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에는 별도 소나무도 없었다

[방방곡곡99절절](6) 해발 1500미터 고(高)도시 바기오에 가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기대했었다. 해발 1500미터 위에 있는 도시라니, 지리산 노고단과 같은 높이. 사계절이 없이 일 년 내내 뜨거운 필리핀이지만, 산 위에 있어 일 년 내내 서늘하다는 도시. 그런 상상을 하며 떠났다. 필리핀의 summer capital, Baguio city.

학교의 1년짜리 영어 연수 프로그램을 신청한 것은 조금 충동적이었다.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자는 건 사실 뒷전이고 한국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면접 때 담당 교수가 묻기를 그 나이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쪽 학교 규율을 지키며 지내기가 어렵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 난 대뜸 나도 모르게 이렇게 대답했다.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는 거, 그냥 학교만 다니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아요. “구성작가, NGO 인턴쉽, 바텐더, 결혼식 출장부페… 한국에 계속 있으면 또 생계유지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것이었고, 졸업을 하고나면 또 다른 막막함이 내 앞에 펼쳐질 터였다.

  해발 1500미터 위의 도시, 바기오의 풍경

필리핀을 간다고 해서 특별히 바뀔 일은 없겠지만, 아마도 지금 다시 선택하라고 하면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뭐든 긍정적으로 만끽할 자신이 있었다. 방 한 칸에 열 두 개의 침대, 그 안에 함께 살게 될 열 두 명의 한국인 학생들, 그 중 한 칸의 침대에서 앞으로의 11개월을 지내게 될 터였다. 뭐든 상관없었다. 7시까지 기숙사에 들어와야 하는 가톨릭 학교의 엄격한 규율도 감당해 내면 될 몫이었다.

  언덕길을 누비는 대중교통수단, 지프니
도시는 그냥 도시일 뿐이었다. 언덕 빼곡히 집들이 들어차 있는 도시. 앞에서 보면 1층이지만 반대쪽에서는 지하 2-3층쯤 되는 집들. 사방 어딜 봐도 언덕과 집들뿐이다. 그 언덕들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는 도로와 지프니(지프차를 개조한 필리핀의 대중교통수단)는 왠지 잘 어울리는 조합이 된다. 알록달록한 지붕들과 차주인의 취향대로 칠한 지프니, 지프니들은 각기 다른 고유의 이름을 달고 있다. 어떤 지프니는 ‘사랑해요’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그 차 주인이 한국에서 이주 노동을 했다고 했다. 지프니들이 내뿜은 매연은 해발 1500미터 위의 청정 도시에 대한 나의 상상을 무참히 깨기에 충분했고, 쏟아질 것 같은 별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7시 통금으로 해지면 건물 안에 갇혀야 하는 학생이 무슨 별 볼 일이 있겠냐마는.

내릴 곳에서 “마농, 빠라 뽀” 하고 외치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일도 어느덧 익숙해 졌다. 어떤 지프니를 어디에서 타야 오로라힐에 가는지, 마인스뷰에 가는지도 빠삭해졌다. 휴일이면 혼자 지프니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이 꼭 “당신 혼자예요?”하고 물어보았다. 혼자냐고 자꾸 물어보는 것은 짜증스럽기도 했지만, 이곳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친숙하게 말을 잘 건다. 한국에서는 낯선 사람은 그저 모르는 사람일 뿐, 관심을 가질 일이 없으니까 어색할 만도 했지만, 이들에게는 오히려 한국인들의 그 냉랭함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언덕이 많은 도시는 계단도 많다.
한번은 오로라힐이라는 곳에 가게 되었다. 난 바기오 이곳저곳을 가 보고 싶었고, 그 지명이 마음에 들어서 무작정 지프니를 탔다. 막상 가보니 다른 곳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집으로 가득한 언덕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다 거대한 개한테 쫓기기도 하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하다가 길을 잃곤 했는데, 사실 길을 잃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가야할 목적지도 없었으니까. 오로라힐의 생수 가게 점원과 말을 트게 되었는데, 그곳에 한국인 학생들이 많이 사는데 다들 어찌나 쌩하고 그냥 지나가는지 가끔 기분이 나쁘다고 하였다. 우리에게도 동네 사람들과 인사하며 안부 묻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이들과 눈인사마저 않게 된 건 언제부터였을까. 엄마는 늘 동네 어른들께 인사를 시키곤 했는데, 난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하는 게 어색해서 늘 뾰루퉁해 졌었다. 서울로 이사 온 후론 동네 사람과 인사해 본 적이 없다.

학교 수업은 하루 세 시간 주 5일 동안 이루어졌다. 과목은 모두 영어로 진행되지만, 수업 내용은 오히려 교양 수업에 가까운 것들도 있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그곳의 실태를 파악하고, 봉사 활동을 하는 수업이었다. 일종의 사회봉사 수업인 셈인데, 정규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경우, 특히 간호학과 학생들은 스모키 마운틴처럼 극빈층이 사는 슬럼에 들어가서 기거하면서 실습을 하기도 하였다. 한국 학생들은 비교적 도시에 인접한 바랑가이(마을 단위)에 배정되었는데, 마을의 주요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필요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 주된 과정이었다.

