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주의와 혁명적 폭력 사이에 서 있던 브레히트

브레히트 평전 (로널드 그레이, 박양묵, 1984.10.20, 254쪽)

우리는 베르톨트 브레히트하면 중학생 필독서가 된 <서푼짜리 오페라>나 <갈렐레이의 생애> <억척어멈과 그 자녀들> <안티고네> <푼틸라 씨와 그의 종 마티>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 <스촨의 착한 여인> 등의 희곡을 쓴 극작가로 안다. 아니면 김남주 시인이 번역한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를 쓴 시인으로 안다.

망명 지식인 vs 국수주의 전쟁광

비판적 사실주의 예술가 정도가 정답일 것이다. 브레히트 개인사는 그리 녹녹치 않다. 나치에 쫓겨 독일에서 이웃나라로, 다시 스칸디나비아, 미국 등으로 망명했지만 그보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 때인 1914년 16살의 브레히트는 열렬한 애국심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1914년 16살의 어린 학생으로 친구들과 함께 열렬한 애국심에 사로잡혀 대공 감시병으로 지원입대하려고 했다. 17살 때는 황제의 생일을 기념하는 시를 썼다. 전쟁의 열기에 휩싸인 브레히트는 1차 대전 막바지 1918년 10월 결국 대학 입학과 함께 아우구스부르크 군병원에서 위생병으로 참가한다.

브레히트는 1953년 6월 16일 수 만 명의 동베를린 시민과 노동자가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에 항거해 봉기했을 때 17일 아침 동독의 국가원수 올브리히트에게 충성 편지를 발표한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항상 평화주의와 혁명적 폭력 사이에 서 있었다. 망명을 마친 브레히트는 서독과 동독 어느 쪽에 정착할지 선택해야 했다.

영국의 평론가 로널드 그레이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작가 브레히트(1898-1956)의 평전을 한 세대 뒤 1970년대에 썼다. 번역자 임양묵은 1984년 이 책을 번역할 당시 고려대 대학원생이었다. 번역자 임 씨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책을 원저자인 그레이의 시각을 뛰어넘어 비판적으로 읽으라고 권한다.

브레히트의 생애

브레히트는 1898년 2월 10일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중에 공장장으로 승진한다. 1914년 16살의 브레히트는 열렬한 애국심으로 전쟁을 지지한다. 1918년 10월 대학에 들어갔으나 아우구스부르크 군병원에서 위생병으로 일하면서 첫 희곡 <바알>을 썼다.

1922년 마리안느 조프와 결혼했다. (1927년 이혼) 1926년 <자본론>에 심취했다. 1928년 <서푼짜리 오페라>가 큰 성공을 거둔다. 1929년 헬레네 바이겔과 결혼하고 최초의 선전선동 연극을 쓴다. 망명기인 1933-47년 덴마크, 핀란드, 미국을 떠돌며 <억척어멈과 그 자녀들> <갈릴레이의 생애> <스촨의 착한 여인> <코카사스의 백묵 원>을 쓴다. 1947년 유럽으로 돌아온다.

1949년 베를리너 앙상블 극단 창설하고 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 때 올브리히트에게 충성 편지를 발표한다. 1955년 모스크바에서 상을 받고 1956년 죽었다.

초기 마르크스주의 정치 희곡들

혁명가들은 연극을 통해 노조와 정치집단들에게 노동자의 처한 상황을 인식하도록 깨우쳤다. 1847년 엥겔스는 브렛셀의 사교극장을 위해 혁명 단막극을 썼다. 최근 발견된 엥겔스의 희곡 <리엔찌>는 1938-40년에 썼다. 독일 내 노동계급의 연극은 라쌀을 따르기보다 마르크스를 따랐다. 독일 노동계급은 자신들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감상적 멜로드라마를 보려고 극장으로 떼 지어 몰려갔던 영국 노동계급과 달리 좀처럼 극장에 가지 않았다.

1차대전 말기 브레히트가 극작가를 시작할 무렵 독일은 정치극 전통이 있었지만 모두 단명했다. 당대 알려진 극작가들은 브레히트와 달리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정치극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건 브레히트의 역할이었다. 브레히트는 1918년 휴전 뒤 몇 년 동안 국제 노동계급의 승리가 임박했다는 묵시록적인 기대를 품었다.

브레히트의 초기 희곡들은 전후 독일이 처한 혼란의 와중에 작성됐다. 브레히트는 당시 마르크스적 이상과 니체적 이상이 뒤섞인 멜로드라마류의 표현주의 작품에 공감하지 않았다.

