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그 이름 아래서 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다.”

[낡은 책] 관부연락선 (이병주, 신구문화사, 1972, 682쪽)

<관부연락선>은 두 개의 시공간이 나온다. 소설은 1940년대 일본 유학생 유태림의 시간과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 유태림의 친구이자 관찰자인 ‘이 선생’의 시간을 옮겨 다니며 처음 읽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소설은 편지로 시작한다. 30년 전 동기였던 일본인 E로부터 온 편지. 일본 유학하던 유태림이 나온다. 해방 후 유태림은 당대의 두 이데올로기 중 어느 것에도 동조하지 않는다. 우파도 좌파도 아닌 제3의 길을 택한 유태림.

<관부연락선>은 해방 공간에서 도쿄 유학생 시절 같은 학교 친구였던 유태림이 관부연락선을 조사하면서 쓴 기록을 해방 공간에서 교사인 ‘이 선생’이 유태림의 삶을 쫓아가며 관찰한 기록으로 나누어져 있다. 두 기록이 교차하면서 하나의 장이 이 선생인 ‘나’의 기록이면 다음 장은 유태림인 ‘나’의 기록이다.

이병주는 유태림을 통해 관부연락선을 도버와 칼레 사이의 배, 사우샘프턴과 르아브르 사이의 배에 비할 때 영락없는 수인(囚人)선이라고 적으면서도 이를 맹목적 국수주의로 몰아가지 않는다. 그 책임의 8할은 오히려 조선에 있다고 자인한다. 을사조약에서 한일병합에 이르는 역사 속에 우리 지식인이 범했던 민족적 과오의 반성이다.

국제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 박정희 혁명정부에 대거리 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3년을 보내고 나와 44살에 늦깍이 작가로 출발해 한맺힌 듯 매달 원고지 1천장을 쓰고 해마다 만년필을 몇 개씩 갈았던 나림 이병주. 너무 다작(多作)해 수작(秀作)이 없다는 혹평에도 “나는 한이 많아 글을 쓴다”고 했던 나림. 나림의 소설은 이국적이다. 이국 취향의 종점은 스웨덴식 민주사회주의로 연결된다.

지리산 빨치산이었다는 세간의 풍설을 잠재우려고 이병주는 “여순반란사건이 대한민국정부를 위해서는 꼭 필요했던 시련”이라고 기록해 확신에 찬 보수주의자의 논리적 자기 정리에 이른다. 이병주는 이승만 정권 수립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다고 변호한다. 이병주를 가장 잘 아는 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이병주의 주장은 보수 우익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엄호했다.

이병주는 몽양의 좌절은 이 나라 지식인의 좌절이며 몽양과 더불어 상정해 볼 수 있었던 모든 가능성의 말살이라고 개탄했다. <관부연락선>의 맨 마지막 문장은 좌절한 지식인의 울분을 최상의 표현으로 마무리한다. “운명.... 그 이름 아래서 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다.”

이병주는 <작가 부기>에서 “소설이라는 각도에서 볼 때 <관부연락선>은 다시 달리 씌어져야 한다”고 적었다. 반면 송지영은 ‘발문’에서 “이처럼 감동적일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병주의 3부작은 <관부연락선> <지리산> <별이 차가운 밤이면>이다. 이병주는 식민지의 변두리 진주 농고생이었다. 모종의 사건으로 퇴학당했고 혼자 일본 경도 거리를 헤매며 고학으로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악전고투 속에서 키워진 자존심이야말로 3부작을 이루어낸 원동력이다. 3부작에 일관된 중심축은 이른바 1920년대 ‘인민전선’ 이후 일본 고등교육의 ‘교양주의’다. 이는 경도 체험과 분리되지 않는다. ‘교양주의’가 학병 문제에 부딪치고 증폭돼 이루어진 게 작가 이병주 문학이다.

<관부연락선>의 갑판 위에 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3등 객실에 몸을 구겨 넣는 한국인. 송병준 같은 매국노는 일등 빈객으로 당당히 배에 오른다. 이병주는 누군가에게는 영광이면서 또 다른 이들에게는 굴욕의 길이었던 관부연락선을 철저하게 파헤친다. 그 자신 관부연락선에 몸을 부린 식민지 청년이었으니까.

이병주의 소설 속 등장인물은 대부분인 실존했던 사람이다. <관부연락선>에서 유태림 주변을 맴돌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려했던 사회주의자 ‘서경애’는 실존하는 인물이다. 이병주는 언젠가 “애인으로, 지식인으로도 존경할만하고, 사랑할 만한 이 여인은 작중에선 행방불명됐지만 실제는 행복한 결혼을 하고 지금 대구에서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병주의 생활은 사치스러웠다. 70년대에 볼보차에 기사를 두고 다녔다. 차 안엔 고급 스테레오를 하고 베토벤을 들었다. 고급 양복에 빨간 넥타이와 양말, 술은 코냑을 병째 시겼다. 하동 지주의 아들이었기에. 이병주의 여성편력은 유명하다. 미국에서 온 도덕재무장운동(MRA) 여성 활동가를 꾀어 도덕무장 해제시키기도 했다.

