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를 압살하고 나치를 불러 온 바이마르

[낡은책] 바이마르 문화 (피터 게이, 1969, 조한욱 번역, 탐구당, 332쪽)

독일 ‘바이마르 시대’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19년부터 나치가 집권한 1933년까지 14년 동안의 세월을 말한다. 바이마르 시대는 독일의 정치, 사회, 문화, 예술에서 가장 독특한 시기였다.

철학자 피터 게이

  피터 게이
저자 피터 게이(Peter Gay)는 1923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히틀러에게 추방당한 뒤 1960년대 미국 예일대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피터 게이는 이 책을 바이마르 정신의 대사, 역사학자 ‘펠릭스 길버트(Felix Gilbert)’에게 헌정했다.

피터 게이는 <계몽의 철학>의 저자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의 제자다. 피터 게이는 1967년과 1969년에 <계몽사상>이라는 두 권짜리 책을 냈다. 두 책의 부제는 ‘근대 이교주의의 흥기’와 ‘자유의 과학’이었다. 게이는 계몽사상을 합리성의 발전에 따른 인간 자유의 확대로 봤다. 계몽사상의 본질을 자유와 진보로 규정했다. 그렇다고 계몽사상이 아예 비판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의 낭만주의자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합리성을 중시하고 추상적인 생각에 의존해 인간행위에서 역사성을 경시한다고 비판했다.

번역자 조한욱

역자 조한욱은 1969년 펭귄판으로 나온 <바이마르 문화-국외자들의 내부>를 완역했다. 조한욱은 1954년 서울서 태어나 77년 서강대 사학과 졸업, 81년 서강대 사학과 석사(막스 베버의 가치 개념)를 거쳐 1983년 이 책을 번역할 당시 텍사스 주립대 서양사 박사과정 중이었다. 2008년 현재 조한욱은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다. 조한욱은 <고양이 대학살> <문화로 본 새로운 역사>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프랑스혁명의 가족 로망스>등을 옮겼으며 사상사, 문화사, 역사이론에 관한 글을 여러 편 썼다. 조한욱은 최근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책세상, 2000.7.25)를 썼다.

독일 문화의황금기, 나아가 세계 문화의 황금기를 만들었던 바이마르는 동시에 나치 쇼비니즘을 불러들인 나약한 지식인 권력이었다.

[출처: 영문판 표지]
14년간(1919~1933년)의 추억 : 1차대전 끝부터 나치 집권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은 겨우 40년 전인 1933년에 소멸했지만 벌써 이것은 전설이 됐다. 1933년 나치가 독일을 장악했을 때 시작된 대탈출은 역사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 에르빈 파노프스키(미술사학자, 1892-1968, 미술사의 고전인 ‘알브레히트 뒤러’(한길아트, 1943, 2권), 발터 그로피우스(건축가, 1883-1969, 대표작 ‘팬아메리칸월드항공사빌딩’), 게오르게 그로스(표현주의와 다다이즘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예술가, 화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1866-1944, 파리 정착), 막스 라인하르트(음악가, 연출가), 브루노 발터(음악가, 지휘자, 1876-1962), 막스 베크만(미술가, 판화가), 베르너 예거(철학자), 볼프강 쾨엘러, 파울 틸리히(신학자, 목사, 1886-1965), 에른스트 카시러(이 책 저자인 피터 게이의 스승, 철학자, ‘인간이란 무엇인가’, 1874~1975), 칼 만하임(사회민주주의적 입장에 서서 저술활동을 한 독일의 사회학자, 1893-1947, 영국 정착, 런던정경대 교수) 등 눈부신 망명자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이들을 생각할 때 바이마르는 높은 독창으로 갈등과 부채 없었던 진정한 문화의 황금시대였다.

바이마르 탄생 : 케테 콜비츠 탄압한 벨헬름 황제

바이마르 직전 벨헬름 황제는 프롤레타리아 포스터 때문에 케테 콜비츠를 탄압했다. 지배권력은 새 예술이 역겨웠다. 바바리아의 정치가 쉴링스퓌르스트 공은 1893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극작가 1912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연극 <한네의 승천>을 보러 갔다.

황제는 일기에 “기괴하고 야비한 사회민주주의, 사실주의 작품이자 동시에 역겹고 감상적 신비주의로 가득 차 있어 신경을 괴롭히며 전체로는 혐오스러웠다. 보고 나서 우리는 보르하르트 주점으로 가 샴페인과 캐비어를 먹고는 인간의 기분으로 되돌아왔다”고 썼다. 그러나 황제의 독일은 속물이고 억압하긴 했지만 독재는 아니었다.

바이마르 양식은 대부분 바이마르 공화국 이전에 태어났다. 바이마르 공화국 때 새로 나온 것은 거의 없었다. 공화국은 이미 있던 것들을 풀어 놓았을 뿐이다.