독일 제국은 46년만인 1918년에 사라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 대한 심각한 공포가 계속됐다. 브레히트는 낡은 질서가 붕괴하고 새 질서가 정해지지 않았던 시점에 스무 살을 맞았다.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를 쓸 때까지 브레히트는 어느 쪽에 충성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1928-1934년 쓴 열 개의 교훈극은 브레히트가 공산주의 원칙을 연극형식으로 전달하려고 한 것이다. <조치>의 마지막 구절 “오직 현실을 배움으로써만 우리는 현실을 변혁할 수 있다”가 그 예다.

나치를 한껏 조롱하다

‘소격 효과’는 가장 간단히 말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이상스럽고 낯설게 보이도록 만드는 수단이다. 브레히트의 장치들은 이 목적에 부합된다. 브레히트는 자주 관객에게 회상에 젖을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 밤 장면조차 강한 조명을 썼다. 브레히트는 ‘소격’ 대신 헤겔의 ‘소외’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희곡의 묘사는 내용과 사건을 하나의 소외 과정에 종속시켰다”고 했다.

브레히트는 채플린보다 더 심각한 의도를 가졌다. 히틀러를 우스꽝스런 상황에 몰아놓고 바보 어릿광대로 만들어 히틀러를 비웃었다. 1948년에 쓴 <안티고네>는 반나치 작품으로 <시몬느 마샤르의 얼굴>보다 우수하지 못하다. <안티고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각색한 거다.

미리 본 동독의 비극 : 갈릴레이의 생애

브레히트는 1937-39년에 쓰고 1945-47년에 수정한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흥미롭게도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가 2차 대전 후 동독에서 처한 상황의 많은 부분을 예견했다. 동독은 중세 가톨릭 교회보다 더 반대세력을 참지 못하는 정권이었다.

<갈릴레이의 생애>는 성숙한 작품 중 하나다. 질식할 듯한 정권하에서 그릇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번갈아 가며 찾아드는 자기비난과 자기주장을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 보여준다. 이 작품은 <2차 대전에 참전한 쉬바이크>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갈릴레오의 적인 추기경들을 공평하게 취급하고 단순한 기독교 신자들이 만일 종교의 풍부한 위안을 박탈당하면 거친 삶을 어떻게 살지 묻는 작은 수도사의 논의를 들어주는 것은 <갈릴레이의 생애>를 선전선동적 작품보다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는 복합성의 표시들이다. 한 가지 해답을 주거나 암시하기를 꺼리는 새로운 태도는 1930년대 후반에 나타난 브레히트의 본질적 특징이다.

억척어멈과 그 자녀들

D H 로렌스는 싱의 1911년 작 <바다로 가는 기사들>을 “셰익스피어 이래 영어로 쓰여진 극적인 비극 중 가장 순수한 소품”이라고 말했다. 로렌스는 “작가는 군중 속에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정강이를 걷어차거나 장난을 하거나 해서 흥겨워하면서 그 속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1937년에 쓴 브레히트의 <카라르 부인의 총들>은 싱의 무대를 아일랜드에서 스페인으로 옮겼다. 내란 중 평화주의적 입장도 싱을 모방했다. 배경이 바닷가 어부의 오두막인 것도 모방이다. 통곡하는 여인들의 결말도 똑같다. <카라르 부인의 총들>에 대한 브레히트 자신의 불만이 몇 년 후 <억척어멈과 그 자녀들>을 쓰도록 했다. 브레히트는 항상 평화주의와 혁명적 폭력 사이에 서 있었다.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군인들에게 물자를 팔는 억척어멈은 성장한 자식을 하나씩 차례로 잃는다. 그녀는 화란이 요리사에게 추파를 던지고 피난 종군 목사에게 은신처를 주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암담한 가운데 자신의 포장마차를 혼자 끌고 간다.

냉소적 합창에 맞춰 억척어멈이 무대를 빙 돌아 마차를 끌고 가는 마지막 장면의 파국적 결말에도 이 작품은 긍정적 순간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막이 내릴 때 벙어리 딸 카트린은 살아 있는 애기를 품에 안고 있다.

<푼틸라 씨와 그의 종 마티>와 <스촨의 착한 여인>

1940-41년 핀란드의 작가 우올리조키의 얘기를 바탕으로 쓴 <푼틸라 씨와 그의 종 마티>는 아마 <억척어멈과 그 자녀들>을 빼면 브레히트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 구조에서 보다 ‘서사극’에 속한다. 푼틸라는 겨우 90마리의 소와 작은 삼림을 지닌 부유하지 않은 핀란드의 지주다.

