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없는 사회를 향해

[신간안내] 『성폭력 뒤집기-한국성폭력상담소 20년의 회고와 전망』(한국성폭력상담소, 이매진, 2011)

1988년 귀가하던 다방 여종업원이 파출소에 끌려가 윤간을 당하고 성병까지 옮았지만, 가해자 경찰들은 무혐의 처리되고 오히려 피해자 강○○이 무고죄와 간통죄로 구속됐다. 1986년 위장 취업 혐의로 구속된 여대생 권○○이 부천서에서 성 고문을 당했다. 1991년에는 21년 전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한 ‘김○○ 사건’이, 1992년에는 13년 동안 자기를 강간한 의붓아버지를 남자친구와 함께 살해한 ‘김○○·김△△ 사건’이 일어났다. 1993년에 일어난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은 성희롱을 사회 문제로 공론화시켰다. 2004년에는 밀양 여중생 집단성폭력 사건이 일어났는데, 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신원이 노출되고 경찰이 “밀양물 흐려놓았다”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등 총체적인 2차 피해가 발생했다. 2008년, 8세 어린이를 강간해 대장과 항문, 생식기의 80퍼센트가 손상되는 중상해를 입힌 조○○ 사건이 일어나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최연희, 강용석 의원 등 정치권과 법조계 인사들의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접대 등의 사건도 잊을 만하면 등장하고 있다.

2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꾸준히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 하루가 멀다 하고 성폭력 범죄에 관한 기사가 오르내리고, 한국 여성 중에 성폭력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20년 전 ‘무서운 세상’, ‘딸 키우기 힘든 세상’을 뒤집겠다며, 성폭력에 맞서고 성폭력 피해자를 돕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다. 바로 ‘한국성폭력상담소’다. 2011년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만들어진 지 20년을 맞이하는 해다. 『성폭력 뒤집기』는 개소 20주년을 맞아 그동안 상담소가 어떻게 활동해왔는지 돌아보고 앞으로 반성폭력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책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꿈꾸는 세상

2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는 성폭력이라는 말조차 없었다. 물론 성희롱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성폭력은 ‘강간’이나 ‘성폭행’, ‘정조를 잃다’는 표현으로 대체됐다. 남성 중심적 성문화와 잘못된 사회 인식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는 당당하고 오히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이 알려질까봐 쉬쉬하며 피폐한 삶을 사는 일이 반복됐다. 1990년 성폭력 신고율은 단 2.2%였을 정도다.

1991년 60여 명의 젊은 여성학도가 모여 창립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의 실상을 전면에 드러내면서 성차별과 편견으로 얼룩진 성문화에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여성·시민단체와 연대해 피해자를 지원했고, 반성폭력 법제화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으며, 남성 중심적 성문화에 맞서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벌여왔다. 그리고 20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성과가 있었다. 무엇보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을 시작으로 법제도가 잘 정비됐고, 성희롱 예방교육이 의무화됐으며, 사회 전반의 인식도 많이 개선된 편이다. 상담소가 모은 7만여 건에 이르는 상담 사례는 다양한 연구와 정책 제안의 근거이자 토대가 됐고, 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통합 지원하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 더 나아가 여성이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기를 희망하며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밤길되찾기 시위 등 다양한 행사를 치르며 ‘성폭력 뒤집기’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친고죄나 양형기준, 그리고 여전한 성차별적인 통념 등이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상담소가 걸어온 7300일의 여정에는 6만 7264건의 기록을 남긴 내담자들, 1095명의 후원회원, 253명의 열림터 사람들, 그리고 60명의 발기인과 100여 명이 넘는 전현직 상근활동가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자원활동가들이 웃고 울며 함께했다. 이 책은 이 많은 사람들 중 상담소 초대 소장, 상근활동가, 자원봉사자, 열림터 원장, 변호사 등 상담소의 긴 역사에 함께한 사람들이 모여, 성폭력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또다른 20년을 위해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한눈에 정리하는 한국 반성폭력 운동사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활동은 성폭력 피해자 상담과 지원, 반성폭력 법제도 감시 활동, 성평등한 성문화 확산 운동의 세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이 책의 내용도 이런 큰 줄기를 따르고 있다. 1부는 상담소가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 사회적 평가는 어땠고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등을 회상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200여 개에 이르는 성폭력 관련 시설들이 참고하면 좋을 내용이 담겼다. 2부는 상담소가 지향하는 여성주의 상담이 무엇인지 살피고 성폭력 피해자 지원에 관한 여러 쟁점을 구체적으로 다뤘다. 3부는 상담소의 부설 기관인 열림터의 역사를 돌아본다. 근친성폭력 피해자 등 갈 곳 없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쉼터로 시작한 열림터를 통해 진정한 치유회복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4부는 상담소가 관여하고 주력한 반성폭력 법정책 운동을 다루고 있다. 성폭력특별법 제정에서 신상 공개와 전자발찌 제도까지, 그리고 최근 논란이 된 임신중단 ‘권리’에 관한 문제까지 상세히 분석한다. 20년에 걸친 한국 반성폭력 운동의 사건과 흐름을 한눈에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5부는 상담소가 성평등한 성문화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기록했다. 6부는 상담소 20주년을 맞아 여성학자, 칼럼니스트, 정치인, 인권 활동가, 여성운동가 등(권김현영, 김현진, 남윤인순, 엄기호, 오진아, 차인순, 최영애 등)이 모여 여성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하고, 앞으로 반성폭력 운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펼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의견을 나눴다.

성폭력은 인류 역사와 함께 존재해왔다. 그래서 성폭력에 맞서는 싸움은 수천 년 역사와 맞서는 싸움이다. 이 지난한 싸움에 나선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꿈꾸는 세상, 성폭력 제로 사회를 향한 아름다운 여정에 이 책은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차 례

1부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운동에 새 길을 내다 - 최영애

1장 20년을 되돌아보며
2장 새로운 여성운동을 구상하다
3장 왜 ‘상담소 운동’인가
4장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기틀을 닦다
5장 본격적인 반성폭력 운동을 펼치다
6장 또 다른 20년을 시작하며

2부 상담하는 여성주의 - 이어진, 조중신

1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
2장 여성주의 상담을 통한 ‘말하기’
3장 여성주의 상담이란 무엇인가
4장 통계로 보는 상담
5장 상담에 관련된 쟁점들
6장 상담, 세상을 움직이는 운동

3부 열림터, 그녀들의 쨍한 순간 - 정정희

1장 안전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
2장 열림터가 열리다
3장 열림터에서는 어떻게 살까
4장 여성주의 쉼터의 9가지 노력
5장 자립지지공동체 ‘하담’의 탄생
6장 열림터의 꿈과 희망
7장 2일에서 1400일까지, 253명의 생존자들에게 지지를 보내며

4부 법의 ‘객관성’을 재구성하다 - 이경환, 이미경, 장임다혜

1장 성폭력 신고율 2.2퍼센트
2장 법정책 운동을 펼치다
3장 법정책 운동은 무엇을 남겼나

5부 성폭력 문화에 맞서다 - 권김현영, 김민혜정, 변혜정

1장 성문화에 반기를 들다
2장 큰 시도, 작은 변화
3장 성폭력과 성문화의 관계를 비틀다
4장 한국 사회 성문화 뒤집기

6부 좌담회 반성폭력 운동, 길에서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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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소 , 성폭력 제로 , 성폭력특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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