1차 대전의 쇼비니즘은 바이마르 양식에 단순히 해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이었다. 1차대전은 세계와 독일 문화의 유대를 파괴했다. 1915년 전쟁 중에 페이비안 사회주의자이자 저명한 심리학자였던 그레이엄 왈라스는 독일의 수정 사회주의자인 자기 친구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에게 “다시 평화가 왔을 때 당신과 내가 서로 만나 악수하고 문명이 입은 상처를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구제할지 마주앉아 생각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편지에 썼다. 무너진 유대를 회복하는 게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적 임무였다. 1918~1919년 독일 혁명은 처음에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건축가로 1918년 말 이탈리아 전선에서 휴가를 내 베를린으로 여행하면서 혁명을 맞았다. 그의 지적 진전은 전쟁에서 정치성을 얻고 혁명에서 표현력을 얻었다. 혁명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에게 정열을 불러일으켰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혁명을 충동적 기쁨으로 환영했다. 혁명이 여러 이유로 여러 사람들을 기쁘게 했듯, 혁명의 결과는 여러 이유로 여러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판자(보수)를 만족시키기엔 지나칠 정도로 성공이었고, 지지자(진보)들을 만족시키기엔 불충분했다. 릴케는 1918년 12월에 벌써 모든 희망을 잃어 버렸다. 혁명은 비정한 소수의 수중에 떨어졌다. 진보적 출판가 파울 카시러는 같은 시기에 혁명을 ‘단지 대협잡’이라고 규정했다.

1918~1919년 독일 혁명의 소용돌이

1918년 10월 28일 키일의 해군기지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 혁명은 피할 수 없는 듯했다. 1918년 11월 8일 이상주의 독립사회주의자 쿠르트 아이스너는 바바리아에서 공화국을 선포해 스스로 수상이 됐다. 이와는 달리 막스 폰 바덴 수상은 황제의 폐위를 단호하게 요구했다. 그는 사민당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자신의 뒤를 잇게 한 뒤 황제의 퇴위를 선언했다. 그날 밤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피신했다.

1918년 11월 9일 오후 우파 사민주의자 필립 샤이데만은 공화국을 선포했다. 샤이데만은 순수한 공화주의 열정이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소비에트 공화국 선포를 앞지르려는 욕망에서 출발했다. 몇 분 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샤이데만의 행동을 알았을 때, 에베르트는 규칙을 어긴 회의진행에 격노했다.

사민당은 오래 전부터 다수당이었지만 1914년 이전부터 팽팽한 내분상태였다.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받든 과격파와 이념은 잊고 노동자의 높은 생활수준을 추구하던(?) 노동조합파, 그리고 말은 혁명가처럼 하지만 행동은 의회주의자처럼 하던 기능파로 나뉘어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최대, 최고의 적은 좌파 안에서 벌어진 내란이었다. 내란은 공화국이 선포되자마자 일어났다. 베른슈타인은 이를 두고 “사회주의자의 사회주의자에 대한 투쟁”이라 했다. 결국 샤이데만의 바이마르 공화국 선포는 군주제가 아니라 스파르타쿠스단을 겨냥한 행동이었다. 1918년 11월 제국의 폐기와 함께 두 개의 경쟁적 사회주의 집단의 일전은 불가피했다. 소비에트냐 입헌민주제냐는 두 대안 중 어느 하나를 위한 상호 살육 투쟁의 결과로 군부독재를 추구하는 세력(나치)이 등장한 것은 독일 역사상 가장 슬픈 아이러니다. 1918년 11월 10일 세워진 6인 임시정부는 다수의 사회주의자들과 독립파 각 3인 대표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건 지속할 수 없었다. 12월 27일 독립파는 탈퇴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1919년 1월 15일 살해됐다.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4월 말과 5월 초 잔인하게 진압당했다.

베른슈타인의 표현은 틀렸다. 독일 혁명은 사회주의자와 반(反)사회주의자와 전쟁이었다. 사회주의자 사이의 투쟁이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 탈을 쓴 반(反)사회주의자의 전쟁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하고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놈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다. 이 놈의 이름을 딴 재단의 한국사무소가 지금도 한국에 버젓이 존재한다. 수 십 년 동안 제3세계 운동에 개입해 ‘운동성’을 무장해제시켰던 이 단체와 교류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공화국에 더 해가 되는 건 베르사이유(연합국)였다. 이들은 협상이 아닌 보복을 원했다. 1919년 4월 중순 독일 대표단이 베르사이유에 갔다. 대표단의 임무는 조약에 서명하는 일이지 협상하는 건 아니었다. 독일은 알사스로렌, 폴란드 회랑지역, 북부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과 몇몇 작은 지역을 잃었다. 이는 옛 영토의 13%쯤 된다. 600만 인구와 귀중한 자원도 잃었다. 모든 식민지도 잃었다. 무장해제와 배상금 지불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반발은 심했다. 언제나 이성의 목소리였던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조약 내용에 반대했으나 그것에 서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바이마르

그럼에도 혁명은 많은 걸 이뤄놓았다. 혁명은 전쟁을 끝냈다. 프러시아의 지배가문과 크고 작은 독일의 영주들을 영원히 없앴다. 재능 있는 자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바이마르 헌법의 설계자인 후고 프로이스는 혁명의 상징이었다. 프로이스는 유태인이자 좌익 민주주의자였다.

경제학자 루돌프 비셀은 계획을 통한 사회주의 길을 얘기했다. 그러나 대기업은 자기 식대로 카르텔로 국유화를 진행했고 최대의 기업연합은 바이마르 공화국 때 있었다. 1926년 4개의 대규모 철강사의 합병과 6개 화공업체의 합병으로 1925년 화공기업연합 파르벤이 태어났다. 사회주의자들은 카르텔이 사회주의로 가는 과정에서 지나가야 할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단계라는 엉터리 확신을 가졌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진압

바이마르는 더 큰 과오를 저질렀다. 구 질서의 기구였던 군부, 관리, 법조인들을 무력화시키거나 개혁하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은 재앙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공화국 선포 다음날인 1918년 11월 10일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그뢰너 장군의 군과 함께 질서 유지에 합의했다. 정규군은 20명 가량의 호전적 스파르타쿠스 단원들을 사살했다.