우리는 마을의 캡틴(이장님)의 도움을 받아 학교 교장선생님, 보건소 담당자 등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캡틴의 아들 이름은 킴이었다. 본명은 따로 있고 일종의 별명처럼 불린 이름이었는데, 알고 보니 캡틴과 그의 부인이 한국에서 이주노동을 하던 시절 만났고 그 때 낳은 아들이 킴이었다. 그들이 일하던 공장의 사장님의 성을 딴 것이었다. 킴은 고등학생이었는데, 정치적 문제에 대한 견해를 뚜렷하게 밝히곤 해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그곳 학교 시스템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바로 넘어가기 때문에 한국의 중학생쯤 되는 나이일 터였다. 마을은 집성촌은 아니지만 캡틴의 형제나 친척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일을 하러 뉴질랜드로 떠난 지 몇 년 째였고, 가까운 친척들 중에도 이주한 이들이 많았다. 아들과 둘이 살고 있다는 캡틴에게선 그래서인지 기러기아빠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킴의 가족과 함께 한 조촐한 점심식사, 가운데 놓인 것이 김치다.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이 그들의 밥상에 김치를 올려놓았다.

이주는 이들의 일상이다. 마을을 돌아다니다보면 좋은 집들이 종종 눈에 띤다. 아주 좋은 집들은 대체로 해외에서 이주해 온 이들이 사는 곳이다. 그리고 현재 짓고 있는 집들이 있다. 가족 중 이주한 이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차곡차곡 짓고 있는, 언제 다 지어질지 기약할 수 없는 그런 곳들. 가족 중의 누군가는 해외에서 일을 하고, 돈을 보내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을 조사를 하면서 파악했던 자료에 따르면 한 달에 1만 페소 이하의 소득을 얻는 가구가 89%나 되었다. 1만 페소는 당시 환율로 한국 돈 25-30만원 정도였는데, 한국 학생들이 생활비로 한 달에 최소로 쓰는 돈이 그 정도 되었을 것이다. 물론 비자 연장 등의 명목으로 상당한 돈을 내야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초등학교는 무료 급식 프로그램이 꼭 필요했지만, 예산을 지원하는 곳이 없어서 모두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들어와 있던 같은 학교의 필리핀 학생이 하는 일은 약 8퍼센트쯤 되는 탈학교 학생들을 줄이고 지원하는 프로젝트였다. 학생들은 차비가 없어서, 너무 이른 결혼 때문에, 부모가 돌보지 않아서 등의 이유로 학교를 무단결석하거나 그만 두곤 했다.

학교 기숙사 근처 출입구 근처에는 딸랑딸랑 종을 치며 “아이스크림”을 외치는 아이스크림 가게 점원 엘라와 마이가 있었다. 난 그곳에서 원두커피나 그린망고쥬스를 마시면서 따갈로그어(필리핀 공식언어)를 한 두 단어씩 배우곤 했는데, 우린 금방 친해져서 같이 우범지대에 당구를 치러 가기도 하고, 등산을 가기도 하였다. 산토 토마스 산은 아마도 꽤 높을 터이지만 바기오 자체가 워낙 높은 곳이라 조금만 올라가도 되고 사실 정상까지 차가 올라갈 수 있는 도로가 있었다.

어느 정도 올라가다가 트럭 한 대가 지나가서 우린 차를 얻어타고 정상에 올라갔으니 사실 등산을 갔다고 하기도 민망한 일이었지만, 바기오의 가장 높은 언덕에 오르자 그곳에는 더 이상 지프니도 매연도 없고 빽빽이 들어찬 집들도 없었다. 아마도 바기오가 지금과 같은 도시가 되기 전에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나이든 사람들을 만나면 모두들 “예전에는 바기오에 소나무가 정말 많았지, 매연도 물론 없었어.” 그런 얘기를 하곤 했다. 이제 바기오 시내에서는 캠프 존헤이나 가야 소나무를 겨우 볼 수 있다. 캠프 존헤이는 원래 미군을 위해 만든 휴양지였는데, 미군 시설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자연이 보존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까.

  산토 토마스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능선

그곳에 살다보면 어느덧 해발 1500미터 위라는 것은 금세 잊게 된다. 기후가 서늘한 것 외엔 다른 지역과 별로 다르지 않다. 기후가 서늘한 덕에 싱싱한 채소를 맘껏 싼 값에 살 수 있다거나 시장에 가득 쌓인 딸기를 볼 수 있다는 것 등을 제외하면. 하지만 바기오를 벗어나 저지대로 내려가려면 멀미 정도는 각오해야 할 것이다. 한 시간을 줄창 구불구불 길을 따라 내달리는 버스를 타야할 테니. 언젠가 다시 그 길을 오르는 버스를 다시 타게 될까. 문득 밤이 되면 온 언덕을 메우던 불빛들이 그리워진다. 하늘에 보이는 별들은 줄어들고 있을 것이고, 그 언덕들은 불빛들을 하나씩 더 늘려가고 있을 것이다.

  “바기오가 왜 시원한지 알아요?” 기타 선생님 앤드류가 물었다. “왜요?” “산토 토마스 산 꼭대기에 두 개의 거대한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거든요. “ 엉뚱한 농담이지만 꽤 그럴 듯하다. 산 정상에 올라가면 정말 선풍기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다.
덧붙이는 말

* 필자인 니나 님은 천천히 느릿느릿 발걸음을 디디고 살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들이 하고 싶은 일만큼이나 많아 아직은 바쁘게 살고 있는 중이다. 아시아의 창과 성인종차별반대공동행동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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