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함께 정지하지 않는 삶과 문화

[방방곡곡99절절](9) 일본 나라현에 가다

‘세계문화유산의 보고’, ‘일본 속의 백제혼’, ‘일본속의 작은 한국’’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는 일본, 나라현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다. 심지어 어디에선가는 우리 나라의 공주나 부여와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2009년 친구가 공부하고 있는 동안 찾아갔던 나라현은 고대유물로 박제된 고장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상, 절, 원시림, 사슴들이 오가는 공원에서 사람들은 대를 이어 생업을 유지하고 예술작업을 하고, 축제를 벌이면서 지역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1999년 배낭여행이 한참 유행할 때 아르바이트한 비용으로 처음 간 나라가 일본이었다. 그 때 나라에 들려서는 너무 덥기도 했고 여행책자의 안내만을 따라 나는 절을 배경으로 사슴과 열심히 사진을 찍었을 뿐이었다. 유명한 고대 유산들이 많아 좋겠다는 생각보다는 그 덕에 관광 수입으로만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아닐까, 또 젊은이들은 시간이 멈춰 버린 듯한 이 동네에서 다들 벗어나려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마 한국의 전통 마을들을 방문했을 때 느꼈던 정체된 우울함이나 한계성을 이 지역에도 적용시킨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를 안내해준 친구는 공부를 하면서 틈틈이 단골 식당, 까페를 만들었고 원시림과 절들 사이를 일상의 산책로로 일구어 놓았다. 이곳에 사는 분들과 안부를 나누고 이 지역의 음식을 먹고 그들과 생활하고 있었다. 덕분에 말 그대로 지역 여행을 할 수 있었다.

하루 일과에 대한 축복 같은 산책길

  나라에서 만난 산책길

나라의 주요 장소들은 거의 다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친구는 몇 달 사이 자신의 산책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집 뒤를 나서면 영화 <너를 보내는 숲>의 가와세나오미 감독이 운영하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까페가 있고 근방에는 직접 천을 염색하여 만든 직물 제품을 파는 가게가 있다. 나라공원 근처의 연못을 구경하며 이끼 낀 돌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그야말로 보호받고 지내는 사슴들이 어슬렁 거리고 있다. 하지만 사슴 말고도 이 고장에서 보호받고 있는 생물들이 더 많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널직한 돌길 양 옆으로 수로가 있고, 일어로 개구리 같은 생물들이 있으니 그들을 죽이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자그마한 표지들이 띄엄 띄엄 붙어 있어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버리게 된다.

  도다이샤 절, 고후쿠지

나라 공원을 가로 질러가면 금방 만나게 되는 도다이샤 절, 고후쿠지는 워낙 오래 된 사찰들이라 해가 지기 직전인 데도 관광객들이 꽤나 많다. 그 보다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우리처럼 산책 혹은 운동 삼아 나라 공원 뒤에 있는 산을 오르는 주민들. 나라 공원과 이어지는 해발 342미터의 와카쿠사 산은 뒷산 치고는 가파르다. 살짝 차오르는 숨을 내뱉다 보면 눈앞이 트이고 나라 시내가 보이며 사슴들과 함께 뛰어다닐 수도 있다. 여기저기 수풀 사이 사람들이 앉았던 자국이 둥글게 남은 것이 재미있다. 내려오다가는 탑을 돌며 기도를 하거나 명상을 하면서 쉬기도 한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절과 산들은 관광객의 전유물이 아니라 주민들의 운동터이기도 하고 쉼터이기도 하다. 어쩔 땐 관광객으로 있는 사실이 무색해 지기도 한다. 다소 컴컴해진 산길 내려가는 길엔 친구가 종종 들리는 반찬집이 있어서 봉지 한개씩 들고 덜렁덜렁 내려오면 배가 고파진다.

조금 더 길고 조용한 산책을 원한다면 가스가야마(春日山)라고 하는 원시림을 갈 수 있다. 9세기 중반부터 수목의 벌채를 금지 해왔기 때문에 보존되어 가스가타이샤는 주변 경관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한낮에도 울창한 나무들 덕에 어둡고 서늘하다. 넋 놓고 걷다가는 어두워져 무서울 정도이니, 뒷산이라기엔 영기가 가득하다. 신기하게도 여기에도 운동삼아 뛰거나 삼삼오오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 기척 따위로는 아랑곳 않는 숲. 축축한 땅을 밟다 보면 나도 그 일부인 듯하다. 가스가야마는 평지가 아니라 낮은 산과 같은 지형인데 정상에 오르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기 때문에 배가 많이 고파지고, 그러면 단골 반찬집에 들려 몇 가지 구입하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터덜터덜 돌아온다.