경찰견인 우파 사민주의 당원 노스케는 우익의 군대에게 암살의 자유를 주었다. 제국 시대의 법관들은 혁명 후에도 여전히 공직을 맡았다. 법관들은 기소된 공산주의자에게 어떤 동정심도 베풀지 않았다. 반면 전직 관리들에겐 유순한 태도를 보였다. 1918-1922년 좌익이 일으킨 암살은 22건이었다. 범인 가운데 17명은 중형, 10명은 사형선고 받았다. 법관들은 우익의 암살 테러엔 관대했다. 우익의 암살은 354건이었다. 이 가운데 단 한 건만 중형을 받았는데 그것도 사형은 아니었다.

좌익의 평균형량은 15년이었고, 우익은 4개월이었다. 1923년 11월 히틀러의 루덴도르프 폭동 이후 재판은 정치 코미디였다. 히틀러와 변호사는 선동 언어로 정부를 모욕했다. 오스트리아인인 히틀러는 자신의 폭동 뒤 추방됐어야 했는데 그는 자신이 독일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에 독일 잔류가 허용됐다. 법관들은 스파르타쿠스 단원, 공산주의자, 솔직한 언론인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바이마르 시대 : 절충으로 일관

바이마르에는 나치를 증오했지만 공화국을 사랑하지도 않았던 수많은 교수 기업가 정치가들이 있었다. 이들을 ‘이성적 공화주의자’라 부른다. 이성적 공화주의자에게 공화국은 귀족과 부르조아 독일인들이 받아야 할 벌이었다. 독일 국민당 창당에 조력했던 슈트레제만은 1919년 1월 6일 “나는 군주주의자였고 군주주의자이며 군주주의자로 남을 것”이라고 썼다. 1920년 카프 폭동(우익의 반란) 당시 슈트레제만은 우익 폭동을 옹호했다. 그 뒤 슈트레제만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데 그 원인은 역사였다. 슈트레제만은 1923년 8월 공화국의 수상 취임날 복고에 대한 집요한 희망을 암시했다. 그러나 극우파의 만행들은 슈트레제만에게 바이마르의 장점을 가르쳐 주었다. 이성적 공화주의자들은 그들의 이성을 절충에 사용했다.

바이마르에는 이성적(지적) 공화주의자가 아니라 공화주의적 지식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비판에 사용했다.

젊은 역사가 에카르트 케르는 1894-1911년의 독일 해군정책의 국내 재정출처를 냉혹하게 폭로하는 도발적 박사논문 <전투함대 건조와 정당정치>를 1930년 출간했다. 1933년 서른에 요절한 케르는 공화국에서도 이단자였다. 케르는 논문에서 “독일 제국주의는 독일적 사명에 대한 장엄한 생각보다는 이윤이 훨씬 더 중요한 동기였다”고 설명했다. 사회구조와 경제 이윤이 정치 결정에 영향을 비친다는 걸 발견했다. 케르의 다른 소논문들도 박사논문만큼이나 신랄했다. 다른 학자들은 케르에게 애국적 비난과 우려에 찬 불신을 퍼부었다. 케르는 독일 역사학계의 외로운 행동자, 황야의 늑대였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학교나 연구소에 모여 지냈다.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문화사 도서관은 외딴 곳에서 평온하게 일하고 있었다. 바르부르크 연구소는 바이마르 정신의 최대의 영광이었다. 바르부르크 연구소 설립자는 충성스런 군주주의자였고 연구소 자체는 한 인간의 강렬한 개인 소산이며 망상적 희망의 실현이었다. 바르부르크는 이성의 능력을 믿었다. 바르부르크 연구소는 심오하긴 해도 협소했다.

1918년 초 나우만을 교장으로 한 공민학교가 세워졌다. 뒤를 이은 이른스트 예크는 야심찬 계획으로 나우만의 정치학교를 <독일 정치학 전문대학>으로 바꾸었다. 1920년 10월 120명의 학생으로 출발했던 이 학교는 공화국 마지막 해인 1932년 2500명 이상의 학생을 두었다. 철학자 막스 셀러, 테오도르 호이스, 아르놀트 볼퍼스, 한스 지몬스(정책학), 알베르트 잘로몬(사회학), 지그문트 노이만, 찰스 베어드, 니콜라스 메레이 버틀러, 구치, 앙드레 지그프리트 등이 가르치고 연구했다. 이 학교는 처음 야간으로 출발해 다양한 국적의 외교관과 유학생, 노조 간부, 사무직 노동자, 언론인들이 수강했다. 이 학교는 부르주와 자유주의라는 근거 위에 서 있었다. 교수 중에는 젊은 보수주의자 막스 힐데베르트 뵘도 있었다.

헤겔 좌파의 프랑크푸르트 연구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장악한 프랑크푸르트 연구소는 철저히 헤겔 좌파였다. 1923년 설립돼 1924년 노련한 사회주의자 칼 그륀베르크가 책임을 맡았다. 그륀베르크는 국가의 충복이 아닌 연구자를 양성하려 했다. 학생들의 비판능력을 날카롭게 했다. 그륀베르크의 후계자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1931년에 프랑크푸르크 연구소 책임자가 돼 큰 업적을 남겼다. 연구소 도서목록엔 헨리크 그로스만의 <자본주의 체제의 축적과 붕괴법칙>, 프리드리히 폴로크의 <소련의 계획경제시도, 1917-1927>이 있었다. 두 책은 모두 1929년에 나왔다. 그륀베르크는 ‘노동운동의 역사’를 장려하고 훌륭한 장서를 수집했다.

