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노협 이전엔 완성차 조업중단 부품사 파업이 더 큰 원인

[낡은 책] 자동차부품공업의 노사관계 (김호진 하재룡, 집문당, 1997.4, 166쪽)


지난달 자동차 부품회사 유성기업이 파업하자, 보수언론이 ‘알박기 파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식경제부장관과 대통령은 연일 ‘연봉 7천만원’ 받는 노동자의 파업이라고 재무제표도 거꾸로 읽었다. 파업하는 유성기업의 주가는 연일 뛰어 오르는 기현상을 빚으며 우리 경제의 천민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자동차부품사를 둘러싼 자본의 고민

유성기업 파업은 ‘주간 연속 2교대’라는 띄우기 힘든 의제를 단숨에 수면 위로 끌어 올렸고, 자동차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노사관계를 둘러싼 제2라운드 논쟁으로 전환했다. 한국의 자동차 자본은 완성차와 부품사의 관계 문제에 오래 전부터 천착해왔다. 이 책 <자동차부품공업의 노사관계>는 그런 자동차 자본의 고민과 해답을 담은 연구보고서다. 현대재벌의 아산재단으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것만으로도 이 책이 노리는 목표는 간파하기 충분하다.

이 책은 1997년에 나왔지만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자동차 산업의 노사관계를 다루고 있어 20년 전 자동차산업과 오늘의 산업을 비교해 노동의 대응방향을 잡는데 단초를 줄 수 있다. 비록 아산재단의 지원을 받은 연구지만 연구자들 나름의 원-하청 공생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이 책을 뒤지면 한국 자동차산업의 원-하청 관계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일제시대부터 자동차산업의 발달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60년대 인.허가권을 쥔 군사정권이 취한 산업정책의 결과도 되짚었다. 90년대 초반 자동차 산업 노사관계의 특성도 보인다. 책의 뒷부분엔 95년 여름쯤 자동차 부품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붙어 있다.

부품사 노동의 힘을 1990년을 기점으로 꺾였다.

1987~1989년까지 3년 동안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완성차 사업장의 쟁의로 인한 피해보다, 부품사의 쟁의로 인한 피해가 더 컸다. 자본의 입장에선 부품사의 파업의 불길을 끄는 게 더 급했다. 이런 원-하청 간 노사관계는 90년 전노협 건설 이후 역전된다. 1990년 1월 전노협 창립대회 자료집에 나온 ‘4대 주요 사업계획’ 중 하나는 “대공장 노조를 전노협의 골간으로 삼는다”는 것도 들어 있다.

당시 완성차 자본은 정부의 중소기업 육성전략과 거꾸로 부품공급선을 다원화해 부품사의 영세화를 부추겼다. 20년이 지난 지금 완성차(재벌) 자본의 전략은 바뀌었지만, 부품사를 수탈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전근대적 시각은 변함없다. 그 결과 엄청난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반세기 가까이 성장했지만 원천기술력 확보에는 실패해 지금도 미국과 유럽 등에 있는 주류 업체의 전략과 시장 동향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는 슬픈 처지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 84, 85년 대우차와 (주)통일의 투쟁이 자동차 산업에 미친 영향도 새로 봐야할 대목이다. 20년 전 완성차와 부품사의 임금격차가 어떻게 확대해 왔는지 살필 계기도 주었다. 그 속에서 노동의 역할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 책은 지금은 부경대 경제학과에 있는 홍장표 교수의 1993년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한국에서의 하청계열화에 관한 연구>과 함께 한국 정부와 자본의 자동차 원-하청사의 관계의 역사와 미래를 전망하고 제언한 몇 안 되는 의미 있는 연구서다. 저자 김호진은 고려대 정외과를 나와 하와이주립대 정치학박사를 받고 14년 전 이 책을 쓸 당시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였다. 공동저자 하재룡은 국민대 영문과를 나와 미국 템플대 정치학박사를 받고 당시 선문대 법학부 교수였다.


부품생산기업의 노사분규 대책을 담은 머리말

자동차 산업을 둘러싼 자본의 긴박하고 절절했던 고민은 이 책의 머리말에 잘 드러나 있다.
“자동차공업의 노사안정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절실하다. 부품생산기업의 노사분규는 매우 중요하다. 부품의 적기공급방식 하에서 단 몇 시간만 부품이 늦게 도착해도 생산라인의 중단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완성차 기업은 부품하청업체 근로자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국제 가격경쟁력을 유지한다. 부당한 하청단가의 인하 요구와 부품업체의 고유한 기술축적을 저해하는 하청유형은 장기적으로 노사불안을 가중시킨다.”