까페메구리가 가능한 나라마치, 남루하지 않은 식당 난루

  식당 ‘난루’

식사는 가급적 친구와 함께 했는데 인스턴트 음식점이나 체인점은 거의 가지 않았다. (사실 그런 음식점이 거의 없다.) 산책을 다녀와 사온 반찬으로 밥을 해먹거나 친구의 단골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저렴한 가격에 깔끔한 부페식 식사를 할 수 있는 국립대학교 내 식당도 좋았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그녀의 단골집인 ‘난루’. 작은 나무 미닫이 문을 열면 넓은 나무 마루와 그야말로 화려하지 않지만 애정이 담긴 식탁들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식탁마다 꽃이 놓여져 있고 식기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멋스럽다. 어머니와 딸이 이어서 하고 있다는 이곳에서 내놓는 라자냐와 손바닥만한 피자, 커피를 먹는다. 손수 반죽을 하는 모양으로 촉촉하고 단정한 맛이 요리하는 사람의 정성이 느껴지는 밥상. 일본에서는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기 때문에 빵이 훨씬 부드럽고 맛있다고 한다. 식당 한켠에서는 몰랑한 애기 볼같은 빵들을 구워내고 있어서 몇 개를 사고 친구는 주인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다. 친구가 곧 떠난다니 일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아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녀가 매우 큰 고객은 아니었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의 안부를 걱정하고 잘되기를 바래주는 살뜰함이 고맙다.

친구가 공부를 하거나 자기 일을 하는 동안은 나라마치에 혼자 나가 어줍잖은 일어와 몸언어로 길을 물은 후 근방에 있는 까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가게들을 구경하곤 했다. 나라마치는 8세기 후반 지어진 나라의 7대 사찰 중 하나인 간코지 절의 일대 지역을 일컫는 말로 17~19세기 마을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조용하고 고즈넉한 거리이다. 근래에는 옛 집들을 보존하여 분위기 있는 까페나 음식점들이 들어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겨우 한명씩 지나다닐 만한 골목길이 어찌나 많은지 매번 새로운 까페 찾아내기가 보물찾기처럼 즐거웠다. 까페 주인들은 하얀 머리를 곱게 빗어 올린 아주머니일 때도 있었고 손톱과 눈을 까맣게 화장한 카리스마 있는 언니일 때도 있었고 관광객 손님뿐만 아니라 남녀노소의 주민들이 찾아오는 듯 했다. 점심시간 즈음 반백의 머리에 양복차림을 한 사내가 차 한잔을 마시며 까페 주인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전통 옷차림을 한 여인이 혼자 앉아 다과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잠기면 시간은 훌쩍 지나가 버리곤 한다. 친구는 나처럼 까페 찾아다니는 일을 ‘까페메구리’라 한다고 알려주었다. 사실 관광객들에게는 전통 차, 악세사리 및 공예품, 그림, 직물등을 파는 가게들이 표시된 지도가 있어서 그 지도를 보고 오손도손 줄지어 있는 거리를 다닐 수 있다.

  지역 방송국 모습

그 가운데 자리잡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은 신선한 발견이었다. 그곳도 옛집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유리로 창을 만들어 두어서 아무나 들어가서 녹음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 지역 문화 행사에 대한 소소한 전단지들을 놓아서 가져갈 수 있게 해두었다. 걸어가다 들릴 수 있는 라디오 방송국이라니. 그야말로 흥이 나는구나. 우리는 여기에서 나라 국제 영화제 개최를 앞두고 프리 영화제와 이벤트가 있다는 소식을 접수하고 일정을 맞추기로 한다.