호르크하이머는 사회철학이 단순한 지적 논쟁을 넘어 실제 효용성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르크하이머의 이런 생각은 1931년 창간해 1933년 봄 돌연 폐간한 <사회조사잡지>에 잘 나타난다. 잡지는 중요한 논문을 많이 실었다. 호르크하이머 자신은 다양한 철학적 주제로 글을 썼다. 이 잡지에서 에리히 프롬은 프로이트에 근거해 사회심리학을 전개하고 헨리크 그로스만은 마르크스, 레오 뢰벤탈은 문학사회학,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음악사회학의 글을 썼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나 발터 벤야민, 프란츠 노이만, 파울 라자르스펠트, 오토 키르히하이머 등은 프랑크푸르트연구소에서 강의했다.

프란츠 노이만은 “내가 한 첫 번째 일은 새로 임명된 사회주의자 교수들이 다수의 교수들에게 비밀 지원을 받은 학생들로부터 정치적, 신체적 공격을 받는 걸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베를린도 마찬가지로 오염돼 있었다. 케슬러 백작은 자기 일기에 “베를린의 대학생단체 위원회는 하우프트만이 공화주의자임을 공언한 뒤 그의 기념식에 참여하지 않기로 엄숙하게 결의했다. 위원회는 에베르트를 초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공화주의자 국가원수가 대학에 나타나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라는 이유”였다고 썼다.

릴케 : 비밀스런 독일시의 힘

슈테판 게오르게는 현대판 소크라테스였다. 독일인 누구나 게오르게에게 매혹됐다. 게오르게는 경멸하던 나치의 승리에 자신의 명성을 더해 주기 싫어 1933년 스위스 망명지에서 죽었다. 게오르게의 제자 중 몇몇은 나치 당원으로, 몇몇은 나치의 희생자로, 몇몇은 황량한 침묵 속에서, 몇몇은 망명했다. 1868년에 태어난 게오르게는 자신이 경멸하던 문화와 결별해 자신의 시대를 저주하던 시인 보들레르나, 새로운 귀족주의를 귀에 거슬릴 정도로 옹호하던 니체 등을 비판했다. 게오르게 집단은 극단적 엘리트주의자였다. 게오르게 집단의 수 백 장의 사진 중 어느 누구도 웃는 자가 없다. 게오르게 자신은 인종주의자가 아니었다. 게오르게는 전쟁이 젊은이들을 죽이고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전쟁을 혐오했다.

칸토로비치는 전쟁 뒤 의용군에 합류해 좌익에 대항하는 무기를 들었다. 칸토로비치는 “더 이상 황제가 없는 시대에 비밀스런 독일은 황제와 영웅을 갈망한다”고 말했다. 1927년 <프리드리히 2세>를 출판한 칸토로비치는 르네상스의 아버지이며 알렉산더 대제의 능력에 버금가는 지도자였다.

슈테판 게오르게와 견줄 살아있던 유일한 경쟁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말테의 수기, 스위스에서 사망)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시를 읽었다. 토마스 만은 릴케를 최고의 서정시인이라고 인정했다. 극소수의 급진주의자들만이 릴케를 점잔빼는 귀족이라고 비웃었다. 쿠르트 투홀스키(Kurt Tucholsky)는 릴케에게 “당신은 다락방에서 추위에 떨어 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으며 빈민에 대한 릴케의 감상주의를 조롱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릴케를 신격화했다. 말년의 유명한 시 <오르페우스에게 보내는 소네트>, <두아노 비가>는 1922년 2월 창조의 광기 속에서 태어났다. 릴케는 사회의 양심과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다. 릴케는 독일 언어의 범위를 확장시켰다. <말테의 수기>에서 릴케는 “시란 감정이 아니라 경험이다. 보고, 알고, 느껴야 한다”고 썼다. 시인이 경험의 소비자여야 한다는 릴케의 주장은 폭넓다. 말년에 릴케는 영감에 빠졌다. 말년의 그의 작업은 무의식으로 빠졌다. 릴케는 어떠한 체계도 지니지 않았다. 어떤 학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릴케는 독일의 과거에 사로잡혀 있었다. 릴케는 게오르게 집단의 작업을 지원했다. 1914년 릴케는 위대한 휠덜린을 찬미하는 시에서 그를 ‘찬란한 당신’이라고 불렀다. 철학자 하이데거까지 가세한 게오르게 열광자들은 시인의 사명에 대한 휠덜린의 고양된 견해, 새로운 신에 대한 요청, 그리고 이것이 암시하는바 새로운 독일의 염원을 높이 평가했다.

<당통의 죽음>처럼 죽은 뷔히너

바이마르 공화국의 14년 동안 클라이스트에 관해 약 30권 정도 책이 출간됐는데 이는 이전 한 세기 동안 출판된 것보다 많았다. 1920년 클라이스트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클라이스트를 기념하기 위한 협회가 설립됐다. 클라이스트 협회는 가장 저명하고 다양한 회원과 후원자를 지난 단체였다. 고전학자 울리히 폰 빌라모비츠 묄렌도르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후고 폰 호프만슈탈 등 유명 시인들, 급진 극작가 발터 하젠클레퍼,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 인상파 화가 막스 리버만 등이 있었다. 독자들은 클라이스트에게 고통 받는 기독교인을, 다른 독자들은 시대를 잘못 만난 귀족을, 또 다른 자들은 반역자를 발견했다.