자동차공업보호법으로 시작한 자동차산업

1962년 군사정부가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제정하고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을 본격 추진했다. 1996년엔 우리의 자동차생산규모가 세계 5대국에 들어섰다. 그러나 선진국과 기술수준은 여전히 크다. 저임금을 통한 가격경쟁력에 무리하게 의존한다. 임금을 최대한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방법으로 가격경쟁력을 유지한다.

자동차공업의 노사분규는 1984년과 1985년 대우자동차를 시작으로 85년엔 (주)통일도 이어졌다. 87년 4개 완성차업체와 131개 부품업체에 동시다발로 노사분규가 발생했다. 이후 분규는 숫자로는 줄지만 피해규모는 오히려 늘고 있다. 92년 1개 완성차 기업이 노사분류로 입은 생산손실액은 5,425억 원에 달한다. 자동차 분규는 철강, 비철금속, 고무, 유리산업 등 후방 연쇄효과와 교통, 정비, 판매, 금융보험산업 등 전방 연쇄효과까지 불러온다.

연구 목적과 내용

전근대적인 하청제도로 중소부품 하청업체 근로자의 낮은 임금을 완성차기업의 독점이윤을 추구하는 우회경로로 확보한다. 전근대적인 하청제도는 단기로는 국제경쟁력을 높이지만 궁극으론 자동차공업 전반의 노사안정을 해치고 품질경쟁력을 약화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2장은 자동차공업의 발전사를 요약했다. 3장은 자동차공업의 노사관계를 역사적으로 조망했다. 4장은 자동차 부품생산 실태와 부품생산업체의 노사관계 동향을 정리했다. 5장은 설문을 분석, 정리했다. 6장은 가설을 검증했다. 7장은 결론이다.

연구 방법과 범위

<자동차공업협동조합>이 발행한 <자동차공업편람>(1992)의 1200개 부품생산업체 가운데 임의추출방식으로 500개를 선정해 35개 항목의 설문지를 부품사 노조에 1995년 7~8월에 우편발송했다. 9월 15일까지 들어온 61개사를 분석대상으로 했다.

일제시대부터 돌아 본 자동차공업의 역사

일제는 1930년대 우리 땅에 자동차부품공장을 세우고 부품생산을 독려했다. 1944년 기아산업 전신인 경성정공이 설립돼 자전거, 이륜차를 생산했다. 1955년 대우차 전신인 신진공업사(시발택시 조립, 생산)와 쌍용자동차의 전신인 하동환자동차제작소가 설립됐다.

자동차산업의 발전은 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62년 군사정부가 ‘자동차공업보호법’을 제정해 완성차와 일부 부품수입을 제한하는 등 자동차공업육성계획을 수립해 추진했다. 62년 5월 새나라 자동차공업이 설립돼 일본 닛산과 제휴하고 닛산의 ‘불루버드’ 중간분해부품생산(SKD)방식으로 ‘새나라’ 자동차를 조립 생산했지만 1년도 안 돼 중단됐다.

군사정부는 64년 8월 ‘자동차공업종합육성계획’을 발표했다. 신진자동차를 유일한 종합자동차 조립공장으로 지정하고 75개 부품업체를 계열화해 국산화를 추진했다. 신진은 기존 새나라공장을 인수하고 미쓰비시와 제휴로 중간분해부품조립생산방식으로 생산하려했으나 중간에 실패했다. 66년 1월 신진자동차는 도요다와 합작해 ‘코로나’ 모델을 생산했다.

스스로 새운 ‘일원화’ 정책을 포기

정부는 신진으로 일원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65년 아시아자동차 설립을 인가했다. 아시아는 전량을 미군납키로 했으나 질이 떨어져 불허됐다.

정부는 67년 3월 ‘기계공업진흥법’을 만들었고, 69년 12월 대표 자동차기업인 현대자동차가 설립됐다. 아시아가 피아트와, 신진이 도요다와 제휴하는 등 일원화가 무너지고 다원화 됐다. 현대, 신진, 아시아, 기아 등 4사가 경쟁했다.
정부는 73년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조정을 했다. 75년 최초 국산모델 승용차 ‘포니’의 국산화율은 80%였다. 지나친 의욕의 결과는 과잉중복투자로 나타나 80년에 통폐합해야 할 상황에 몰렸다. 80년대초 세계 불황 여파로 생산이 크게 줄었다. 80년 8월 국보위는 자동차 통폐합을 지시했다. 현대와 새한을 통합해 승용차를 전담, 기아를 5톤 이하 트럭 독점생산, 특정차와 소형버스 생산은 동아자동차에 일임했다.

