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

[낡은책]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스칼라피노.이정식, 한홍구 역, 돌베개, 1986.9)

해방 전후사 연구자들의 바이블

이 책은 1972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출판부에서 나왔다. 저자 로버트 스칼라피노는 1919년에 태어나 1948년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수로 동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소장이었다. 이정식은 1931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61년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당시 펜실베니아 대학의 정치학 교수였다. 한홍구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나와 86년 동대학원 석사과정 때 이 책을 번역했다.

전체 3권으로 된 이 책은 한국전쟁과 해방정국을 논한 여러 학자들의 글에 자주 인용되는 남북관계 연구서의 바이블이다. 1권은 일제시대를 다뤘고, 여기 소개하는 2권은 1945년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3년까지를 다룬다. 3부는 전쟁 이후 50~60년대를 다룬다.

이 책의 저자 스칼라피노 교수는 지난해 11월 92살의 나이로 죽었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남북한과 중국, 일본 연구에 천착했다. ‘한국공산주의운동사’와 ‘김일성’ 등 한반도 관련 저서를 발표하고 북한에도 6번이나 방문하는 등 남북관계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한승주 전 외무장관과 이 책의 공동저자인 이정식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 등 많은 한국인 제자들을 배출했다.

번역가 한홍구는 요즘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같은 곳에 칼럼도 쓰는 잘 알려진 학자다. 서울 마포에서 민정당으로 국회의원 3선하고 김영삼 정권 때 노동부장관을 지낸 남재희 씨의 사위다.

남북 공산당 내부의 건달들

저자는 해방 직후의 한국 지도자들은 대부분 기독교와 인연을 갖고,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언론계 경력을 갖고 있다고 공통점을 소개했다. 이렇게 한국은 좌우 모두가 먹물들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정치적 경쟁의 개시를 알리는 출발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표현은 매우 정확했다.

조선공산당은 이상주의 학생, 이론을 갖고 노는 부유한 인텔리, 당을 출세의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일정 때의 건달, 불법을 가장하려는 깡패, 소수의 노동자 농민의 기묘한 혼합체였다. 조선공산당 당원명부는 종잇조각일 뿐이고 수동적인 무수한 당원 속을 헤치고 다니는 열성분자는 소수였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초 일본식 요정에서 첫 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는지? 1945년 말 북한 사회가 소련(갑산)파, 국내파, 연안파 간의 치열한 삼각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 안에는 상당수 친일분자와 반동분자도 수없이 존재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군정기의 한국 공산주의

1945년 8월 14일 23시 식민당국의 군관 최고책임자들은 천황의 항복 메시지를 전해 들었다. 정무총감 엔도 류우사쿠는 즉시 서울의 저명한 한국 민족주의자 3명을 초빙해 치안유지의 책임을 떠맡기려 했다. 총독부가 택한 사람은 여운형 안재홍 송진우였다.

확고한 좌익편인 여운형은 남경의 진룽대를 나와 1919년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명성을 얻었다. 30년 상해서 일경에 체포돼 3년 옥살이 했다. 출옥 뒤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냈다. 강경한 민족주의자인 여운형은 한국과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과 오래 유대해왔다. 45년 이후 여운형은 조선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공산당 수뇌부는 결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민족진영은 그에게 깊은 의혹을 품었다.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방법을 통한 철저한 변혁과 한국의 완전독립의 책임을 철두철미하게 떠맡고 나선 한 인물의 불가피한 운명이었다. 좌우익은 여운형이 본질적으로 기회주의자고 근본적 정치적 가치기준까지도 바꾸는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안재홍의 경력은 덜 급진적이었다. 와세다를 나와 한국 YMCA에서 일했고 조선일보와 시대일보 사장을 지냈다. 3.1운동으로 3년간 복역했고 신간회 주요간부였다. 3명 가운데 가장 온건한 송진우는 메이지 대학을 나와 중앙학교장 때 안재홍과 친했다. 동아일보 사장을 오래했다. 송진우 역시 3.1운동으로 징역을 살았다.

45년 8월 14일 밤 만남에서 송진우만 엔도 정무총감의 제안을 거절했다.(김을한, ‘여기 참사람이 있다’, 서울, 1960, 99쪽) 그래서 안재홍과 손잡은 여운형이 해방 정국을 주도했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 대부분은 놀랄 만큼 흡사했다. 모두들 기독교와 연계돼 있고, 일본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교육.언론 경력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인민공화국의 출현

여운형과 안재홍은 총독부와 몇 시간 뒤 8월15일 건준을 발족하고 국군의 모태인 무위대 창설을 밝혔다. 건준의 세력은 급속 성장했다. 온건주의자 송진우는 9월7일에서야 한민당 결성을 발표했다.

