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마, 슬픔이 고여 있는 땅과의 인사

[방방곡곡99절절](5) 버마 양곤에 가다

늘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웃을 때도 슬픔이 배어 나왔다. 고등학생 때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일하다 인신의 위험을 느꼈고 탄압을 피해 모국을 떠난 뒤 지금까지 16년 동안 난민으로 지냈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것도 불과 3년이 되지 않는다. 그 시간 동안 사랑하는 사람도 고향도 볼 수 없었고 오직 그리워하기만 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잃었다. 이제는 고향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거린다고 했다. 나이가 마흔이 되도록 결혼은커녕 연애도 해 보지 못한 그가 내게 자기 대신 버마를 다녀오길 요청했다.

그가 잃어버린 것들이 놓여 있을 그곳에 가기로 했다. 버마에 들어간 때는 20년 만에 실시되는 총선이 있은 지 얼마 후였다. 버마는 50년 동안이나 군사독재의 억압통치가 지속되었고 20년이 넘도록 의회가 없었던 나라였기 때문에 버마인 대부분은 투표라는 것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2년 전 통과된 새 헌법과 선거법이 터무니없는 문제들로 가득함에도 총선 실시는 어찌되었든 버마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긴 세월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단어는 물론 선거라는 말조차 책에서도 신문에서도 심지어 사사로운 식탁에서도 금지되어 왔기 때문에 선거라는 새로운 경험이 어떤 변화의 기폭제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재 권력이 군복을 벗고 양복을 입는 것뿐이라는 점은 분명했지만 버마 사람들에게 선거는 그동안 침묵해야 했던 미래에 대해 집단적인 고민을 다시금 던져 줄 가능성도 있었다.

버마 방문의 애초의 목적은 배움의 기회가 결박당한 버마의 어린이들에게 작은 도서관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도서관을 짓고 책을 지원했던 곳을 찾아가 보고 어떤 것들이 더 필요한지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총선에 대한 버마 사람들의 생각이 무척 궁금했다. 버마에 도착할 때는 마침 아웅산 수치 여사가 감금에서 해제되어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버마는 예상할 수 없는 변화 속으로 들어설 것인가. 나의 조급한 기대에 대해 버마 사람들의 대답은 어떨지 마음은 계속 부풀었다.

  버마는 개발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드넓은 평원이 펼쳐지는가 하면, 넓은 강이 잔잔히 흐르거나 굽이굽이 산천이 이어진다.

숨이 막힐 만큼 답답한

버마는 여전히 미지의 나라다. 많은 사람들은 버마를 아웅산 수치 여사의 지난한 독재와의 투쟁으로 표상하거나 북한과 비슷할 것이라고 여기며 다가가기 어려워한다. 실제로 버마로 가는 길이 멀다. 하루 두어 번의 항공편만 허용하고 있다. 힘들여 다가간다 해도 마주하기가 쉽지 않다. 정부가 외국인의 입국과 이동을 제한하고 감시하는 폐쇄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버마를 여행하는 사람이 드물다. 강압적 통제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을 여행의 목적으로 삼으려면 어떤 이유를 불러온다. 버마에서 작은 호텔을 운영하는 한국인 주인도 처음 물은 말은 ‘왜 버마에 왔나’였다. 그리고 바로 다시 물었다. “선교하러 오셨냐?” 그처럼 군사독재가 오래된 버마를 여행한다는 것에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적이 없는 군사정부는 국민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것도 단순히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다. 국민을 노예로 삼고 있다고밖에 할 수 없을 정도다. 국민을 부려먹고도 온갖 세금으로 뜯어먹을 궁리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일자리는커녕 도로도, 전기도, 수도도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으며 온통 엉망으로 방치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노동, 강제이주, 강제몰수가 정부에 의해 자행된다. 대부분의 버마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 처해 있으며 어린이는 절반 가까이가 영양 결핍에 시달린다.

  버마 양곤 인근. 버마에서는 아름다운 강과 평원과 하늘을 만날 수 있다.
만일 낮에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버마를 내려다본다면, 당신은 분명 이 아름다운 땅을 감탄할 것이다. 버마는 개발되지 않은 자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드넓은 평원이 펼쳐지는가 하면, 넓은 강이 잔잔히 흐르거나 굽이굽이 산천이 이어진다. 그 속에서 버마인들은 농사를 짓고 아무렇게나 가축을 풀어 기르고 강에서 고기를 잡는다. 그러나 만일 밤에 그 땅을 내려다본다면, 양곤 시내를 제외하곤 아무런 불빛조차 없는 암흑을 볼 것이다. 만일 버스나 자동차를 타고 다른 곳을 이동한다면 아름다운 자연에 넋을 잃는 것도 잠시, 덜컹거리는 차에 엉덩이를 붙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대부분 마을에 수도가 공급되지 않아 연못 물을 길어 쓴다.
도시에서도 일자리는 없고 대학을 나와도 할 일이 없다. 일을 한다 해도 턱없이 낮은 임금에 일할 의욕이라곤 생기지 않는다. 고생해서 그 돈을 받느니 그냥 텔레비전이나 보거나 요행을 바라거나 구걸을 하는 쪽을 택한다. 버마에서 가장 큰 도시인 양곤에서도 전기와 수도는 아주 제한적으로 공급되고 있어 집마다 자비를 들여 발전기를 사서 돌려야 하고 물도 사서 먹어야 한다. 양곤조차 일찍부터 어둠이 짙게 깔린다.