토마스 만은 클라이스트의 신고전주의 희극 <암피트리온>의 흥미로운 해학을 즐겼다. 나치는 클라이스트가 순수하고 강한 독일인이라고 했다. 게오르게 집단은 고독한 엘리트 시인이라고, 공산주의자들은 초기의 혁명가라고 했다. 휠덜린의 곁에 있는 클라이스트는 국가의 가장 깊은 비밀의 입구를 열정으로 찾고 있던 독일인들의 우상이 되어갔다.

죽은 뒤 승리를 거둔 독일 문학의 세 청년은 클라이스트와 휠덜런, 뷔히너였다. 뷔히너는 바이마르 시절에는 민주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의 소유물이었다. 뷔히너는 1837년 망명 중 젊은 혁명가로 23살에 요절한 뒤 거의 잊혀졌다가 바이마르 때 부활했다.

뷔히너의 모노드라마 <당통의 죽음>은 그의 생존 때 출간된 유일한 작품이었다. 뷔히너는 처음엔 어떤 반응도 일으키지 못해 무시되었고 나중엔 그가 위험스럽다며 발간이 금지됐다. 1890년 베를린 자유민중극단은 이 작품의 공연을 공지했지만 감히 무대에 올리기까지 12년이나 걸렸다. 1909년과 1923년 사이에 그의 전집은 5판을 거듭내야 할 정도였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뷔히너의 후예이자 뷔히너의 아류였다. 시인 뷔히너는 자기 자신의 방식으로 바이마르 세계에 살아있는 영향을 끼쳤다.

꿈틀거리는 전체주의 악마

한나 아렌트는 우리 젊은이들은 그 당시에 신문을 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한나 아렌트는 “게오르게 그로스의 만평은 우리들에게 풍자가 아니라 사실의 보고서처럼 보였다. 이런 것들은 우리 주변 어느 곳에서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것 때문에 우리가 바리케이드를 넘어가야 했을까?”라고 말했다.

이런 정치 거부 속에 독일인들은 매혹과 혐오가 뒤엉킨 채 정치를 바라보았다. 독일인들은 높은 투표 참여율로 보아 열정을 지니고 정치에 집착했다. 독일인들은 주체할 수 없는 단체결성경향을 지녔다. 이러한 사고의 본류 옆에는 교통량이 많고 조심스럽게 깊이 판, 또 다른 지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이것은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반감이었다.

의회는 단지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 의원들은 대체로 실권자들에게서 수동적으로 지령을 받던 자들이었다. 비스마르크는 국가의 근간을 파괴했다. 1890년 비스마르크가 해임된 뒤 그의 제도는 더욱 무능력한 사람들(군국보수연합)의 손에 들어갔다. 민주 바이마르 헌법이 현실 정치로 문을 열었을 때 독일인들은 궁전에 초대받는 농부처럼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라 입을 벌린 채 그 문 앞에 서 있었다. 지도적 독일 지식인, 시인, 교수들은 국가와 묵약을 맺었다. 자유를 허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비판은 물론 일반 정치행위조차 자제했다.

1918년 토마스 만은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에서 자신이 비정치적 인간이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전쟁 초 여전히 독일의 문화 사명에 대한 확신에 사로잡혀 있던 토마스 만은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독일 자체를 구현했던 역사 영웅인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를 독일인들에게 상기시키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람들은 단순히 정치에 개입하기를 귀찮아했다. 명석한 철학자인 루드비히 마르쿠제는 “나는 그 당시 내가 투표를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며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는 두 말할 것도 없다”고 말했다. 대단히 널리 확산되었고 대단히 위험했던 이런 태도가 인식의 왜곡을 낳았다.

청년들의 우경화 : 하이데거의 선동

수 백 만명이 굶주리던 반면, 정당의 늙은 정객들은 변명과 웅변으로 서로를 모욕했다. 15년이 못되는 바이마르 기간 동안 내각은 17번이나 바뀌었다. 연합내각은 갈라진 틈 위에 벽지를 바르는데 불과했을 뿐이다. 중앙당은 전국에 걸쳐 300개쯤의 신문에서 지지받았는데 이들 대부분은 부수가 많지 않았다. 이들 모두는 짙은 지방색과 편협성을 띠고 있었다. 중앙당은 나치의 <민족의 관찰자>나 사회민주주의당의 <전진>에 상응하는 신문이 없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지방에서 이성의 소리를 분출시킨 <프랑크푸르트 신문>이 그 예외였다. <프랑크푸르트 신문>은 민주주의였고, 자유주의였지만 당파로부터는 자유로웠다. 논조는 합리, 보도는 광범위, 정치성향은 지성, 전체로 독립적이었다. 유행에 부응하는 인기주의에 영합하기를 거부했다. 1931년 이 신문의 편집장이던 하인리히 지몬은 파당적 독일의 분열을 치료하려고 했다.

전체성의 갈망은 청년들 속에서 가장 날카롭게 나타났다. 젊은이들은 공화국과 되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젊은이들은 시인에게서 구원을 찾았지만, 강렬한 인도자도 찾으려 했다. 히틀러가 딱 그런 사람이었다.