평양 건준은 초기에 조만식 등 온건파가, 서울 건준은 초기부터 좌익이 잡은 건 흥미롭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건준 내 좌익경향을 우려해 9월1일 사임했다. 안재홍 자리는 허헌이 대체했다. 건준 내 공산주의자들은 9월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주요간부와 내각 부서책임자를 뽑아 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이 ‘인민공화국(이하 인공)’이다. 9월6일은 미 점령군이 남한에 도착하기 2일 전이었다.(오영진, ‘하나의 증언’, 1952, 출판사 불명, 60쪽) 인공은 우익인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익희 김성수 안재홍 조만식 등을 중앙에 잘 안배해 구색을 갖추었다.(박일원, ‘남노당총비판, 서울, 1948, 34쪽)

소련과 제휴한 정치운동은 한국에서 당연히 성공할 것 같았다. 일본은 망했고, 미국은 멀리 있고, 중국은 내전 중이고, 소련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한국인 대다수는 소련이 북한뿐 아니라 남한도 정렴하리라고 추측했다. 8월16일 소련군 선발대가 13시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소문이 서울 시내에 쫙 퍼졌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손에 태극기와 적기를 들고 소련군을 환영코자 역전에 모였다.

남한에서 공산당의 출현

몇몇 박헌영의 옛 동지들은 45년 8월19일 성명을 발표해 공산당을 만들었다. 다음 날 당 중앙의 요직에 취임하라는 장안파의 요청을 거절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미 존재하는 당의 해체를 요구했다. 박헌영의 요청으로 이전의 동료였던 조동호, 홍남표, 정재달, 최원택 등은 장안파 조선공산당(이하 조공)에서 탈당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정치적 경쟁의 개시를 알리는 출발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장안파 기관지 <전선>은 박헌영의 재건파는 참가의 조건으로 당 중앙 구성과 당원 심사권 일체를 요구했다고 했다. 9월8일 서울 계동에서 60명이 모여 투표를 통해 박헌영의 재건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재건파는 장안파보다 약 3배쯤 많았다.

미국의 초기정책과 한국의 ‘좌익’

미 점령군은 9월9일 한국에 도착했다. 전날 하지 중장은 인천 앞바다 함상에서 건준 대표단 백상규 조한용 여운홍(여운형 동생)의 방문을 받았다. 하지는 9월 12일 경성부민관에 모인 1200명에게 한 개의 당이나 단체를 승인할 의사가 조금도 없다고 명백히 밝혔다.

여운형의 동의하에 인공의 마스터플랜을 작성한 사람은 바로 박헌영이었다. 여운형은 인공 창설에 동의한 걸 나중에 후회했다.(이정식, ‘이동화 인터뷰’, 1967.3.29, 서울)

공산당의 강령

9월 11일 반(反)헌영파는 조공의 결성을 공개 발표했다. 박헌영파 기관지 <해방일보>는 첫 호에 4대 강령을 실었다. 1) 조선공산당은 조선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병사, 인텔리겐챠 등 일반 근로인민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옹호해 그들의 생활의 급진적 개선을 위해 투쟁한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통해 조선노동계급의 완전 해방으로써 착취와 압박이 벗고 계급이 없는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을 최후의 목적으로 하는 인류사적 임무를 주장한다.

소련의 견해를 담은 평양의 45년 9월15일 성명은 과거 조공의 정책적 입장을 신랄히 비판했다. 평양의 당은 “과거 당은 미국과 영국의 역사적 진보성을 ‘모호’하게 취급했다”고 비난했다. 45년 평양에 주둔한 당시 소련은 한국 장래 교섭을 방해할까 우려해 연합국, 특히 미국의 귀에 거슬리는 공격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조공은 그들을 민주주의 진영의 일부라기보다는 제국주의 진영의 일부로 생각했다.

여기 ‘인텔리겐챠’는 왜 들어갔을까. 당시 이 말 뜻을 알아듣는 사람이 한국에서 몇이나 됐을까. 이 사람들은 1936년에 나온 고리끼의 마지막 장편 ‘끌린 쌈김의 생애’도 안 읽어봤는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또 얼마나 알아들었을까. 내내 혼돈스럽다.

파벌 투쟁

45년 10월 초순 장안파는 재건파의 ‘오류’를 공격했다. 장안파의 주장은 반공주의자의 그것과 흡사했다.