  양곤의 한 동네에서 1주일간 무료로 버마 쌀국수를 제공하는 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숨 죽여 지내는 것 같은 버마 사람들의 침묵이 아름다운 땅과 대비되어 더 쓸쓸해 보이기 시작한다면, 혹은 늘 따라다니고 있을 것만 같은 감시의 눈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며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신경 쓰기 시작한다면, 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고단한 여정이 될 것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위험하며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위험하며 어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위험하다는 지적을 계속 받다 보면 도대체 원래부터 여기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신기해 보인다.

  첫 번째 도서관을 지원한 바한마을 절 학교. 많은 절이 학교를 못다니는 고아들을 데리고 있다. 소수민족 포함 150여명의 고아가 이 절에서 지낸다.
우리가 지원한 첫 도서관이 있는 양곤 시내 바한 마을의 우 아저씨는 한탄을 섞어 이야기를 했다. 우 아저씨는 젊었을 때는 존경받던 교육자였지만 오래 전에 군부와 관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공교육의 교육자를 포기했다. 그는 늘 밝은 웃음과 유머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희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버마의 젊은이들에게 활기가 사라지고 있다.’ 버마의 젊은이들은 배우려고도 일하려고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 앞에서 축구 경기나 드라마를 보는 것밖에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절망이 깊이 배여 있다고 했다.

  찬따웅 학교에서 공부하는 어린이들. 이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대개 국정교과서 하나와 공책 하나가 전부였다.
버마에는 공립학교를 다니는 어린이가 절반밖에 되지 않으며 학교가 없거나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는 경우가 다수이다. 그래서 마을마다 있는 절에서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최소한의 먹을 것과 함께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해 교실을 만들어 놓고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대개 국정교과서 하나와 공책 하나가 전부였고 이마저도 후원이 없으면 제공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곳은 많은 고아들과 갈 곳 없는 소수민족의 아이들이 잠잘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이곳이 유일하게 안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사원에서만 버마인들은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버마의 속내는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최소한의 말만 나누며 말소리도 낮게 깔렸다. 경계의 눈을 쉬이 거두지 않는 침묵의 분위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유일하게 사원에서만 버마인들은 숨 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공원에라도 놀러 온 듯 사원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둘러앉아 음식을 먹거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거나 조용히 기도를 하는 버마인들이 있었다. 버마인들은 이 짙은 답답함을 어떻게 견디는 것일까. 아픔과 슬픔이 흐르지 않고 가득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버마는 절망을 딛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세 번째로 도서관을 지원할 예정인 따비에깐은 양곤에서 벗어나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거리에 있는 마을이지만 가는 길은 흙먼지의 꼬리를 달고 가야 하는 비포장도로다. 아름다운 버마의 시골 마을을 보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고생은 해야 한다는 듯 아무런 사회기반시설이 없었다. 평원 위로 놓여 있는 외길에 다른 차량은 없어 덜덜거리는 차는 마음껏 달렸지만 몇 대의 오토바이를 제외하곤 이곳에는 아무런 근대적 시설도 물건도 없었다. 따비에깐은 양곤 근교의 작지 않은 마을이지만 오지라고 불러도 될 만큼 큼직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옛날 옛적의 모습이었다.

  따비에깐 마을. 버마에서 가장 큰 도시 양곤에서 1시간 떨어진 마을이지만 오지에 온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마치 시공간을 점프라도 한 듯 일순간 과거의 어느 때 어느 공간으로 들어와 있는 착각에 빠졌다. 세상의 현재 시각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연못의 물을 길어 사용하고 어둠이 깔려도 한참이 지나서야 전등 하나 밝힐까 말까 했다. 그 어둠 속에서 서로를 응시하며 대화가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오늘날 버마의 정치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안을 드러냈다. ‘버마에는 희망이 없어요.’

