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

[기고] 또다시 희망 버스를 기다리며

옷장 서랍 안에는 아직 비닐 포장을 뜯지 않은 양말이 한 켤레 들어 있다. 빨아놓은 양말들을 개어 서랍에 넣을 때마다 비닐 포장지에서 바스스 소리가 난다. 비닐 안에는 꽃분홍색으로 발뒤꿈치를 장식한 새 양말과 직접 펜으로 쓴 편지가 들어 있다.

"당신을 통해서 희망을 봅니다. 희망의 버스에 용기를 싣고 오셔서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먼 길 선뜻 와주셔서 감사합니다.-정리해고 반대 가족 대책위 드립니다."


희망의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다시 한진중공업 공장 문을 나서던 6월 12일 오후. 한진중공업 조합원들과 가족들은 희망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돌아가는 길 양쪽에 서서 배웅을 했다. 고맙다고, 힘내시라고, 서로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새댁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찾아온 손님들이라고, 가는 길에 한사람한사람에게 모두 직접 쓴 편지를 담은 양말 한 켤레씩을 쥐어주면서 그들은 울고 있었다. 나 또한 양말을 받아들며 눈물을 흘렸다. 유난히 눈물이 많던 젊은 그녀들. 품에 아이를 안은 젊은 엄마에게 나는 진심으로 당부했다. “아기 잘 키워야 해요.”

김진숙이 지키고자 하는 것도 일상의 소중함이다. 이 젊은 엄마가 지금 안고 있는 아이와 함께 안전하게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일. 그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지난 1월 그는 85호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대부분의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할매 또는 이모라고 부르던 김진숙이란 사람. 눈물을 말리려 하늘을 보았을 때 그가 크레인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가 다섯 달 이상을 산 크레인에는 널어놓은 빨래가 펄럭이고 있었다. 저 곳이 너른 마당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맑은 날, 깨끗하게 빨아놓은 빨래를 마당 빨랫줄에 널고 그를 찾아 전국에서 놀러온 손님들과 차 마시고 밥 먹는 그런 마당이라면, 그곳에 그가 있다면 오늘은 얼마나 좋은 날이겠는가. 크레인 위에서 들려오는 그의 육성은 일상의 소중함을 호소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이전인 6개월 전으로 되돌려놓는 일, 공장에서 일하고 번 돈으로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사는 소박한 평화를 지켜주는 일. 한진중공업을 떠나던 날에 나는 그 소박한 평화가 그리워 많이 울었다. 지금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젊은 엄마들, 그리고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갈 젊은 남편들, 이 넓은 공장에서 사람들마저 썰물처럼 빠져나가 희망의 버스에 오르고 나면 저 아픈 가슴들을 어찌할 건가. 이 텅 빈 공장에 가득할 외로움과 두려움을 어찌할 건가.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해고된 노동자들의 가족들이 건넨 양말을 신지 못했다. 아니, 앞으로도 이 양말을 바라보는 일이 아프지 않은 날까지 나는 이 양말을 신지 못할 것 같다. 양말 속 편지글 옆에는 주홍빛 모자를 쓴 아기의 사진이 담겨 있다.

6월 11일 저녁, 울산에서부터 함께 온 일행들과 함께 한진중공업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경찰차에서 집회를 해산하라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회사에서 고용한 것으로 보이는 경비대들이 공장 출입문을 모두 막고 있다. 경찰과 대치하고 있는 집회장에 어린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여성들이 보였다. 어떻게 아기를 안고 이곳엘 왔냐고 물어보니 친구의 아기인데 친구의 남편이 해고가 돼서 친구가 가족대책위에서 투쟁을 하고 있는 동안 아기를 대신 돌봐주고 있다고 한다. 아직 미혼인 그들은 친구들이 집회를 할 때면 달려와서 어린 아기들을 돌봐주는 방법으로 친구들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그때 때마침 아기의 엄마가 다가온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엄마다. 앳된 티가 나는 얼굴에는 풋풋함까지 묻어난다. 한창 아이 키우는 재미에 빠져 살 때인데 근 반년을 집회장으로 쫓아다니느라 지쳤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생기 있고 씩씩해 보인다. 젊은 엄마들을 보니 내가 첫 아이 키울 때가 생각났다. 돌아보니 엄마가, 아빠가 당당하게 사는 것이 아이에게는 가장 좋은 환경이었던 것 같다. 이 집회장에서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을, 아무 걱정 말라고, 마음 속으로 젊은 엄마들을 격려하고 응원해본다.

