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의 전장, 도시에서 저항의 스펙터클을 구축하라!

[새책] 유체도시를 구축하라! (이와사부로 코소 저, 서울리다리티 역, 갈무리)

지방출신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모르긴 해도 지방에서 볼 수 없는 거대함이나 화려함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사실 지방에서 삼십년 이상을 살아온 내게 서울의 이미지가 그랬다.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하려면 차선을 4개나 가로질러 바꿔야 하는 겁나는 8차선 도로들하며, 지나가다 보이는 아파트 숲들, 63빌딩 같은 높은 건물들. 지방에 살았지만 주기적으로 서울의 병원을 오가야 했기에 제법 자주 서울을 방문하곤 했는데, 그렇게 빈번히 서울을 오가면서도 내게 있어 서울은 삶의 공간이기 보다 막연한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이미지였다.

그러다가 서울로 이사를 온 것이 2년 전의 일이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받은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으로 전세를 얻어야 했기 때문에, 형편에 맞는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고 돌아다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전세를 구하러 누비고 다니면서 만난 서울은 놀라우리만치 낯선 공간이었다. 지방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구불구불하고 가파른 계단들로 이어진 골목들. 70년대 영화에서나 보곤 했던 향수를 뿜어내던 이발소나 세탁소, 수선집 같은 낡고 자그마한 상점들. 지금으로선 너무나 당연한 서울의 다른 모습인데, 당시 30년 동안 알고 지내던 서울의 이미지가 깨지던 충격은 상당했던 것 같다. 낯설었던

서울의 이미지를 익숙한 생활공간으로 만들어 가면서 살아가다보니 벌써 2년의 시간이 흘렀다. 서울의 세입자에게 이사 2년차는 집값을 올려줘야 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그 동안 백수로 지내온 내게 돈이 생겼을 턱이 없다. 결국 공부하는 연구실을 다니기 위해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하는 곳에 집을 알아보고 계약을 했다. 2년이 더 지난 뒤에는 서울 밖으로 밀려날지도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연구실 동료들에게 농담 삼아 했는데, 어쩌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소 이와사부로의 책을 읽게 되었다. “유체도시를 구축하라!”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코소가 들려주는 뉴욕의 이야기들은, 서울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경험들과 맞물려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내게 있어 서울과 뉴욕은 모두 이미지의 도시였던 것 같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빈번히 돌아다니면서도 단지 쉽게 ‘보여 지는’ 것들로만 조합해내는 이미지의 도시였다면,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뉴욕이라는 도시는 그야말로 영화나 매체를 통해서만 만들어진 이미지의 공간 그 자체였다.

그런 두 도시가 올 겨울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되어 다가왔는데, 그 두 느낌은 사뭇 달랐다. 내 삶을 통해 서울의 이미지가 깨어지는 경험이 왠지 모를 서글픔을 가져다주었다면, 코소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통해 뉴욕의 이미지가 깨지는 경험은 기쁨의 정서가 더 강했다. 이런 정서의 차이는 내게 질문거리를 던져주었다. ‘이 두 도시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라는. 그 답을 생각하면서 씨름하다가 이내 질문 자체를 바꾸게 되었다. ‘도시를 바라보는 선생과 나의 시각이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라는 질문으로.

코소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형성을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보고자 한다. 사실 그 ‘유토피아적 기획’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거슬리기도 했다. 왠지 모르게 그 문구는 서민들이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치열한 삶의 공간을 ‘부끄럽게’ 여기면서 ‘디자인 서울’을 외치는 서울의 시정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론 필자가 강조하는 유토피아적 기획은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다.