김일성은 45년 10월 14일에야 평양에 공식 등장했다. 당시 박헌영은 소련과 김일성의 인정을 한 몸에 받았다. 장안파는 평양노선에 직면해 자발적으로 급속히 우익 쪽으로 기울어졌다. 10월 24일, 장안파의 대표 5인은 두 보수정당인 송진우의 한민당, 안재홍의 국민당 대표와 함께 임정 지지를 서약하고 임시정부의 조속한 환국을 추구한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장안파 대표 등 3당 대표는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과 약 2시간 환담했다.

평양과 서울 양측에서 엄청난 압력을 받자 장안파는 11월23일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장안파는 11월24일 공개적으로 해체를 발표했다.

당과 외곽단체의 강화

미군정 당국은 도착 직후인 9월초 조공이 약 3천 명의 당원이 있다고 추정했다. 46년 1월엔 2-3만명으로 늘었다. 조공은 46년 늦봄에 당원이 2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미군정은 4-6만 명으로 봤다.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이하 전평)는 9월26일 발족하고 11월5일 50만 노조원을 대표해 505명의 대의원이 서울에 모여 결성대회를 열었다. 애국가와 적기가 제창에 이어 허성택 위원장이 개회를 선언했다. 박헌영, 김일성, 루이 세랑(새로 조직된 세계노동조합연맹 WFTU의 총서기), 모택동 등 4명을 명예의장으로 뽑았다. 박헌영 이주상(인공 노동부장), 서울시 인민위원회 대표 김광수, 공산청년동맹 대표 권오직 등의 메시지를 낭독했다. 11월30일엔 전평 북조선총국을 설치했다.

전농은 45년 12월8일 서울서 결성대회를 열었다. 조선인 지주의 토지에 한해 소작료 3.7제를 발표했다. 전평처럼 전농도 출발부터 공산당 통제 하에 있었다.

훗날 전향한 공산당의 여성 조직요원인 소정자는 진주 농민조합지부 결성과정을 들려준다.(소정자, ‘내가 반역자냐’, 서울, 1966, 30-31쪽) 소정자는 한국 인민의 노력을 방해하는 미군정 공격에 연설의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다. 농촌은 광범위한 정치적 발전과정에서 아무런 발언권도 갖지 못했다.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자격이 의심스러운 한국인들이, 마찬가지로 자격이 의심스러운 미국인 군정 관리의 대리로 활동했다. 다수의 농민조합 지부를 농민이 아니라 젊은 학생이나 소위 지식인들이 지배한다는 사실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

최초의 학생조직은 45년 8월18일 결성한 조선학도대다. 서울대 학생들이 중심으로 만들었는데 주요인물 최상호는 조공 조직원이었다. 45년 12월11일 조선청년단체총동맹(이하 청총)을 결성했다. 청총은 좌익의 조종을 받았으나 온건파까지 망라한 광범한 전선조직을 갈망했다. 청총 결성 한 달도 안 돼 신탁통치 문제가 터져 청년운동은 심하게 분열했다. 공산주의자들은 큰 타격을 받았다. 남한 학생들은 공산주의자들보다 여운형, 김규식, 김구, 이승만 등을 더 많이 지지했다.

해방 직후 접한 마르크스주의 서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소정자는 조공 진주시당 첫 여성당원 3명 중 하나였다. 당은 이상주의 학생, 이론을 갖고 노는 부유한 인텔리, 당을 출세의 새로운 기회로 여기는 일정 때의 건달, 불법을 가장하려는 깡패, 소수의 노동자 농민의 기묘한 혼합체였다. 조공 당원명부는 종잇조각일 뿐이고 수동적인 무수한 당원 속을 헤치고 다니는 열성분자는 소수였다. 그녀의 남편은 뒤에 체포돼 남한 당국에 처형됐고 그녀는 북으로 가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그 뒤 간첩으로 남파돼 귀국했다. 두 번째 남파 때 체포된 소정자는 그 뒤 반공전선의 선두에 섰으나 1967년 요절했다.

45년 11월 12일 인공창설 대부인 여운형이 갑자기 사임하면서 조선인민당 결성을 발표하자 조공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박헌영은 당시 극한대립을 피하려고 필사적이었다. 박헌영은 45년 11월 초 몇 번 회견을 열어 “한국인이 미군정에 완전 협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45년 11월 15일 박헌영은 하지, 아놀드와 회견했다. 인공이 ‘국(나라)’이란 말을 빼고 ‘당’으로 바꾸든지 아니면 해체 명령을 받아들이든지 선택해야 했다. 박헌영 자신은 조정을 원했지만 급진 청년들은 대회에서 호칭의 변경을 막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인공은 “미군정은 인공과 협력을 거부”했다고 명기했다. 미군정 당국은 45년 11월25일 인공을 불법화했다.