  스포츠 신문이 내놓은 숨은 메시지. 분홍색 색깔로 표시된 글자만 따라가면 읽을 수 있다. SU FREE, UNITE & ADVANCE TO GRAB THE HPOE(아웅산 수치를 석방하라, 희망을 잡기위해 단결하고 전진하자)
정치에도 관심이 많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는 버마의 한 젊은 여성도 같은 대답이었다. 버마에는 사회단체를 만들 수도 공개할 수도 없어 언제나 비공개로 활동할 수밖에 없지만 여러 활동 단체가 있다. 2년 전 큰 태풍 나르기스(2008년 버마 남부를 강타한 태풍으로, 1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250만 명이 피해를 받았다. 시체가 널려 있을만큼 처참했지만, 버마 정부는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국제구호기구의 입국마저 거부했다.)가 와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이 처했을 때도 이 단체들의 활동가들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었다. 하지만 버마의 젊은이들은 싸우려 하지 않는다고, 정부의 총을 너무 무서워한다고 했다. 일도 하지 않으려 하고 요행을 바라는 사람이 점점 늘어만 간다고 했다. ‘목소리조차 내기 두려워해요.’

그러나 한편 수치 여사의 석방되고 활동을 재개하면서 희망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주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나서 싸우기도 했고 스님들이 나서 싸우기도 했지만 모두 실패했기에 사람들이 이제 체념하는 분위기지만 조금씩 옛날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에이즈 말기 환자들의 쉼터에 방문한 수치 여사를 보기 위해 일찍부터 수많은 버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기엔 수많은 젊은이들의 인파가 있었다. ‘수’(아웅산 수치 여사를 상징하는 애칭)를 외치는 그들은 수치 여사를 마지막 희망처럼 부여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일구지 못하고 상징적 인물에 기댄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들에겐 현재의 분위기를 바꿀 다른 방법은 찾아내기 어렵다는 듯 소중히 했다. 그렇게 이들은 조금씩 열정을 되찾고 있었다.

  에이즈 말기 환자 쉼터를 방문한 아웅산 수치 여사. 수많은 취재진과 더불어 많은 버마인과 젊은이들이 수치 여사를 보기 위해 일찍부터 모여 있었다.

버마 사람들은 상대가 적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면 곧바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처음부터 간직하고 있던 미소였지만 숨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고 엉망이고 지저분하고 불편하지만 이들은 그 모든 빈 곳들을 스스로 채우고 나누며 살아왔다. 이렇게 버마인들은 어떻게든 살아내며 자신의 영혼을 지켜가고 있었다.

분명 버마의 공공 보건과 교육은 경악할 수준이고 구성원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지쳐가고 사회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만성이 된 듯 보인다. 얼마간의 자유라도 사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만 이조차 대부분의 버마 사람들에게는 불가능의 영역이다. 장기간 군부의 지배하에 자유 없이 살아온 많은 평범한 서민들은 신체적 고통과 함께 깊은 피로로 지쳐 보였다.

그렇게 버마는 암흑의 땅이지만, 어쩌면 계속해서 투쟁하고 있었다. 존엄한 생존의 투쟁을 쉼없이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평화와 자유의 뿌리가 무엇이고 인권과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오히려 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노력 없이 이러한 것들은 성취될 수 없다는 점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암담함 속에서 무엇을 할 수가 있을까 하는 나의 의문에 일침을 가했다. 변화가 시작되었을 수도, 아직 아닐 수도 있다. 아웅산 수치가 에이즈 말기 환자 쉼터에서 수많은 버마 군중에게 말했듯 다시 조금 열리기 시작한 변화가 앞으로 무엇이 될지는 다시 버마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간 것이다.

“불교에서 인간은 마지막에 있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우리 버마인들은 고귀한 인간이길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합시다. 더 열심히 살아갑시다.”


* 염창근님은 <버마 어린이 교육을 생각하는 사람들>과 <평화바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버마(미얀마)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1962년 군부의 쿠데타(네윈)로 군사독재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88년에 버마인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민중항쟁(8888항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네윈 정권은 흔들렸지만 소마웅이 친위쿠데타를 일으킨 후 잔인하게 진압했다. 소마웅 정권은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2년 후인 1990년에 총선을 실시해 권력 이양을 약속했다. 총선에서 아웅산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민족민주동맹)이 전체 의석의 81%를 얻으며 승리했지만 군사정권은 권력을 이양하지 않고 수치 여사를 감금했다. 이후 지금까지 의회 없는 군사독재가 계속되었다. 1992년에 소마웅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탄쉐 정권은 2010년 총선을 실시했다. 이번 총선으로 생겨나는 의회는 22년 만이다.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GA)에서는 <2011년 글로컬 페미니즘 학교 수강생>을 모집 중입니다. 관심 있는 분의 많은 지원 바랍니다. 문의: 02-593-5910 l http://www.glocalactivis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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