밤 11시 11분, 전국에서 온 희망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촛불 행진을 마치고 막 한진중공업 정문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민주 노조 사수하자”, “생존권을 지켜내자.” 천여 명의 대열 속에서는 계속 구호가 터져 나왔다. 구호가 쉬는 사이사이 “횡단보도 쪽으로 올라오세요”,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차들이 다니는 데 방해가 될까봐 그러는가 싶었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횡단보도 쪽으로 달려가는 기색이 예사롭지가 않아 나도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 횡단보도 쪽으로 달려갔다. 가보니 한진중공업 담벽의 안팎으로 철 사다리가 세워져 있었다. ‘아, 담을 넘어 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거구나.’ 순간적으로 상황을 알아차렸지만 난감했다. 담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당혹스러웠다. 아주 짧은 순간에 나는 내 나이와 몸무게와 관절염까지 떠올리며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가는 일을 망설였다. 그러나 마음이 결정을 못 내리는 사이 내 몸은 먼저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었다. 이 사다리를 올라타야만 저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다리를 오르고 내리는 동안 생각보다 다리가 많이 떨렸지만 여러 군데 사다리에서 함께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용기가 났다. 다리가 몇 번 더 후들거리고서야 나는 공장 바닥에 뛰어 내릴 수 있었다.

공장 안에는 푸른 작업복을 입고 모자를 쓴 노동자들이 있었다. 한쪽에는 천막 농성장이 세워져 있다. 공장 안으로 들어왔다는 안도감도 잠시, 나는 순간 멈칫하며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곳은 분명 한진중공업이지만, 그러나 이곳은 내가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본 쌍용자동차 파업 현장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살기 위해 공장을 지키던 쌍용차 노동자들. 이곳에도 살기 위해 공장을 지키는 노동자들이 있다. ‘여보 꼭 이기고 돌아와’ 천막 농성장 앞에는 가족대책위에서 내건 현수막이 달려있다. 내가 카메라를 꺼내 들자 현수막 앞을 지나가려던 노동자들이 잠시 멈춰 서서 촬영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공장안의 목소리를 하나라도 더 담아내 보내라는 호소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동전의 양면 같아요.”
공장 담을 넘기 직전 정문 앞 도로에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던 한 노동자는 지금 공장 앞의 모습이 동전의 양면 같다고 했다. 공장 앞을 막고 있는 구사대들이나 공장 안의 노동자들이나 모두 똑같은 노동자인데 이렇게 서로 막혀 있는 모습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나는 안타깝다는 게 어떤 심정이냐고 좀 더 깊숙이 질문을 던져 본다.

“마음이 힘든 거죠. 바로 옆이잖아요. 저 사람들이나, 우리들이나 조금만 깨닫고 보면 모두 바로 옆인데 이렇게 서로 가로막혀 있다는 게 힘든 거죠.”