좌익이냐 우익이냐는 자유주의 정치학의 전통적 명칭을 넘었다고 자신 있게 공언했던 학자들이 대개 우익으로 발전한 건 이상한 일이다. 마이네케는 이것을 1924년에 정확히 간파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성에 대한 반역에 자신의 언어로 옷을 입힌 난해한 철학자였다. 하이데거의 저술은 이성의 산물인 바이마르를 훼손하기에 이르렀으며, 피로써 사고하고,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숭배하며, 살인을 찬양하고 실행했다. 독일 젊은이들은 나치의 행동을 찬양하기에 이르렀다.

파울 틸리히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이름이 파시즘이나 국가사회주의의 반도덕 행동들과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나치 시대에 발간됐던 <존재와 시간> 서문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지만 거북스럽게도 유태인이었던 후설을 언급하지 않았다. 193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 취임사에선 악명 높은 연설을 했는데 단순한 굴종을 넘어섰다. 그 이상이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노력봉사, 군사봉사, 지식봉사 세 가지를 외쳤다.

가장 확실하고 생생한 바이마르 정신의 선구자였던 하인리히 하이네의 기념물이 공화국 종말때까지 없었다는 건 뜻깊다. 75년 동안 그의 동상을 세우려는 제안은 격렬한 논란과 엄청난 비방을 불렀고 결국은 방해하는 측이 이겼다.

랑케 이후의 역사가들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명백하게 우월한 독일의 산물인 문화를 보존하고 러시아의 야만적 우중사회, 프랑스의 쇠락한 퇴폐주의, 미국의 기계주의 몽상, 영국의 비영웅 상업주의로부터 자기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모든 무력의 무제한 사용과 독일의 특수 사명을 즉각 옹호했다. 애국 반민주주의 신화는 계속 창조됐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직선보다는 강력한 곡선을 택했다. 그로피우스는 고전 기하학 형식의 옹호자였다. 그로피우스는 1차 대전에 앞서 몇몇 훌륭한 건물을 지었다. 바우하우스는 그에게 큰 명성을 주었다. 그로피우스는 바이마르 시대인 1919년 초 바우하우스를 창립했다. 그의 철학은 심리학에 근거한 미학이었다. 이런 건 파울 클레, 바실리 칸딘스키, 라이오넬 파이닝거, 게르하르트 마르크스 등 바우하우스의 선생들 이름을 봐도 충분하다. 바우하우스의 분위기는 기묘하고 활력 있었다.

우익의 전통에 얽매인 장인들은 바우하우스의 실험이 지닌 혁명 의미와 그 학생들의 보헤미안 행위에 반감을 표했다. 바우하우스는 1925년 바이마르로부터 보다 쾌적한 도시인 데사우로 이전했다. 바우하우스는 국내에서 악평이 높았지만 해외에선 반대로 유명했다.

다시 꿈꾸는 반역과 독재의 충돌 : 표현주의 작가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바우하우스 다음 가는 가장 뛰어난 소산은 아마도 1920년 2월 베를린에서 개봉된 표현주의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작은방>이다. 이 영화는 바이마르 시대 가장 영향력 있던 영화제작자 에리히 폼머가 총기획을 맡았고, 로베르트 비네가 감독을 맡았다. 표현주의자들은 통일된 집단이 아니라 느슨히 연결된 유대를 지녔을 뿐이다. 이들은 명분을 지녔지만 명확한 정의나 구체 목표는 없었던 반역자들이었다. 모든 종류의 표현주의자들은 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을 굳건히 지지했고, 다른 예술가들을 혁명 집단 속으로 끌어들였다.

1918년 12월에 창립한 <11월 집단>은 모든 부분으로부터 예술가들을 받아들였다. 11월 집단은 불유쾌한 공산주의자 에른스트 톨러는 물론 신비주의 인종주의 기독교인인 에밀 놀데, 발터 그로피우스는 물론 에리히 멘델존까지도 받아들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쿠르트 바일, 알반 베르크, 파울 힌데미트 등이 모두 11월 집단이었다.

<칼리가리 박사의 작은방>은 침침한 조명 속에 배우들이 이상스럽게 채색된 배경의 앞에서 몽유병자 체자레처럼 몽환 상태로 움직이는 표현주의 영화의 유행을 촉발시켰다. 비네 감독은 같은 해 피와 무제한의 충동에 탐닉해 있는 또 다른 환상인 <게누이네>를 만들었다.

화가들은 강력하고 단순하며 공격 색채, 의식적으로 원시 기법, 강렬한 선, 전쟁 전에 발전했던 인간형상을 새로이 극단으로 잔인하게 왜곡시키는 수법 등을 채택했다. 바우하우스에서 같이 작업했던 클레, 파이닝거, 칸딘스키 등의 화가조차도 자신들만의 특징 기법을 지녔다.

막스 베크만은 표현주의로부터 많은 걸 얻었지만 표현주의라는 호칭을 부인했다. 베크만은 표현주의나 인상주의에 속하지 않고도 새로울 수 있다고 했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그림은 비대한 기업가들과 전시에 부당이득을 챙긴 자들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오토 딕스의 노동자들을 동정하는 그림과 포주와 창녀를 그린 잔인한 초상화는 명백히 프롤레타리아의 의도를 담았다. 신음하는 어머니, 칼 리프크네히트의 죽음, 굶주리는 어린이들, 전쟁과 자본주의 착취의 처절한 희생자들을 담은 케테 콜비츠의 우울한 판화는 긴박한 정치 호소였다.