경쟁적 합작 공세

공산당은 새로운 민족통일전선 수립에 총력을 경주했다. 이승만이 10월16일 귀국했을 때 공산당은 그와 제휴하려 노력했다.

10월말 미 국무성 극동국장인 빈센트가 한국에 신탁통치제가 실시될지도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남한 정국은 들끓었고, 공산당 지도자들도 흥분했다. 김삼룡은 “조선의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것이며, 인민의 의지를 무시하는 충격적인 사실”이라는 장문의 성명을 발표했다.(김삼룡의 성명은 ‘매일신보’ 1945.10.25자) 이렇게 공산당은 탁치에 격분했다. 조공의 저명한 지도자 정태식은 “신탁통치는 절대 반대한다. 5년은커녕 5달도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헌영도 46년 1월1일 하지와 개인 면담에서 신탁통지를 완전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46년 1월 1~3일 사이 공산당 지도부는 입장을 근본적으로 바꾸도록 설득당했다. 조공 정치국원인 강진이 서울 주재 소련 부영사 샤프신과 장시간 회담했다. 박헌영도 비밀리에 급히 평양에 갔다가 1월 2일 돌아왔다.

저자는 박일원의 책 ‘남노당 총비판’(서울, 1948)을 보고 이렇게 말했지만 박헌영이 1946년 1월 1일 서울에서 하지 중장을 만난 뒤 평양에 갔다가 1월 2일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는 서술은 당시의 조건을 놓고 볼 때 무리다.

신탁통치 사건을 분수령으로 남한의 공산당은 축적한 대중적 지지수준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다. 하지 장군은 한민당 송진우를 설득해 신탁통치에 양해와 잠정적 지지를 얻었다. 송진우는 이 견해를 김구에게 설명했으나 김구는 완전히 거부했다. 송진우는 김구를 방문한 바로 그 날 암살됐다.(김을한, ‘여기 참사람이 있다’, 서울, 1960, 100쪽) 신탁통치 문제는 우익에겐 엄청난 이익을 가져주었고 좌익에겐 심각한 손실을 안겼다.

여운형이 비밀리에 남북의 공산당과 계속 접촉했다. 여운형은 미군정 당국과 사적 대화를 계속 중이었다. 여운형은 박헌영의 강한 반(反)합작 입장에 놀랐다. 결국 여운형은 46년 7월 29일 공판예정인 조선정판사에 박헌영의 관련설을 하지와 미군정에 흘렸다. 여운형이 서둘러 북한을 다녀온 내막은 남한 좌익의 주도권 때문이었다.

남한의 공산당은 급진적 행동노선을 실천에 옮겼다. 철도, 인쇄, 대구, 전기 등이 46년 9월 말부터 10월 사이 파업에 들어갔다. 여운형은 극좌파에게 더 이상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평양서 돌아온 여운형은 46년 10월 4일 ‘좌우 합작 7원칙’을 내놓았다. 이는 좌우합작위원회로 지식인을 결집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남한 공산당 내부의 투쟁

박헌영은 45년 말 여러 도전을 극복했고 소련의 완전한 지지에 힘입어 권위를 행사했다. 그러나 46년 봄부터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다. 소련은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남한의 공산당에 자금을 보내고 있었다. 5월 초 미소공위 결렬의 결과 미군정과 남한 공산당 관계는 급속히 악화했다. 조봉암을 그의 불만을 토로한 장문의 편지를 박헌영에게 보냈다. 조봉암은 박헌영을 훨씬 개인적인 면에서 공격했다. 남쪽의 공산당 내부가 시끄러웠던 46년 6월 박헌영은 북한에서 5주간 머물렀다.

박헌영은 조공 내부의 반대파를 공격했다. 46년 8월7일 박헌영은 이정윤의 제명과 김철수, 서중석, 강진, 김근, 문갑송의 무기정권을 발표했다. 박헌영은 모든 좌익정당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좌익통합계획을 끈기 있게 추진했다. 전평은 큰 손해를 입으면서도 격렬한 파업을 계속 감행했다. 그 결과 전평은 46년 이후 일반노동자에게 급격히 지지를 잃었다.

공산당과 미군정 간의 격증하는 충돌

46년 5월6일 미군 수사대는 서울 중심가의 근택빌딩을 수색했다. 조공 본부와 공산계 신문을 발행하는 조선정판사가 그 빌딩에 있었다. 1200만 원에 달하는 위폐와 위조지폐설비 일체를 발견했다.