한 몸이면서도 서로 마주볼 수 없는 동전의 양면. 나도 그랬다. 구사대처럼 회사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아니었을 뿐, 내가 이곳에 오기까지 무심했고 침묵했던 세월은, 지금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는 그저 닿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뒷면의 동전과도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공장 담을 넘으면서 나는 비로소 양면의 관계를 녹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저 크레인 위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라며 크레인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반가운 마음을 던지는 김진숙이란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동안 나는 얼마나 먼 곳에 있었던 가를 다시 깨닫는다. 열아홉 살 이후 단 한 번도 스스로 삶을 선택해서 살아본 적이 없다던 그. 일하다가 잘못되면 뺨을 맞는 일이 허다했던 공장에서 뺨을 맞고도 아무 저항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했다던 젊은 그가 이 공장에서 해고된 세월이 25년이다. 삶을 선택하기도 전에 그를 막는 억압을 헤쳐나가기도 벅찬 삶이었을 듯하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세 명의 노동자가 제물로 오른 공장. 마을의 젊은 여인을 낚아채가고야 잠시 동안 마을의 안정을 던져줬다는 전설 속 검은 괴물처럼, 한진중공업은 세 명의 노동자가 죽은 댓가로 공장 안 노동자들이 잠시 동안 생존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런 한진중공업에서 지난 2월 노동자 170명이 정리해고되었다. 정리해고 통보를 받고 스스로 퇴직을 신청한 노동자의 숫자까지 합치면 400여명이 지난 1월 이후 일터에서 내쫓겼다. 산 자와 죽은 자에게 모두, 한 번 죽고 두 번 죽고, 죽고 또 죽으라는, 해고 통보가 예고되던 날, 김진숙은 크레인에 올랐다. 그가 이 크레인에 있는 동안 두 명의 노동자가 옆 G17 타워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사이, 세 명의 노동자가 한진중공업의 하늘 위에서 깃발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땅에서는 파란 천막이 섬처럼, 아니 산처럼 공장을 지키고 있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죽은 자와 산 자의 영혼이 어우러져 연대 투쟁을 하는 기묘한 풍경이었다.

저 맑은 하늘에 공장 하나 세워야겠다
따뜻한 밥솥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고 웃음방울 영그는 곳
그곳에서 연기 나는 굴뚝도 없애고 철탑도 없애고
손과 발을 잡아먹는 기계 옆에 순한 양을 놓아 먹이고
고공농성의 눈물마저 새의 날갯짓에 실어 보내야겠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
하늘공장에서는 구름다리 위에 무지개로 필 것이다
삶은 고통일지라, 죽어도 추억이 되지 못하는 고통을
하늘공장의 예배당에서는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힘없이 잘린 모가지를 껴안고 천천히 해찰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공장으로 출근을 해야겠다
큰 공장 작은 공장 모두 하나의 문으로 통하는
하늘공장에 가서, 저 푸르른 하늘공장에 가서
부러진 손과 발을 쓰다듬고 즐겁게 일해야겠다
땀내 나는 향기를 칠하고 하늘공장에서 퇴근하는 길
지상에 놓인 집 한 채가 어찌 멀다고 이르랴
-임성용 시 ‘하늘공장’ 전문-


35미터 크레인 위에서 들려오는 김진숙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나는 내내 이 시가 떠올랐다. 그가, 그리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삶은 이토록 소박한 일상인 것을. “이제 나를 보지 말고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바라봐달라”는 그의 말은 지금도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달려오고 있다.

“해고자가 생기지 말아야 하고 부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아야 해요. 그리고 이런 일을 겪으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면 안됩니다. 이미 세분의 열사가 계신 곳인데 더 이상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정말 안타깝죠.”


아침 여덟시 경, 공장 안 건물 5층에서 세 시간 정도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1층 광장에는 사람들이 전북 군산의 ‘평화바람’이란 단체가 준비해온 국밥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쌍용자동차에서 해고된 노동자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77일간의 긴 투쟁을 겪은 그는 한진중공업의 투쟁이 지난 해 쌍용자동차의 투쟁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77일간의 투쟁을 기억하긴 싫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그때의 기억이 또 새록새록 날 때도 있다고 한다. 이어지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경제적인 거겠죠.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다보면 그로 인해 가정 불화도 생기고 그러다 보니...”

해고는 한순간에 날아드는 폭탄과도 같은 것이다. 그에게도 가장 큰 고통은 ‘가족’이라고 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가족 생각뿐이라는 그는 지금 공동체에서 카센터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해고도 그의 잘못이 아니고, 가족이 살아가기에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는 것도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는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한다. ‘미안’이라는 말이 그에게는 ‘사랑’의 다른 이름 같았다. 사랑이 온전하게 사랑으로 전해지는 날이 우리에게 온다면, 더 이상 미안한 사랑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상들이 우리에게 다가 온다면.