미국에 휘둘리는 한국의 자동차산업

자동차산업은 80년대 중반에 다시 활기를 찾았다. 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자동차산업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이는 세계자동차공업의 국제분업구조의 변화에 기반했다. 미국의 자동차기업은 소형승용차 중심의 ‘월드카 전략’인 다국적 생산전략으로 미국차의 경쟁력 회복을 구상했다. 한국은 이에 편승했다. 그러나 수출호황은 88년 이후 주춤했다.

그러나 수출 부진에도 국내시장은 크게 확대했다. 88년 수출과 내수가 56 : 44 였는데, 90년엔 27 : 73으로 역전했다. 자동차산업의 국제적 경쟁조건이 80년대 말부터 달라졌다. 80년대 미국 자동차의 소형차 해외조달전략은 대우와 기아 등 국산자동차의 대미수출에 매우 유리했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미국자동차기업들이 먼 한국 대신 멕시코에 투자를 늘렸다. 따라서 국제 경쟁조건이 한국에 불리해졌다. 세계자동차산업은 포드주의적 대량생산에서 도요다식 유연생산으로 돌아섰다.

85년 이후 원화절상과 미국의 수입규제강화도 대미수출을 크게 해쳤다. 85년 달러당 900원대였던 환율이 87년 680원으로 원화가 절상돼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떨어졌다. 우리나라의 낮은 자동차 기술도 수출에 타격을 줬다. 87년 이후 대규모 노사분규로 생산중단과 급등한 임금도 수출 타격의 원인이었다.

90년대 초 자동차자본의 고민

90년 이후 내수시장은 성장속도가 줄었지만 꾸준히 성장을 계속한다. 90년대 초 우리나라 자동차생산은 내수시장의 공급과잉을 낳았다. 이때 93년 8월부터 엔고로 수출이 다시 활기를 찾았다. 국내자동차업체의 수출시장 다변화 노력도 수출을 높였다. 미국시장에서 88년에 40만 대를 수출해 3.8%의 점유율을 기록했던 우리 자동차가 최근엔 점유율 2.0%로 떨어졌다.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은 2001년 이후 수출감소와 수입증가로 점차 쇠퇴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자동차기업의 노동생산성은 매우 낮다. 우리나라 자동차 기업들은 여전히 낮은 임금에 크게 의존해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국제경쟁에서 상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선 시설자동화 등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자본투자가 과감히 이루어져야 한다.

지나치게 낮은 수익성도 문제다. 매출액 대비 경상이익률은 93년 -0.7%로 악화됐다. 우리 자동차산업의 부가가치도 상대적으로 낮다. 이는 기술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자동차공업의 노사관계

87년 여름의 정치적 변혁이 초래한 노사관계 자율화조치는 우리나라 노사관계 전반에 큰 변화와 함께 자동차산업의 노사관계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낳았다. 자동차공업의 노사분규는 87년 여름 대분규에 앞서 과열조짐을 보였다. 84년 8월 대우차 위장취업자의 인사조치로 분규가 생겼다. 85년 봄 대우차 노사분규도 대졸기능직 근로자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87년 7월 현대차 노조설립을 둘러싼 노조, 노사분쟁 등 기아차를 제외한 모든 완성차기업이 노사분규를 겪었다. 87년 7-9월 자동차부품업체 131개 사가 노사분규를 경험해 완성차업체의 조업까지 중단시켰다. 재야운동세력이 지역별, 업종별 연대를 강화하면서 대기업 중심의 노동운동을 집중 전개했다. 92년까지는 87년 이전 수준으로 분규는 줄었고, 분규도 합법, 온건으로 바뀌었다. 이는 노동자의 실리추구 때문이다.

부품사가 주도했던 파업의 힘

뼈저리게 터득한 교훈은 완성차업체의 노사안정은 물론이고 자동차부품기업의 노사안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거다. 87년 기아와 현대는 자체분규를 겪지 않았지만 하청부품업체에서 생긴 노사분규 때문에 각각 15일, 10일간 조업을 중단해야 했다.

87년 대우차도 자체분규로 인한 15일간의 조업중단 외에 하청부품업체 분규로 16일간 주차 조업중단을 경험했다. 결국 87년 완성차업체 조업중단은 완성차업체의 자체 분규보다 부품업체의 분규로 인한 건수가 더 많았다. 88년과 89년에도 동일한 현상이 연속 발생했다.


