쳤다. 두 가지 경험들은 지금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는 많은 이집트 노동자와 민중에게 이들 민중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얼마나 힘있는지를 주목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2010년의 청소년, 청년들의 운동을 강조했다. 이들 청년 운동은 캘레드 새에드(Khaled Saeed)의 비참한 죽음 후 확산됐다. 그는 젊은 남성이었고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거리에서 고문됐고 경찰 조사관에 의해 살해됐다. 2010년 6월 캘레드가 살해된 후 실업상태에 있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 거대하고 강력한 저항이 벌어졌다.

이와 함께 그는 시위에 대한 그리고 요구를 주장하는 것에 대한 공포의 장벽을 무너뜨린 튀니지 민중들의 승리적인 혁명 그리고 저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스스로를 네트워크한 사회적 네트워크를 주요 이유로 꼽았다.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은 보다 직접적으로 평가되며 특히 파업물결은 튀니지 대중시위를 지속적으로 단단하게 뒷받침했다.

알자지라에 따르면 시디 보우치드에서 분출된 저항은 실제로 자연발생적이었다. 12월 17일 시디 보우아치치의 분신 후 이 저항은 알자지라 방송과 페이스북,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 알려졌으나 오프라인에서 그들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튀니지 노동연맹 UGTT의 시디 보우치드 지역본부는 그날부터 사회적 봉기에 몰두했다. UGTT 전국연맹은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으로부터의 정치적 독립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여졌지만, 지역 대표자들은 정력적으로 참여한다는 평판을 가졌다. “이들 시위 뒤에서 추동한 주요 힘은 매우 강성인 시디 보우치드 노동조합이었다”고 지역 고등학교에서 물리를 가르치는 아피 페티(Affi Fethi)는 알자지라에서 말했다.

거리 민중과 함께 한 노동자들의 정치총파업

6일 수천명의 노동자들은 분신한 보우아치치 1월 5일 장례 후 확산된 청년들의 시위를 지지하며 대중파업을 벌이고 연대했다. 11일에는 튀니지 변호사노동자들이 경찰의 폭력에 맞서 파업을 벌였다. 12월말 이 변호사들은 한 집회에서 시디 보우치드 사람들에 대한 연대를 밝힌 바 있다. 이 과정에서 UGTT는 여러 방법으로 시위들을 조직했다. 이들은 총파업으로 헌법 개정과 노동조합 지도부 석방을 요구했다.

12일경 도시 카저리네에서는 UGTT 지역본부가 약 60명의 경찰들에 의해 습격됐고 탈취됐다. 이때 경찰은 한 남성을 구타하여 그의 모든 이를 부서지게 했다. 노동조합 본부에서 20명이 체포됐다.

14일 벤 알리의 도주 후 UGTT는 민중의 대표자로서 과도정부 구성에 영향을 미쳤다. 벤 알리 추종세력은 주도권을 행사하며 모든 야당세력과 협력하겠다고 밝히고 과도내각을 구성하였으나 UGTT는 과도내각에 파견한 대표자들을 사퇴하도록 했으며 UGTT의 국회의원들 또한 자리를 내놨다. 이후 전여당세력의 척결을 주장하는 시위와 함께 UGTT는 총파업을 조직하고 나섰다.

24일, 25일에는 UGTT 소속 초등교사노동조합이 양일 부문별 파업을 벌였다. “우리는 민중의 요구를 지지한다. UGTT는 낡은 정권을 분쇄하려는 그들의 투쟁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고 교직원노동조합의 한 대표자는 AFP에 말했다. 교사들은 또한 RCD의 교장들과 경영진들이 그들의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파업이후 이들은 성명을 통해 교사들은 지역 본부에 의해 결정된 모든 형태의 투쟁에 함께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분별 파업이 얼마나 포괄적으로 진행됐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출처: http://english.aljazeera.net/]

26일에는 튀니지에서 2번째로 큰 도시인 스팍스에서는 총파업이 시작됐다. 파업노동자들은 총파업을 발의한 UGTT 지역당사 앞에 집결하고 파업을 시작했다. 파업은 정부내 여당 잔재세력에 맞서 발의된 정치파업이었다. 파업시위는 28일까지 3일 동안 계속해서 진행됐다.