46년 7월 박헌영은 소련의 고무를 받아 미국의 정책과 미군정에 공격의 초점을 맞춘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고 이런 전투성이 가을의 9월 총파업을 낳았다. 공산당은 파업으로 방대한 공산세력의 영향력을 여실히 과시했다. 공산당의 좌경화는 미군정의 강경대응을 불렀다.

46년 말 미군정과 남한 공산당 관계가 더 적대적으로 변했다. 46년 초 조공은 대중정당의 위치에 도달했으나 그해 말 남로당은 이미 전위당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47년 7월15일 미소공위는 완전 결렬됐다. 남한 경찰당국은 저명한 좌익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다. 48년 2월 다시 한 번 민전과 전평 등의 총파업이 예고됐다.

공산폭동과 군부반란

48년 초 남로당이 점차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유격전 형태로 전환했다. 제주에선 48년 4월3일 새벽 2시 문상길 중위가 지휘하는 전투부대가 미군정에 반란을 선포하고 군사행동에 들어갔다. 그 반란의 최고지도자는 제주의 당 총비서인 김달삼으로 그는 연안파였다.

여수순천의 군 반란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48년 12월30일 대구 주둔 6연대에서도 공산분자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재빨리 진압됐다. 몇 달 뒤 38선 가까운 홍천과 춘천의 6사단 8연대의 2개 대대가 집단탈영해 월북했다. 공산당이 남한의 군대 내 침투하는 데 현저히 성공했다.

이승만 정부는 김창룡의 주도하에 군부 내 좌익 숙청하는 숙군작업을 진행했다. 48~49년 5천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총살, 유기형, 파면 등으로 제거됐다. 김창룡은 소련 국경지대에 주둔하던 일본관동군의 하급정보원으로 일했다. 김창룡은 무자비해서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김창룡 자신도 56년 1월 한 육군대령의 지령에 따라 살해당했다.

박성환의 ‘파도는 내일도 친다’는 3공 때 나온 책이다. 박성환은 이 책에서 47년 육사를 졸업한 육사 3기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특히 많아 약 80%에 달했다고 했다. 48년 여순반란을 주도한 두 중위도 바로 3기생이다. 남한 주민들이 조선공산당을 전적으로 지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미국은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억제하는 게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후견’하의 북한 공산주의

북한은 1920년의 외몽고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혁명의 성공을 위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여건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소련의 등장이 결정적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 정치적 주도역할은 해 낸 사람은 조만식이었다. 그는 한국의 간디로 불렸다. 일본 메이지대 출신의 기독교장로인 조만식은 온건한 정치신념을 지닌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평남 건준의 위원장에는 조만식이, 부위원장에는 역시 기독교 장로였던 오윤선이 추대됐다. 20명이 넘는 북한의 초기 건준 위원 가운데 공산주의자는 한재덕과 이주연 2명뿐이었다. 둘은 경험이 풍부한 운동가였다. 이후 한재덕은 간첩으로 일본에 파견돼, 거기서 전향해 많은 자료들을 우리 연구자들에게 제공해 줬다.(한재덕, ‘김일성을 고발한다’, 서울, 1965) 그러나 한재덕이 1970년에 죽은 건 북한문제에 관심 있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큰 손실이다.

소련군은 곧 진주한다는 소문과 달리 한 차례 강간과 약탈소동을 벌여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45년 8월24일에야 평양에 도착했다. 공산주의자까지도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의 만행을 진술한다. 주로 아시아계 소련군인들이 심했다. 남한에서 미군의 행동이나 한국전쟁기 중공군의 행동과 크게 대비된다. 이런 소련군의 행동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이해’하라고 호소하는 저작으론 최범소의 <북선의 정치상세(狀勢)>(서울, 1945)가 있다.

주둔 다음날 소련군은 일본군과 경찰에 즉각 무장해제와 평남 건준으로 행정권 이양을 단행했다. 조만식의 개인 비서였던 오영진은 “북한 주둔 소련군 최고사령관 이반 치스챠코프 대장은 8월29일 평양에서 조만식 등 건준간부들과 첫 대면에서 모든 행정에 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오영진, ‘하나의 증언’, 부산, 1952)

소련인들은 적어도 초기엔 소련계 한국인들을 주된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그들은 ‘갑산파’다. 그들이 전공(戰功)을 세운 지명을 따서 그렇게 불렀다. 서울의 미군정과 달리 소련군은 엄한 보안 속에 대단히 신중하게 움직였다. 한국인의 행정부서에 그들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소련파와 갑산파의 핵심으로 구성한 43인조는 수시로 로마넨코 사령부에 모였다.