술에 취해 푼틸라는 종 마티를 인간으로 보고 딸 에바와 그를 결혼시키려고 한다. 술이 깨어서는 자기 딸을 외교관인 머장이 무관에게 시집 보내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푼틸라>의 간결한 논조는 <스촨>의 노골적이고 열정적인 분위기와 정반대다. <스촨>은 주인공의 이중적 면에서 <푼틸라>를 닮았다. 그러나 <스촨>은 서사극은 아니다.

착한 사람을 찾기 위해 내려온 세 사람의 중국 신들의 얘기다. 신들은 착한 사람이라곤 창녀 센테밖에 찾지 못해 그녀에게 돈을 준다. 그러나 센테는 바로 걸인과 곤궁한 친구들에게 둘러싸인다. 센테는 실업한 비행사 선과 사랑에 빠지지만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선에게 파멸당한다.

센테는 사촌 쉬타로 변장해 공장을 세워 일거리와 임금을 줘 그녀의 애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 신들은 센테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사촌 오빠 행세를 허락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센테를 남겨두고 분홍빛 구름을 타고 하늘로 돌아간다. 이 작품은 문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그친다. 성경 속 착한 사마라아 인의 ‘우화’가 당시 기능했던 것처럼 하나의 교훈을 지적하는 것으로 머문다.

1948년 이후 브레히트와 <코카서스의 백묵 원>

극작가 브레히트의 활동은 <서푼짜리 오페라>와 <마하고니 시의 흥망성쇠>를 쓴 1920년대 후반과 ‘원숙한’ 희곡을 쓴 1937-44년에 절정이다. 그 다음 브레히트는 서독과 동독 어느 쪽에 정착하는지를 선택해야 했다. 브레히트는 1948년 동베를린을 방문한 뒤 이듬해 그곳에 정주했다. 1956년 죽을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동독이 그의 이상이 실현된 곳은 아니었지만 그는 서독의 자본주의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1951년 당시 많은 전직 나치당원이 서독에서 여전히 고관이었고 1952년에는 히틀러 친위대의 집회가 열렸다.

1952년 7월 중공 망명을 고려했다는 소문도 있다. 그가 동독 공산주의에 절망한 것은 일부는 사실이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최고의 조사를 발표했다. “오래 주의 억압받는 인민들과 이미 스스로를 해방한 인민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들은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장의 고동이 멎는 듯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 스탈린은 그들 희망의 화신이었다.” 스탈린 사후 격하운동 때 브레히트는 스탈린주의의 문제점도 쉽게 말했다.

1953년 6월16일과 17일 수만 명의 동베를린 시민이 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에 항거해 봉기하고 드레스덴, 켐니쯔, 라이프찌히 등 많은 도시의 노동자들이 이에 합세했을 때 소련의 탱크는 6월17일 저녁 베를린의 모든 걸 장악했다. 6월17일 아침 브레히트는 사회주의 통일당 제1서기 발터 울브리히트에게 편지를 썼다. “역사는 사회주의 통일당의 ‘혁명적 인내심’에 존경을 표할 것입니다. (중략) 나는 이 시점에서 독일의 사회주의 통일당에 대한 나의 연대감을 당신에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브레히트는 동베를린 봉기가 서독의 나치들 때문에 일어난 걸로 생각했을 수 있다. 브레히트는 당국에 말로만 봉사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관심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브레히트가 동독에 가지고 들어간 <코카사스의 백묵 원>은 조르지아 지방의 봉기가 일어나는 동안 전제적 주지사의 어린아이를 구하는 그 지방의 처녀 그루샤에 관한 단순한 얘기다. 아즈다크는 도둑이며 기회주의자이며 겁쟁이인데 봉기 와중에 행운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다. 재판관으로 그는 부패하고 방탕하고 법과 질서를 경멸하는 놈이다.

여자들이 각각 아기의 한 팔을 붙잡고 당기는, 그리고 그루샤가 아기가 다칠까 잡아당기지 못하는 “백묵 원의 재판”이 끝난 다음 아즈다크는 그루샤가 진정한 모성적인 감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진짜 어머니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그러나 정의가 승리하는 감상적 결말이 아니다. 오히려 두 개의 정의관이 혼합한다.

브레히트 희곡의 참 가치는 엄청나게 광범위한 연극적 고안물과 혁신, 정치적 메시지나 설득력도 아니다. 브레히트 자신이 체험한 고통스런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누구에게나 상상력이라는 특별한 노력을 필요로 하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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