국제 영화제이기 전에 우리들의 축제

2010년 제1회 나라 국제 영화제를 앞두고 프리(pre) 영화제와 행사들이 하루 종일 나라현청사 근방에서 열렸다. 모범적인 가을 하늘아래 지역 문화제가 열려서 낮에는 나라 현청 앞에서 지역 예술가들이 공연을 했고, 공예품 가게, 차& 커피 가게 등에서 제품들을 가지고 나와 선보였다. 참가 자격에 제한은 없는 듯하다. 개인이 나와 다도를 직접 알려주는 곳도 있었고, 직접 만든 인형들을 예쁘게 전시한 곳도 있었다. 정해진 규격의 행사 부스에서 정장차림으로 힘겹게 제품 홍보에 힘쓰는 직원들의 모습이 정부 행사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인데 그날의 행사는 전혀 달랐다. 주민들끼리 날 잡아 즐기는 축제같다는 생각을 했다. 공연을 위한 거대한 무대와 음향 시설은 없었지만 밴드는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연주했으며 청중들은 힘껏 환호했다. 청사에서는 한국 영화 '나무없는 산'을 상영하고 있었다. 상영은 무료였고 청사직원들이라 생각되는 분들이 안내를 열심히 해주었다. 화장실이며 각종 시설을 이용하는 데 통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조금은 어색했다.

  야외 영화제 상영 모습

저녁에는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이 지역에서 뽑은 배우들로 제작된 영화를 야외에서 상영했다. 저녁 식사로 영화배우들이 나와 직접 요리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는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도 상당히 밝은 표정으로 대해 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영화 주 소재이기도 한 전통 무용 공연 후 커다란 스크린으로, 자막도 없었지만 그 며칠 새 돌아다닌 나라의 곳곳이 배경으로 나오는 영화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사라소주 (2003)이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며칠 사이 걸어 다니던 거리가 나오자 반갑고 신기했다. 하물며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 기분은 어떨까. 당시 주인공으로 나왔던 학생들이 영화 전 인터뷰를 했는데 배우를 하고 있기도 했고 다른 길을 걷고 있기도 했다. 실제 영화제도 아니고 그 영화제를 홍보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온전한 축제와 같았다. '국제 영화제' 이기 전에 '나라'라는 지역의 것들을 마음껏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제 행사 모습

이런 국제적인 행사를 유치한 정치인 혹은 관련인들이 앞으로 나오지 않고, 이 행사로 인한 경제적 이익이나 긍정적 효과를 선전하는 사람도 없었다. 2010년 10월 열렸을 제1회 나라 국제 영화제의 분위기를 알고 싶었는데 부족한 일본어 실력과 국내 인터넷에 제한된 정보로는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아마 그때와 다름 없이 따뜻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아래 진행되었을 거라 믿는다. 올해는 대지진과 원전 사태 때문에 어떻게 영화제를 이어나갈 수 있을지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나라에는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슴들이 유유자적 공원 일대를 다니고 있었고 절과 길, 불상, 숲은 거의 변함없이 관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와 함께 변하고 있다. 누군가의 관광지인 산과 길을 운동코스로 걸어다니고 있으며 다양한 지역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10년 간격으로 같은 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행운인 듯하다. 지역의 물리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그 고장에 대한 나의 생각, 느낌의 변화까지도 확인하게 해준다. 여행 책자들은 최소한 1년 단위로 업데이트를 하지만 그들이 기록하는 것은 앞으로 변하지 않거나 자연적으로 소멸할 유적, 과거의 흔적인 관광지와 숙소, 물가, 쇼핑정보 위주이다.

그들은 나에게 그 지역의 삶과 문화의 변화에 대해서는 갱신된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여행 책으로도 가능해 질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지역 여행을 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은 여유 있게 머물러 지정된 관광지 외에 주민들이 다니는 길을 걸어 다니는 것, 그곳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몸 언어는 언제 어디서나 위대한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 많은 사람들이 나라에서 이 세 가지만 했더라도 '일본속의 작은 한국' 외에 수많은, 다양한 표현을 하고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또한 이런 여행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원전 사태나 지진에 대해서 '일본 한국에 저지른 천벌을 받은 것'이라던가 '일본 재앙은 한국에 이익' 이라던가 '일본이 한국의 방파제' 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우리는 같은 시간에 숨쉬고 생활하며 비슷한 일들로 희노애락을 경험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부디 그 날 본인이 가던 길 반대편이지만 길 잃은 나를 위해 같이 걸으며 웃어 주었던 아주머니, 친구에게 따뜻한 빵을 포장해 주며 인사하던 식당 난루의 주인 모녀, 나무 아래 잔디에서 다도 시범을 보이던 여인, 모두들 평안하기를 바래본다.


*쿠나님은 언니네 여성전용여행살롱 시스투어에서 베트남, 오키나와 등 평화여행을 기획 및 참여했고, 힐링센터 겸 여성전용게스트하우스 운영을 꿈꾸고 있습니다.

* 방방곡곡99절절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가 기획연재하고 있습니다. www.glocalactivis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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