지역활동은 함남, 특히 함흥과 흥남에서 가장 활발했다. 흥남은 해방 이전 북한에서 지속적으로 공산주의운동기 가능했던 몇 안되는 도시다. 해방 직후 수 주일간 박헌영과 서울의 당 중앙은 박헌영의 영도아래 전국의 공산주의운동을 통합하는 일에 중대한 진전을 이루었다. 평양만을 제외한 함흥 원산 청진 신의주 해주 등에선 박헌영 지시를 받던 토착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평양의 초기 당을 주도했던 사람은 현준혁이었다. 현준혁은 박헌영 맹신파가 아니라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이었다. 북한에선 초기 현준혁과 오기섭이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현준혁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련파와 갑산파는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의 ‘역사적 진보성’을 모호하게 취급했다고 현준혁을 통박했다. 현준혁 비판결정서가 채택된 지 2주일이 안 된 45년 9월28일 대낮에 현준혁은 조만식과 함께 트럭을 타고 가다 평양시청 앞에서 암살됐다. 트럭 앞좌석에 운전수와 조만식 사이에 앉아 있던 현준혁은 갑자기 트럭에 올라탄 괴한이 발사한 권총 1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사건은 북한의 정치상황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현준혁은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에게도 상당한 인기였다. 소련인들이 중립을 지켰더라면 현준혁은 김일성과 같은 무명의 청년 게릴라 지도자를 압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현준혁의 고향인 개천의 치안유지위원회 책임자로 현준혁을 잘 알던 반공주의자 문봉제는 현준혁이 권력다툼에서 동료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됐고 장시우, 김용범 등이 관련돼 있다고 증언했다.(이정식, 문봉제 인터뷰, 1966.8.1, 서울) 문봉제는 유명한 반공단체인 서북청년회의 지도자였다. 현준혁 암살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훗날 김일성은 현준혁을 가리켜 ‘공산당의 탈을 쓴 민족주의 전락분자’라고 매도했다.

김일성의 등장

김일성이 평양에 첫 모습을 드러낸 건 10월 초순 일본식 요정에서 로마넨코가 참석한 간담회 때다. 한재덕은 자신의 책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최초의 선전문인 <김일성 장군 개선기> 등을 자신이 썼고, 김일성에게 ‘장군’이란 칭호를 처음 붙인 것도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왜 소련인들은 김일성에게 공산당의 지휘권을 맡기려 했는가. 박헌영이나 김두봉 같은 노련한 운동가들이라면 적어도 김일성보다는 훨씬 더 큰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는데. 소련은 조선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경험적으로 불신했다. 소련은 그간 조공의 파벌투쟁에 엄청 넌더리를 냈다. 김일성은 해묵은 파벌투쟁에 끼어들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조만식의 비서 오영진은 47년 남한으로 탈출하기 전 김일성과 교류했다. 소련은 2차 대전 끝 무렵 김일성을 4년간 소련에 데려다가 감독하고 훈련시켰다. 소련인들은 매우 중대한 시기에 남한에서의 박헌영의 권위를 인정했다. 김일성은 박헌영이 지도하는 국내파와 김두봉, 무정, 최창익, 김창만, 윤공흠 등 연안파 양측으로 도전을 받았다.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중국서 활약해온 조선의용군이 해방 이후 소련에 간청해 겨우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 그러나 밴코프스키 중장은 이들을 신의주에 묶어두고 도착 당일 무장해제시키라고 지시했다. 무정, 김두봉, 최창익, 한빈 등 연안파는 당시 한국에서 막강한 힘을 낼 잠재력을 지녔다. 당시 한국엔 어떤 공산주의자 중에도 이들만큼 오래 고도의 조직활동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없었다.

45년 말이 되자 소련-갑산파, 국내파, 연안파 간의 치열한 삼각투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상당수 친일분자와 기타 적대분자가 당내에 잔존했다. 김일성은 북한 공산당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에서 45년 12월 17-18일 확대위를 중대한 전기로 본다.

조만식은 46년 초 평남 인민정치위 확대회의에서 공개로 소련군 사령부를 공격한 직후 바로 연금됐다. 김일성은 조만식 일파가 이제 반동으로 전락했다고 공박했다. 조만식은 이후 행방불명됐다.

새로운 공산국가의 구조와 정책

김일성은 ‘토지개혁 법령’을 밀어붙였다. 몰수된 토지엔 아무런 보상도 주어지지 않았고 몰수된 토지들은 영구적 소유지로 분배됐다. 도지개혁법은 낡은 사회질서를 속속들이 타파하고 수많은 인민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줌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확실히 거둘 최고의 방법이었다. 노동법도 공포했는데 동일노동 동일임금제, 8시간 노동제, 소년노동에 관한 일반규정, 노조 관련조항이었다.