이병주는 주한 프랑스대사 샹바르와 친했다. 샹바르에게 1년 프랑스 유학 국비장학금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사는 1년 유학 주선을 즉석에서 약속했다. 이병주는 <르 몽드>를 즐겨 읽었다. 70년대 관철동 맥주집 낭만과 사슴에는 이병주 송지영 조덕송 박맹호 등이 단골이었다. 이병주의 소설 ‘낙엽’을 연극으로 연출하던 일류 여배우 겸 연출가가 이병주와 함께 나타나기도 한 곳이 사슴이다. 이병주는 주택관계사업도 했다. 이런 이병주를 두고 전직 노동부장관 남재희는 “추종을 불허하는 독서 양과 박식, 체계 잡힌 역사적 안목, 문학인이기에 얼마간 퇴폐미가 있는 진보적 리버럴리즘”이라고 변호했다.

나림은 <관부연락선>에서 소설에선 퍽 낯설게도 각주까지 달아 본문 속 인물들을 해설한다. 대부분 그가 학병으로 끌려가 중국 대륙에서 보았던 한국의 청년 공산주의자들의 모습이다. <관부연락선>에서 첫 번째 각주가 달린 인물은 안달영이다. 이병주가 기억하는 안달영을 옮겨 본다.

본문의 안달영은 가명이지만 6.25 전후해 실존했던 인물이다. 그는 귀국하자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당 간부로 활약하다가 6.25 몇 달 전 체포돼 전향하고 이주하 김삼룡을 잡아 대한민국의 관헌에 넘겨줬다는 사실이 오제도 검사의 <붉은 군상>에도 나온다. 1963년 8월 3~6일 4일 동안 걸쳐 열린 ‘박헌영=이승엽 등에 대한 평양재판의 기록’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피고 이승엽은 50년 7월 초 자기들의 매국적 범행의 비밀을 아는 자들을 학살할 목적으로 안++를 두목으로 하는 살인단체, 즉 토지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 후 상부에서 해산 명령했지만 이승엽 일당은 테러와 학살을 계속했다. 50년 7월 하순 피고 이승엽은 안++이 이주하 김삼룡을 잡아 넘긴 사실이 드러나자 박헌영과 협의한 끝에 범행을 은폐할 목으로 전선에 동원되는 박종환 부대에 안++를 배속시켜 이 부대에게 안++을 처단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 재판 기록의 신빙성은 알 수 없지만 안++에 관한 부분만은 오제도 검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오제도 검사의 <붉은 군상>은 재판 기록보다 2년 쯤 앞서 나왔다.

나림은 소설 속에서도 역사를 공부한다. 동경 유학시절 한국인 친구와 대화하면서 “다산은 한국의 마르크스다. <목민심서>는 <자본론>이다. 다산은 결단코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과학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했고, 정약용도 과학적으로 이조사회의 민생을 분석했다. 그게 동학란의 불씨가 됐다”고 평가한다.

나림은 어떤 땐 분노에 사무쳐 소설 속에 본명으로 사람을 고발한다. <관부연락선>에선 이만갑(李萬甲)이 대표적이다. 나림은 “이만갑은 본명”이라고 밝히고서 “일제 말기 관부연락선 안에 있던 수상(水上)경찰서의 특고였다. 일제 말기 관부연락선을 이용한 사람은 이 이름을 들으면 기억할 것이다. 이만갑은 8.15 해방 직전, 고향인 경남 창원군 진동면에서 살 수가 없어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지금 버젓한 재일교포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에 본명을 기입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자에게 화를 입은 많은 동포를 위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라고 적었다.

나림의 소설을 읽다보면 가끔씩 역사책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버마의 아웅산과 여운형이 같은 날 암살 당했다며 날짜가 1947년 7월 19일로 기록하는 소설을 본 적이 있던가. 아웅산은 버마의 예난자웅에서 1915년에 태어나 랭군대학에서 법을 공부했으나 학생운동에 빠져 중퇴했다. 아웅산은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했을 때 파모 정부에 참여해 국방상과 군 사령관의 요직에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일본의 도움으로 얻은 독립에 의혹을 품고 항일 지하단체를 조직했다. 1945년 3월 영국군에 호응해 일본군 소탕작전에 참가했다. 1947년 1월 영국의 승인을 얻어 4월 제헌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 주석이 됐는데 1947년 7월19일 각의(閣議) 도중 반대파의 습격을 받고 각료 4명과 함께 살해됐다.

<관부연락선>은 나림의 작품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높다. 결말 부분의 해설은 역사 다큐멘터리 같다. 유태림이 한국전쟁 통에 납치된 지 10년이 흘렀다. 어떤 수단을 다 써도 그 후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그를 쫓아 지리산으로 들어간 서경애의 소식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유태림과 서경애가 산 속에서 만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물론 알 길이 없다.

나는 아득한 옛날 프랑스 파리 어느 거리에서 만난 절름발이 거지를 생각한다. 나는 다리를 어디서 다쳤느냐고 물었다. 그는 외인 용병부대에 갔었다고 했다. 뭣 때문에 갔느냐고 되물었더니 그는 품위와 위엄을 갖추고 답했다. “‘운명’이라고. 운명..... 그 이름 아래서만이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 - 1943년 11월 유태림, E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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