자동차공업의 노사분규의 또 다른 특징은 분규발생으로 인한 피해규모가 매우 크다는 점이다. 높은 후방 연쇄효과와 전방 연쇄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자동차산업의 원/하청관계

‘하청’이란 기업간의 생산 과정상의 분업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다. 기업 내부의 생산과정 일부를 능력 혹은 공정품의 관계로 외부기업에 의뢰하는 기능을 뜻하고 생산과정상 유기적 결합을 이루는 분업관계를 말한다. 상호의존적 협력관계로 보는 기능론적 시각과 상호 대립적 지배-종속관계로 보는 갈등론이 있다.

정부는 75년 자동차부품의 계열화정책을 주친하면서 정책 목표는 완성차 모기업과 부품업체의 상호보완적 협력체계 구축이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하청은 생산발전을 위한 바람직한 분화과정이기보다는 대규모 독점자본에 의한 소자본 수탈관계로 발달했다. 단기적으로는 독점 대자본의 이익을 확대해 자본의 효율적인 축적에 기여하지만 장기로는 기술 전문화를 해쳐 모기업 생산품의 품질경쟁력 제고에 차질을 빚고, 일원적 수직적 분업구조로 인해 경제구조의 왜곡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자동차 부품기업에서 일어날 지배, 종속적 수탈관계인 하청체계의 형성은 부품의 하청공급이 부품생산에서 요구하는 다양한 기술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는 과도한 고정투자가 초래할 위험을 분산하고, 하청기업이 보유한 상대적 저임금을 우회적으로 이용하려는 완성차기업의 선택 때문이다. 모기업은 하청기업에 대한 통제력 확대를 위해 부품기업이 자신 이외의 제2, 3의 완성차기업과 거대를 확대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저지한다. 수급기업의 낮은 인건비를 겨냥한 하도급 거래가 늘면서 모기업과 수급기업 사이의 임금격차는 확대한다. 지배-종속의 하청제도는 자동차부품공업의 노동조건을 불건전한 방향으로 이끈다.

우리나라 자동차 부품의 공급은 완성차 직접생산, 국내부품업체 하청생산, 외국부품기업 수입 등 세가지 방식이 있다. 우리나라 완성차기업의 외주 의존율은 65% 정도로 미국보다 높고 일본보다 낮다. 81년 712개였던 부품업체 수는 91년까지 거의 2배 가까이 늘어 1401개가 됐다. 매출은 같은 기간 17배 이상 성장했다. 부품공업의 급속한 성장은 75년 생산계열화정책을 주도한 정부의 계획적 노력의 결과다.


75년 제정한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으로 79년 11월 상공부는 자동차부품계열화 선정요령을 발표해 품목을 지정하고 수급기업에만 제조를 허용하고 금융, 세제, 행정지원을 제공했다. 하청기업에 자본, 기술, 경영 등의 지원도 주었다. 주요기관 부품과 차체, 승용차의 변속기와 구동축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품은 부품수급업체가 생산토록 했다.

81-89년 부품공업의 매출 신장률은 10.6배로 동기간 7.7배 성장한 완성차 성장속도를 훨씬 앞질렀다. 그러나 급속한 양적 성장에도 계열화정책이 의도한 기술전문화에 의한 수평적 분업이란 질적 변화에는 실패했다. 여전히 부품기업 규모는 91년 현재 50명 이하를 고용하는 영세업체 비중이 48.4%나 된다. 100명 이하를 고용하는 게 70%에 육박한다.

역사가 오래된 원청의 횡포

하청업체들은 대기업의 영향권하에 종속된 비자율적인 기업집단이다. 자동차부품공업의 기술수준은 금형 도금 용접 열처리 설계기술 등에서 크게 뒤진다. 부품업체 중 43.5%가 모기업의 기술지도에 의존한다.

정부의 부품생산의 계열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은 모기업 분산형 거래비중이 높은 수평적 분업구조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수평적 분업은 여러 완성차업체에 부품을 독립적으로 공급하는 부품업체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다.

대부분 모기업과 전속 거래한다. 90년 KDI 조사결과 전속형 수급기업이 전체의 44.5%, 준전속형이 26.9%로 전체 71.4%가 모기업에 의존했다. 계열화 수급기업조차 전체의 32.9%가 오직 1개 모기업과 거래했다.

