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할 수 없는 것은 죽어도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성웅의 식물성 투쟁의지](1)

[편집자주] 조성웅 시인의 시를 “식물성 투쟁의지”라는 주제로 연재합니다. 조성웅 시인은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출신 해고노동자로 비정규직 운동을 하며 노동 현장의 현실을 시로 노래하는 노동자 현장 시인입니다. 앞으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에 시를 게재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죽어도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박일수 열사 8주기에 부쳐

몸에 든 한기처럼 박일수 열사 8주기를 맞는다
아침 출근투쟁을 시작하면서 다시 자주색 투쟁조끼를 꺼내 입는다
색이 바래고 낡았다
이곳저곳 찢어져 박음질한 자리엔 저물어가는 비정규직 투쟁의 아픈 기억이 스며들고
투쟁조끼 등 쪽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는 글씨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

이렇게 낡아도 좋은 것이냐?
박일수 열사의 절규는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낡아도 좋단 말이냐?

현대중공업 하청노조 자주색 투쟁조끼를 입고 전국 투쟁현장으로 달려갔다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는 투쟁조끼를 벗지 않았다
이해남 열사가 분신한 자리에서 했던 다짐이었다
자주색 투쟁 조끼를 입고 부끄럽지 않게 살고 투쟁하는 것이
내가 박일수 열사를 새롭게 사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낡아도 좋은 것이냐?
박일수 열사의 절규는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낡아도 좋단 말이냐?

절박하게 투쟁했으나
난 적에게 겨누어진 칼끝을 내가 닮아가고 있다는 걸 생각도 못했다
난 동지들에게 친절하지도 따뜻하지도 못했다.
박일수 열사 투쟁 이후 몇 년간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투병했던 동지에게
밥 굶어가며 하청노조 활동을 하다
끝내 결핵에 걸려 현대중공업을 떠나야 했던 동지에게
난 내 마음의 따뜻한 탕약 한 첩 다려주지도 못했다

이렇게 낡아도 좋은 것이냐
박일수 열사의 절규는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낡아도 좋단 말이냐?

현대중공업에 다시 취직하기 위해 내게 노조탈퇴서 도장을 받으러 온 조합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를 지켜주지 못한 내가 오히려 더욱 미안했다
서로 미안해하고 눈물 글썽이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8년을 블랙리스트에 걸려 조선사업장을 전전했던 조합원이
“폭탄을 끓어 안고 현대중공업으로 뛰어 들어 죽고 싶다”고 피눈물을 흘릴 때
두 손을 오래도록 잡아주는 것 말고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폐가처럼 미안한 마음만 깊어가고 다시 함께 투쟁하잔 이야기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연민이 깊어질수록 이상하게도 투쟁조끼를 입는 것이 갈수록 힘들고 부담스러웠다

이렇게 낡아도 좋은 것이냐?
박일수 열사의 절규는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낡아도 좋단 말이냐?

민주노총운동은 정파운동으로 찌들고 활력은 대부분 고갈됐다
다른 정파하고는 밥도 같이 먹지 않았고 심장은 서류뭉치처럼 건조해졌다
오늘 민주노총 노동조합 관료들의 책상은 기후변화로부터도 안전하고 공황의 그림자로부터도 자유롭다
이제 계급투쟁은 조합비 날리고 민주노총을 깨는 분열행위로 규정되고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백 번의 싸움보다 한 명의 국회의원이 낮다고 선언했다
대공장 조합원들은 웃음이 사라졌고 세상에 대한 질문도 멈췄다
비정규직 중소사업장 여성노동자들은 비바람과 폭설을 견디며 아직까지도 거리에서 떨고 있다

이렇게 낡아도 좋은 것이냐?
박일수 열사의 절규는 아직도 생생한데
이렇게 낡아도 좋단 말이냐?

민주노총 의결기구에서 배제되고 고립된 투쟁사업장 동지들이 보고 싶었다
그들은 비바람과 함께 흐르고 있었고 첫눈과 함께 모이고 있었다
아이들을 가르쳤던 몸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기타를 만들 줄만 알았던 손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자동차 부품을 만들던 기름때 묻은 손으로 시를 작성해 낭송하고 있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행진하고 있었고 행진하면서 웃고 있었다
서로의 보폭을 맞추며 서로를 닮아가고 있었다

박일수 열사 8주기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은 박일수 열사의 불의 언어를
물과 바람과 대지의 언어로 번역해내는 일이다
한 몸이지 않고서는 흐를 수 없는 물처럼
우리 스스로가 평등해지지 않고서는 결코 새로워질 수 없다
어느 한 곳에 고정돼 굳어지지 않는 바람처럼
우리 스스로가 유영하는 몸이지 않고서는 단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새로워지는 것은 생명을 가진 여린 숨결들을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자본의 수탈이 진행되는 영토의 좀더 낮은 곳으로 스며드는 것이고
그곳에 있는 가난하고 눈물 많고 상처 깊은 이들의 손을 힘껏 움켜지는 것이다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몸으로 춤을 추게 하고
기타를 만들줄 만 알았던 손으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게 하고
자동차를 만들던 기름 때 묻은 손으로 시를 쓰게 하는 일이다
이 춤과 노래와 시의 요구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가 일어나는 대지이다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죽어도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박일수 열사 죽음의 자리는 이제 춤과 노래와 시가 어우러져
자본주의와 화해할 수 없는 혁명의 뿌리가 자라는 대지이다

박일수 열사 8주기를 맞아 다시 자주색 투쟁조끼를 입는다
투쟁 조끼를 입은 내 모습은 더 이상 눈물 쪽에 가깝지 않다
눈물처럼 무겁고 너무 진지해 표정을 굳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난 화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더욱 단호한 태도를 취할 것이지만
조금은 더 즐겁게 웃으면서 투쟁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수탈과 폭력 앞에서 춤과 노래와 시와 함께 웃고 율동한다는 것
이것은 충분히 혁명의 내부라고 이야기해도 좋다

(2012년 2월 14일)


[출처: 울산노동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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