예스너의 <빌헬름 텔> 연출

1921년 막스 베크만을 찬미하던 한 비평가는 “전쟁이 이 화가를 현실 속으로 몰고 갔다”고 했다. 막스 베크만의 그림은 의도적으로 뒤틀려졌다. 잔인한 색채, 경직된 선 등의 왜곡이 화폭을 채웠다. 베크만의 자화상에서 큰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고 입은 미소를 잃은 채 음울했다. 베크만은 자신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부르려 하였건간에 표현주의 시기의 갈망을 그보다 더 웅변적으로 진술하였던 자는 없었다.

바이마르 연극계에서 가장 유력했던 인물은 레오폴드 예스너였다. 사회민주당원이었던 예스너는 1919년 여름 베를린의 국립극장 관리소장을 맡았다 예스너는 대담성과 분별력의 기묘한 복합물로 공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스너가 베를린에서 처음 무대에 올린 작품은 고전 독일 희곡인 쉴러의 <빌헬름 텔>이었다. 이는 명백히 의도적이었다. 예스너의 빌헬름 텔 연출은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 암살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1917년에 나온 발터 하젠클레퍼의 <안티고네>는 전쟁 말기에 완성된 표현주의의 가장 괄목할 연극이었다. 이 연극은 전쟁이라는 괴물과 싸우며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인간을 희미하게나마 기대하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부상당한 아들의 비난이 담긴 유명한 편지를 썼던 것은 이보다 한 해 전인 1919년이었다. 그러나 카프카는 이 편지를 부치지는 않았다.

1925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죽었다. 1925년 대통령 선거유세는 부자 갈등을 보다 넓은 무대에서 재공연했다. 힌덴부르크의 선출은 사회주의자의 소심성, 공산주의자의 의사방해, 부르조아 정치가들의 똑똑한 체하는 우둔성이라는 오산과 분파적 자기 만족과 정치 결정의 결과였다. 힌덴부르크는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지만 손쉽게 당선했다. 힌덴부르크에게서는 구 질서의 냄새가 났다. 전통적 가치 자체의 구현으로, 가부장적 인물로, 그의 선출과 함께 아버지(황제파)의 보복이 시작됐다.

아버지(황제파)의 보복 : 설치는 우익들

1925년 독일은 혁명과 전쟁 이래 그 어느 때보다도 안정돼 있었다. 문화란 사회와 긴밀하게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정치 현실의 표현이자 비판이었다. 바이마르 시대에 대학, 관료체제, 군대 등은 국외자들을 배격하였지만, 무대 출판 언론 등은 대체로 국외자들의 수중에 있었다. 혁명, 내란, 외국의 점령, 정치살인, 경악스런 물가폭등으로 점철된 1918년 11월부터 1924년까지 예술은 실험의 시기였다. 1924년과 1929년 사이 예술은 새로운 객관성, 사실성, 냉정 등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치솟은 실업률, 포고령에만 의존하던 정부, 중산계급 정당의 쇠퇴, 폭력의 재현시기였던 1929년과 1933년 사이에 문화예술은 사실의 거울이 되었다. 우익의 선전물은 도처에 설쳤다. 소설가, 극작가 등은 침묵했다. 국가는 정치색을 띤 저급한 작품의 물결 속에 침몰하고 있었다.

1918년 막스 베버는 표현주의를 무책임한 정신적 마약이라고 부르는 한편, 새로운 객관성을 요구했다. 1924년에 이르면 지도적 표현주의자였던 파울 콘펠트조차도 표현주의의 종말을 요구했다.

1924년은 토마스 만이 자신의 가장 유명한 소설 <마의 산>을 출간한 해였다. 마의산에서 단순한 젊은이로 평범하게 소개된 한스 카스토르프는 결핵에 걸린 사촌을 방문하기 위해 스위스 결핵요양소로 가지만 자신도 병에 걸려 7년간 그곳에 머문다. 마의산은 교양소설이다. 또다른 등장인물은 세템브리니다. 세템브리니는 계몽주의의 후손으로 합리, 반교회주의, 검열에 반대하는 낙관주의자였다. 세템브리니는 분명 하인리히 만을 대변한 인물이다. 또다른 등장인물은 나프타다. 나프타는 반이성주의와 종교재판의 사도로, 죽음의 옹호자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페페르코른은 소설 후반에 등장해 감각적이고 말이 많지만 분별은 없으며 향락을 이단적으로 찬미하면서 음경숭배의 철학에 빠져 자살하고 만다. 클라우디아 쇼샤는 매력 넘치는 러시아 환자다. 카스토르프가 쇼샤를 소유한 시간은 짧은 것이나 쇼샤에게서 그가 얻은 것은 엄청난 것이다. 마지막으로 카스토르프의 용감한 사촌 요아힘이 나온다. 요아힘은 죽음을 증오하는 단순한 젊은 장교로 감동적으로 죽어간다.