결국 정부의 부품 계열화정책이 부품공업의 양적 성장은 시켰지만 기술전문화를 통한 수평적 분업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다. 완성차업체와 1차 수급업체 간 계열화는 비교적 확립된 반면 2차 수급기업간 계열화는 발달하지도 못했다. 1차 수급기업수가 생산규모에 비해 너무 많은 것도 문제다. 생산규모가 우리나라의 10배에 달하는 일본은 도요다가 230개, 닛산이 160여개, 혼다가 307개 정도인데 반해 우리나라 현대차는 277개의 수급기업이 있다.

모기업이 부품기업의 계열화 승인을 통해 기술특화나 전문화에 협조하지 않는다. 모기업은 부품발주때 계열승인업체에 우선 발주하는 게 아니라 단순 부품업체에도 경합 발주해 계열화 승인업체가 기대하는 수급상의 이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기업이 아직도 부품하청업체를 비용감축을 위한 수탈대상으로 본다. 전체 부품업체의 60% 이상이 오직 1개 모기업과 거래하는 상황에서 모기업은 동일 부품의 공급처를 다원화해 부품기업과 관계를 더 불균형하게 만든다. 그러나 부품공급선의 다원화는 장기로 부품업체의 영세화를 부추겨 완성차의 경쟁력 향상을 방해한다. 동일부품을 1개 부품기업에 의존하는 경우는 45%이고, 나머지 55%는 동일부품의 공급을 2개 이상 기업에 동시 발주한다.

90년대 초 자동차 원/하청의 노동조건 격차

완성차업체와 부품업체 사이의 임금격차는 80년대 이후 계속 확대했다. 91년 완성차 고졸 남자 생산직의 월평균급여 초임은 57만533원이었다. 부품업체는 45만8347원으로 완성차의 80% 정도다. 이는 표본의 문제로 격차가 작게 추정됐다. 전체 부품사 중 50명 이하가 48.4%인데 비 보고서 표본 중 50명 이하는 14.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전국금속노동조합연맹은 임금격차가 62.5%라고 보고한다. 일본은 부품업체의 임금수준이 완성차의 94%에 달한다.

완성차와 부품사의 임금인상은 88-90년까지는 모두 15-20%이상 높았다. 91년 이후 완성차는 5-10%로 안정, 부품사는 여전히 15%이상 높은 인상률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는 겉으로만 그런 거다.) 완성차 대기업은 90년부터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초과하지 않는 임금인상률을 공표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종류의 상여금을 신설해 실질임금은 훨씬 높게 올렸다. 90년 말 현재 1240개 부품사 가운데 노조가 있는 곳은 268개(21.6%)고 조하부언 수는 12만1232명(42.7%)다. 50명 이하 업체의 조직율과 조직인원 비율은 2.7%, 14.3%에 불과하다.

불평등한 하청구조는 이미 하청업체의 노사관계에 상당히 영향을 주고 있다.

부품사 설문조사 결과

이번 조사에 응한 61개 기업의 평균 종업원 수는 260명이다. 응답한 1개 대기업이 1434명이라, 이를 제외한 60개 사의 평균 종업원 수는 240명 수준이다. 응답한 59개 부품기업의 고졸 생산직 초임 기준 평균임금은 62만8300원이었다.

저임금의 원인을 묻는 질문에 낮은 하도급 단가(69.6%), 낮은 생산성과 취약한 기술개발능력(15.2%), 대기업의 부담 전가(8.7%) 순으로 답했다.

노조 집행부의 역할 평가항목에는 매우 잘함(7.9%), 다소 잘함(47.4%)였고, 다소 미흡(5.3%), 매우 미흡(2.6%)로 나타났다.

통계적 한계 속에 얻은 결론

이 연구의 중심 가설은 1개 모기업과 지속거래하는 게 관계특유기술을 발전시켜 발주 안정성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다. 그러나 표본이 너무 작아 확인할 수 없었다. 좀 더 정교한 표본추출과 더 많은 수의 표본을 추출해야 한다.

하청단가의 부당한 인하압력은 기술개발 정도나 하청거래상의 특성과는 무관하게 거의 모든 부품사가 경험했다. 다른 특징보다 ‘발주 안정성’이 부품사 종업원의 임금에 더 직접 영향을 줬다. 따라서 부품사 종업원의 복지향상을 위해선 모기업의 안정적 발주유지가 중요했다. 모기업이 부품수급기업의 노사협상에 간섭할수록 부품기업의 파업 빈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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