당시 ‘민주적 정당’이란 이미 공산당의 수중에 장악돼 있었다. 단체들도 공산당의 강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46년 봄 또 하나의 정당이 북한에 출현했다. 2월 16일 연안파가 조선신민당을 창당했다. 신민당이 창당하자 소위 인텔리겐챠들의 상당수와 중산층이 참여했다. 연안파의 성공은 얼마간 김일성의 관용에 힘입었다. 소련-갑산파는 이 무렵 박헌영과 국내파에 더 신경을 쏟아, 연안파와 대결을 원치 않았다. 김일성은 무정의 군사적 배경 때문에 그를 ‘가장 위험한 강적’으로 생각했다.

남조선 신민당 위원장 백남운은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을 취했다고 해 남한의 공산당에게 호되게 비난받았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소련- 갑산파를 일반적으로 무식한 게릴라 전투원 출신으로 소련에 크게 의존한 나머지 한국 민족주의는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북조선노동당의 창립

46년 8월 말경, 신민당은 북조선 노동당의 창당을 위해 공산당과 합당했다. 미국과 소련의 견해차가 심해지자 한반도의 통일 전망이 점차 어두워졌다. 이미 북한지역에서 공산당의 주요 정책들은 거의 윤곽을 잡았다. 공산주의운동에서 북한이 남한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게 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46년 5월8일 미소공위가 결렬됐다. 미국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만들기로 했다. 46년 가을에 선거해 46년 12월 입법의원을 개막했다. 북한에선 46년 9월 초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북로당을 창립했다. 북조선 인민위원회 대표를 뽑기 위한 선거를 46년 11월 3일 실시했다.

대의기구를 갖추는 데 미국은 입법의원의 출범과 같이 위로부터 시작한 데 반해, 소련은 지방 인민위원회의 체제를 갖추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북한의 선거가 한국사회의 실제 사회경제적 구성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원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상당히 많은 자리를 내줄 여유도 있었다. 미국이 남한에 이식한 서구식 의회 모델은 교육받은 엘리트들의 정치일선 참여를 가져왔다. 얼마 안 가 미군정은 그 자신이 정통성과 권한을 부여해 주었던 입법의원에 맞서 사활을 걸고 싸워야 했다.

서울의 입법의원이 첫 회의를 소집한 건 북한의 인민회의가 최초로 회합을 갖기 약 두 달 전인 46년 12월이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매 단계마다 남한의 제도에 상응하는 자신들의 정치기구를 만들어 나갔다. 공산주의자들은 전국적인 총선거라는 허구적인 주장을 밀고 나가 북한지역에서 212명, 남한에서 360명 등 모두 572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뽑았다. 남한을 대표해 뽑혔다는 대표들은 8월 22~24일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사람들이다.

“국내파”에 대한 탄압

소련-갑산파는 국내파 인사들을 ‘종파쟁이’로 내몰며 탄압했다. 김일성이 노린 건 국내파의 영관급을 포섭해 국내파의 장군들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오기섭 공격을 주도했던 사람은 주영하였다. 오기섭 숙청은 2차 당대회 훨씬 전부터 준비됐다.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배신하도록 강요받거나 아니면 소외되고 있었다.

오기섭의 숙청은 월북하는 남로당원들의 숫자가 늘어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월북한 박헌영과 그와 결탁한 오기섭, 두 강자가 북한의 정치무대를 함께 누비는 것은 갑산파에겐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소련 대(對) 미국

북한은 46년 초 이후 경찰국가가 됐다. 공산주의자들은 나머지 적들도 마저 제거해 나갔다. 권위주의적 정치체제는 서구식 민주주의보다 한국에 훨씬 더 손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한국사회의 보수성과 정치적 후진성은 서구식 민주주의자들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48년까지 김일성은 자신의 주요한 정적 대부분을 제거했다.

한국전쟁과 북한

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면서 소련 군정은 명목상으론 끝났다. 그 직후 소련군도 철수했다. 그러나 소련계 한인 200명은 거의 모든 주요 정부기관의 요직을 점령하고 있었다. 북한의 경제는 매우 어려웠다. 생활수준도 매우 낮았다. 다만 교육과 보건부문은 상당한 성과를 냈다.