이런 오해를 예견하기라도 하는 듯 코소는 데이비드 하비의 구분을 인용하면서, 사회적 변화의 역동성을 배제한 채 공간조작=스펙터클로 향하는 경향을 ‘공간형식의 유토피아’라고 지칭하고,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영역에서 그것을 변혁하려는 정열=몽상을 ‘사회적 과정의 유토피아’라고 지칭하면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코소에게 중요한 것은 공간형식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사회적 과정의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물론 뉴욕의 역사에서 뉴욕시가 주도하는 개발로서의 건축공간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코소는 ‘권력은 공간을 점령하지만 공간은 권력 아래에서 요동치고 있다’는 르페브르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해 형성되는 스펙터클로서의 공간조작에 있어서조차 그 공간을 실질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은 민중의 집합적 신체로 이루어진 ‘거리를 형성하는 운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도시를 건축과 그들의 물리적 배치나 고정된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거리의 형성’으로 파악하는 코소에게, 예술과 도시의 교차점은 예술 또한 행위의 결과로 나타내는 고정된 물체=작품이 아니라 행위의 과정이라는데 있다. 코소에게는 예술이든 도시든 ‘상품화된 스펙터클’이 아닌 생생한 사건이라는 점이 중요한데, 사실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강력한 ‘시각중심적인 메시지’ 즉 ‘스펙터클’의 매혹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과도하게 중심화 되어온 형식에 저항하고 다른 감성의 영역을 개발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코소는 ‘우리의 감수성은 전장’이라고 표현하면서 ‘저항의 스펙터클’ ‘반권력적인 스펙터클’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깨어졌을 때 나 자신이 경험했던 슬픔의 정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스펙터클한 서울의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에 매혹되었던 나의 감수성이었을 것이다. 골목의 시장 통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살아야 하는 삶은, 자동차로 편하게 쇼핑을 즐길 수 있는 편리함을 그 비교 축으로 가지고 있던 나에게 백전백패의 슬픔의 정서를 남겼다. 사실 어떤 불편함을 불편함 그자체로 긍정하는 것은 오히려 니체가 말하는 ‘정신 승리법’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코소가 ‘감성의 전장’을, 그리고 그 감성의 전장에서의 ‘저항의 스펙터클’과 ‘반권력적인 스펙터클’을 이야기하면서 예술을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소는 북친과 굴리의 글을 인용하면서 노동자의 계급투쟁은 권력에 대한 저항운동일 뿐만 아니라 혁명적 삶을 개발하는 시도라고 말한다. 그것은 공식적인 정치제도 안에서 변혁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의 현재의 삶에서 이상사회를 개발해 내는 ‘예시적 정치’의 실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코소가 예술의 영역에서 ‘흰벽’이라는 스펙터클에 갇힌 채 그 형식을 통해서만 생산될 수 있는 기성 예술계보다, 추후에 자본에 포획되기도 할지언정 자유로운 형식들을 창조해내는 그래피티나 라이팅 같은 힙합문화를 긍정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라면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책을 읽는 내내 나를 달뜨게 했던 코소의 무한한 긍정과 기쁨의 정서는 뉴욕의 도시공간에서 실제로 ‘생산되고 개발되는 이상사회’에 대한 긍정이었다.

서울의 이미지가 깨어질 때 내가 느낀 슬픔의 정서의 원천은 기대했던 편리함을 떠나 불편함을 참고 인내하며 긍정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2년 동안의 삶, 좁은 골목과 시장 통을 통과해야만 다다르는 작은 전셋집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이 과연 내게 그런 인내심만을 요구했는지를 돌아보면 물론 아니다. 거기에는 불편함과 그 불편함을 통과하는 삶이 만들어 낸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들이 분명 있었다.

앞집의 폐지 줍는 할아버지를 위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내놓는 폐지 한 박스. 밤사이 내린 눈이 소복이 쌓인 다음 날, 늦잠자고 일어나 대문을 나설 때 앞집에서 우리 집에 이르기까지 가지런히 쓸려있는 빗자루 자국. 할아버지와 나는 그 흔한 인사한번 다정스레 나눈 적이 없지만, 우리들에겐 작은 관계가 만들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버스에서 내려 걸어 들어오는 한참동안의 거리가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폐지를 줍는다는 사실도, 그 할아버지가 내 앞집에 산다는 사실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으리라. 뒤돌아보더라도 그 불편함을 긍정할 수는 없지만, 불편함을 통과하면서 배운 새로운 감수성만큼은 분명 긍정할 수도 있다.

글을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끊임없이 유동해야만 하는 불안정한 조건을 가진 이들에게, 그 유동의 조건을 긍정하라는 말이 혹시 잔인한 명령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버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게 그 명령이 잔인한건 아닌가 싶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할 앞으로의 여정은 지금보다 더 불편할 것이다. 게다가 그 불편한 집이라도 구하기 위해 몽땅 털어 넣어버린 전세금 때문에, 삶을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공부 이외의 아르바이트도 필요하게 될 것이다. 슬픔의 정서는 이런 현실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코소 이와사부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하다. “그런 현실은 슬플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그런 현실이 슬프기만 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네가 쓰는 한편의 픽션일지도 몰라. 너를 그렇게 끊임없이 유동하게 하는 너의 존재론적인 현실은 너에게 지금과는 또 다른 삶의 미적감성을 생성하게 하는 조건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어!”라고.

이런 코소의 충고가 어떤 맥락으로 전개되는지 조금이라도 궁금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 “유체도시를 구축하라!”의 필독을 권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뉴욕이라는 도시를 마천루와 그리드로 이루어진 세련된 팝아트의 도시라고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한번쯤은 이 책을 꼭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을 읽은 후에 뉴욕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새로운 질문 하나쯤은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유체도시를 구축하라!”를 읽은 우리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만들어 낼 질문들, 그 질문들이 만들어 내게 될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 그 네트워크가 만들어 내게 될 새로운 감수성의 장과 사건들을 기대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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