배우 김여진씨가 날라리 밴드와 함께 새벽에 공장문을 나서다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에 공장 안이 잠시 술렁댄다. 잠시 후 울산에 있는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여진씨의 연행소식과 더불어 인터넷에서는 한진중공업이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고, 공장 안 상황은 좀 어떠냐고 묻는다. 나는 자뭇 심각하게 ‘아주 심각하다’고 엄포를 놓은 뒤, 어쩌면 공장 안에 있는 우리 모두 다 연행되어서 한 며칠 집에 못 들어갈지도 모르니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비장한 말까지 곁들인다. 남편은 내말을 그대로 믿는 듯하다. 한진중공업의 기사가 인터넷 주요 기사로 자주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장 안은 잠시 긴장감이 있긴 했지만 사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판소리가 어우러지고 또 다른 쪽에서는 판화 찍기, 초상화 그리기가 한창이다. 끊김 없이 늘어서 있는 줄에 지칠 만도 하건만 판화가 이윤택은 ‘꽃을 든 여인’을 한지에 계속 찍어낸다. 나는 공장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공장 밖에서 밤을 새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황인화에게 줄 판화를 그에게 부탁했다. 황인화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 때 분신을 했다가 살아난 노동자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몸과 마음을 치유해야 할 그를 위해 나는 가슴에 꽃을 담은 판화 한 점을 꼭 건네고 싶었다. 잠 한숨 못자 정신이 혼미하다는 판화가 이윤택은 그래도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더니 4B 연필로 "인화님께"라는 글을 판화를 담은 한지 종이에 눌러 적는다. 행여 구겨질까봐 나는 종이와 비닐을 구해 판화를 꼭꼭 봉한다. 이 그림을 황인화가 제 가슴에 수놓기를, 아니, 오늘 이 재밌고 예쁜 축제 같은 투쟁이 그의 가슴에도 희망으로 살아나길.


공장 문을 나서기로 한 세시 반이 다가온다. 공장 문을 나서는 일은 떠나는 사람이나 남아 있는 사람 모두에게 힘든 일이다. 아니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떠나는 사람들보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지금보다 더 힘겨운 고통의 시간이 몰려올 것이다. 6월 11일, 12일 이틀 동안 전국에서 모여든 천여 명의 사람들이 공장 안팎에서 머무는 동안, 김진숙과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우리가 돌아간 이후의 시간을 염려했다. 사람이 떠난 자리의 허전함이나 외로움이 당장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그런 것을 생각하는 건 사치일지도 모른다. 더 큰 힘이 뭉치는 걸 막기 위해 회사와 정부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한진중공업에서 희망 버스가 떠나간 며칠 뒤, 곧 한진중공업에 공권력이 투입될지도 모른다는 긴박한 소식이 떠돌아 다녔다. 김진숙이 머무는 크레인과 같은 구조의 크레인을 회사측 사람들이 답사하고 내려간 뒤, 김진숙은 휴대폰에 저장된 메모와 사진들을 모두 지웠다고 했다. 무엇이 무거워서 그는 휴대폰 속의 기억조차 모두 지웠던 걸까. 난 그가 말하는 ‘하나뿐인 선택’이 너무 두렵다... 내가 상상하는 그런 것이 아니길, 그의 선택이 그것이 아니길, 그럴 거라고 꼭 믿고 싶지만 막다른 길로 몰린 사람 앞에 서있는 벽처럼 다른 상상이 떠오르지 않는 일은 너무 참담하다. 이럴 순 없다. 희망 버스가 떠나간 후 예민한 긴장감이 공장을 휘감는다. 희망 버스는 누구에게 희망이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희망이 되어야 하는가. 답은 하나다. 가장 위급한 사람에게 희망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외롭지 않음을, 우리가 정당한 것임을”
“저들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나는 저들을 버릴 수 없는 백가지도 넘는 이유”
“85호 크레인 대신 우리 조합원들을 기억해 달라.”

내 수첩에는 김진숙의 말이 가득 적혀 있다.

“우리가 또다시 힘들게 투쟁한다면 다시 이곳에 올수 있겠는가?”라고 되묻던 그 누군가의 외침도 마음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이 ‘2차 희망 버스 출발 위한 모임을 합니다’라는 문자가 폰 화면으로 떠오른다. 꽃처럼 가슴에 머무는 글이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공동선' 7,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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