전국에서 주민평의회 조직

한편, UGTT는 지역 자위대 조직 또한 발의했다. 자위대는 벤 알리를 지지하던 지역 민병대에 맞서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15일 한 상인은 “무함메디아, 나의 도시에서는 지난 밤 5백명 이상의 청년들이 경비를 섰다”고 <타쯔>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러한 자위대와 연관하여 튀니지 전역에서는 주민평의회가 조직됐다.

반세계화 국제조직 아딱 국제위원회 튀니지 관계자 후고 브라운(Hugo Braun)은 벤 알리 정권의 탄압에 의해 반합법상태였던 튀니지 아딱 회원들의 의견을 기초로 혁명 과정에서 조직된 주민평의회에 대해 19일 <융예벨트> 인터뷰에서 보다 상세히 알렸다. 그에 따르면 무너진 정부는 벤 알리의 친위대를 포함하여 무장한 민병대를 풀어놓았다. 그들은 예전처럼 지역에서 두려움을 확산시키려 시도했다. 이에 맞서 거의 모든 도시들에서 지역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자발적인 주민평의회가 조직됐다. 그들은 구정권의 지지자들, 경찰, 군대 그리고 약탈자들의 습격에 맞서 생활공간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는 부분적으로 노동조합들은 구 체제와 함께 합의했지만 지금 매우 확고하게 대응하고 있고 퇴각한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명하지 않다며, 이제 노동조합권리에 대한 강력한 요구와 “민중재산 재생산”이 명백해질 것이라고 내다봤었다.

<타쯔>에 따르면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전에 조직됐으며 50만명의 조합원이 소속된 튀니스 노동조합은 벤 알리의 RCD당이 대표단을 강하게 압박해 왔지만 특정한 독립성을 가질 수 있었다. 노동조합은 좌파 그리고 모든 종류의 반체제 인사에 은신처 역할을 해왔다. 저항은 대부분 노동조합 앞에서 시작됐고, 지역 총파업의 물결은 결국 벤알리의 추락을 이끌어냈다.

노동조합과 함께 다양한 인권, 시민조직들도 민주주의로의 과도기를 비판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공동의 플랫폼을 세웠다.

한편, 튀니지 공산주의자들은 벤 알리가 달아난 다음 날인 1월 15일 “임시정부 또는 실제적으로 민주적인 공화국의 기본토대인 헌법에 기초하는 회합을 위한 자유로운 선거 조직을 위한 행정적인 권한을 가진 기관”을 요구했다. 그들은 “현장에서 바로 활동적인 민주적 권력과 민주적인 변화를 위한 공동의 전국적인 기관 구성”을 호소했다. 이들은 “민중의 성과 보장을 감시하고 민중으로의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주장했다. 끝으로 이들은 전국의 전 민주적인 동력이 민중운동을 조직하고, 그들 운명을 억압기구의 손에 놓이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만들기 위해 주민들을 위협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자들이 모의하는 파괴와 약탈의 행위 등 반동적 모의를 저지할 지역, 마을, 영역 차원의 위원회, 심의회 또는 협의회에서 조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튀니지 공산주의자들은 이슬람 운동을 민주주의를 위한 정치적 투쟁에서 동반자로서 인정하며 그들 없이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없을 것이다고 내다 보았다. 또한 결국 새로운 국가질서로의 길에 선 민주적 동력의 통일에는 노동연맹 내 발전이 결정적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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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

    정말 너무 궁금했던 내용이 기사로 올라왔네여 정은희기자님 넘 좋아요. 참세상을 지나칠 수 없는 이유!!

  • 좋은 기사입니다.

    좋은 기사이고, 몰랐던 사실, 진짜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중요한 내용을 알려주셨네요. 본문 중 최류탄은 최루탄(催淚彈)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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