귀족주의는 어느 정도 죽음과 결합돼 있다. 반면 민주주의는 삶과 친밀하다. 마의 산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는 대체로 자신의 사색을 통해 이렇듯 위험스런 휴머니즘에 도달한다. 카스토르프는 설원 속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빈사상태에서 자신을 재발견한다. 이 소설의 절정이며 현대문학의 진수 중의 하나다. 만은 마의산에서 사실주의, 상징주의, 철학 등을 하나의 명료한 통일체 속에 잘 녹여낸다. 카스토르프는 마비된 채 눈밭에 넘어져 꿈에 빠진다. 명랑하고 쾌활하고 아름다운 고전의 인간들이 보이는 꿈속의 장면은 분명 그리스일 것이다. 이때 엄숙한 사원이 카스토르프의 앞에 나타난다. 사원에서 마녀들이 한 아이를 조각내 집어 삼키려 한다. 카스토르프는 “인간은 죽음이 그의 사고를 지배하도록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엄청난 노력으로 자신을 일으켜 가까스로 생환한다. 토마스 만은 감정적 군주주의자에서 이성적 공화주의자를 거쳐 바이마르로 개입해 들어왔다.

허무, 표현주의 실험과 차갑고, 대단한 개인의 서정성 사이를 오가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1924년 베를린으로 이사왔다. 황금의 20년대 중반 베를린은 관청과 정당의 본부가 독점했다. 지도자들까지 독점해 지방에 피해를 입혔다. 뮌헨,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등은 대학의 탁월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베를린은 자석 같은 곳이었다. 몇 년간 거부 끝에 결국 베를린으로 이주한 하인리히 만은 “집중화는 불가피하다”고 단념조로 말했다. 베를린으로 가는 건 작곡가와 언론인, 배우들에게 하나의 염원이었다.

출판 권력의 대결장

칼하인츠 마르틴은 연극과 무대예술의 대중화에 진정한 이해를 지니고 민중극단의 운영을 맡았다. 베를린은 모세(Mosse)와 울슈타인 같은 대형 출판왕국의 도시였다. 하이데거는 물가폭등기의 베를린을 현대판 바빌론으로 여기고 그곳에 살기를 거부했던 착한 독일인이었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들에게 베를린은 흥분과 희망의 도시였다.

황금의 20년대 중반, 실업율은 떨어지고 동시에 임금은 올랐다. 정치의 극단론은 끝난 듯 보였다. 이 시기 독일은 고립에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국가간 유대에 재참여했다. 바이마르 전성기의 붉은 뺨이 은밀하게 숨어든 질병의 징조를 숨겼다. 징조들 중 가장 은밀한 것은 산업의 카르텔을 본 딴 문화의 카르텔이었다. 우익의 독일 국민당 안에서도 우익에 속했던 악명 높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언론산업에서 반혁명의 견해를 대변했다. 후겐베르크는 전국 수십 개 신문을 규합하고 베를린의 대중 일간지 <베를린 지방신문>을 획득했다. 후겐베르크는 1927년 파산한 세계 영화회사를 인수해 국가 최대의 ‘허상 제조소’로 만들었다. 후겐베르크는 여론뿐만 아니라 혼란도 조성했는데 모두 공화국을 위협했다.

후겐베르크가 여론을 조성하는 산업을 독점했던 건 아니다. 공화주의자들도 거대한 모세 출판사와 더 거대한 울슈타인 출판사를 갖고 있었다. 울슈타인은 주간지 <베를린 화보>, 포켓북 월간지 <부엉이>로 중간 계층의 취향을 맞췄다. 작가 비키 바움은 자서전에서 “20년대 베를린의 핵심 중 하나는 울슈타인 출판사였다. 울슈타인의 출판 범위는 블레히트와 톨러 등 극좌부터 표현주의를 넘어 젊은 레마르크의 반군국주의 반전주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까지 다양했다”고 썼다. 울슈타인의 판로 독점 때문에 울슈타인이 외면한 많은 작가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울슈타인 5형제 경영 수뇌진은 냉혹하고 전적으로 성공만을 지향하는 비정한 사람들이었다. 공화국 수상 슈트레제만도 1929년 11월 3일 죽었다. 수상 슈트레제만은 대외적으론 화해를 가져왔다.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가 영화로 개봉된 1930년 12월 나치는 괴벨스의 주도 아래 이 영화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켜 극장에 들어가 악취탄을 던지고 쥐를 풀어놓아 마침내 이 영화의 상연 취소에 성공했다. 유태계였던 울슈타인 출판사는 유태인과 과격파를 제거하고 애국, 국수 논조를 채택해 위협 상황에 적응하려 했으나 적을 달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는 실망만 안겨주었다.

히틀러에게 달려간 독일 청년

공산주의자들도 나치의 습격에 대항해 굳게 뭉쳤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은 점점 중요성이 더해 가던 청년층을 사로잡지는 못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청년들이었다. 정치화된 청년운동과 함께 거의 모두가 우익으로, 나치에 잠식당한 학생단체들은 자신들이 청년과 청년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치는 단순한 반동가들이 아니었다. 공화국의 현대주의, 민주주의, 합리주의뿐만 아니라 죽은 제국의 전통 권위주의도 배격했다. 나치는 청년들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인식했다.

1930년 사회민주당은 당원들의 8% 미만이 25세 이하였고 40세 이하는 반도 채 안됐다. 예나 대학의 학생들은 적의에 찬 반유태주의자인 신임교수 한스 귄터에게 환호했다. 한스 귄터는 예나 대학에서 인종학이라는 새 강좌를 맡았다. 독일 청년들의 우경화는 심각한 질환의 일부이자 그 지표였다.
태그

바이마르

로그인하시면 태그를 입력하실 수 있습니다.
이정호(민주노총 실장)의 다른 기사
관련기사
  •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많이본기사

의견 쓰기

덧글 목록
논설
사진
영상
카툰
판화
기획연재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