남북노동당의 합당은 박헌영계의 사실상 붕괴를 의미했다. 박헌영은 이런 흐름에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남한에 남아 있던 지하당 간부활동은 47년 이후 격감했다. 김삼룡, 이주하는 최후의 지하지도자였고 그들도 결국 50년 3월27일 검거됐다. 훨씬 전부터 남한의 공산주의 지하활동은 고립 분산돼 버렸다.

남북노동당의 합당 결과 김일성이 당 중앙위원장이 되고 박헌영과 허가이가 부위원장이 됐다. 몇 해 못가서 두 부위원장은 죽거나 숙청된다.

군사력 강화와 전쟁의 발발

북한은 군사력도 점차 증강한다. 군의 최고통수권은 주로 김일성의 옛 동지로 구성된 역전의 유격대 투사들 수중에 있었다. 중공군 내에서 한국인 장교로 가장 높은 직책을 맡았던 무정은 제2군단장에 불과했다. 반면 전쟁 직전 인민군 총참모장은 소련파인 강건이었다. 김일성은 해방되던 그 달부터 무정을 위협적인 경쟁자로 여겼다. 무정은 다른 어떤 유격대원보다도 군사적 명망이 높았다. 무정은 한국전쟁 훨씬 이전에 ‘냉대를 받아’ 강등됐다.

남한은 대체로 중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북한은 침략 한 달 전인 5월 실시한 남한의 2대 국회의원 선거에 주목했다. 유권자 대다수가 이승만 정부에 등을 돌리고 무소속에게 기울었다. 50년 6월 19일 개원 땐 총 210석 가운데 130석이 무소속이었다.

<후루시초프 회고록>에서 후루시초프는 한국전쟁을 처음 발의한 건 스탈린이 아니라 김일성이었다고 술회했다. 미국은 이 당시 공산측이 전면공격은 하지 않으리라고 봤다. 중공과 북한 공산주의자들과 관계는 적어도 49년까지는 돈독하지 못했다.

전쟁 개시 첫 달에 북한은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7월 하순 공산군은 적들을 부산 일대로 몰아넣었다. 50년 9월 15일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전세는 급변했다. 9월 말 38선 이남은 모두 유엔군이 장악했다. 한국군 제3사단은 이미 10월11일 원산을 점령했고 11월 셋째 주엔 미군이 혜산진에 도착, 압록강 너머 중공을 보고 있었다.

50년 10월 말 몇몇 야전 지휘관이 중공군의 출현을 보고했다. 11월 25일 중공 야전군이 밀고 내려왔다. 12월 중순 공산측이 다시 북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소련학자들은 71년 간행한 저서에서 “저명한 군사령관을 포함한 소련 공군 고문단이 북한에 있었을 뿐 아니라 소련 비행사들도 침략자들과의 전투에 참가했다”고 단호히 말해 소련의 참전을 시사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 3차 전원회의

50년 12월 21-23일 자강도의 강계시에서 조선노동당 중앙위 3차 전원회의의 목적은 패전의 책임을 문책해 내부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무정도 오기섭과 같이 김일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무정이나 오기섭은 김일성이 자기들 부하가 돼야 마땅하지 상전은 말도 안된다고 봤다. 무정은 중공 팔로군의 포병 창건자요 마오와 더불어 대장정에 참가한 사람으로 45년 이전 김일성보다 월등히 중요했다. 상당수 군사간부가 회의에서 무능력과 과오, 범죄행위 등으로 문책당해 숙청되거나 강등됐다. 그러나 이 회의의 최고 희생자는 무정이다.

중공군이 이제 북한의 중심으로 등장했기 때문에 김일성은 제2군단장 무정을 잠재적 경쟁자로 여겼다. 인민군은 이미 유명무실했고 ‘중국인민지원군’을 통솔하던 펑 떠화이 등 중국의 역전 노장들이 실권을 장악했다. 무정은 군단장에서 강등돼 수인부대장으로 있다가 후에 평양 모란봉 지하극장 건설 감독을 하다가 중공 당국의 요청으로 중공에 인도됐다. 그러나 당시에 그는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었고 얼마 뒤 병사했다.

51년 1월 4일 유엔군은 다시 서울에서 철수했다. 51년 3월 중순 연합군이 서울을 다시 수복했다. 51년 5월 20일부터 전선은 교착상태가 됐다. 51년 6월 23일 소련 외무성 부상 말리크가 휴전회담을 요청했다.

4차 전원회의와 그 여파

51년 11월 2일 조선노동당 중앙위 4차 전원회의가 열렸다. 허가이는 당에서 밀려났다. 김일성은 남로당계를 유능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여기는 허가이의 태도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시의 주요 문제

확실히 1951-53년은 북한정권에겐 가장 어려운 고비였다. 북한에서 지상전투가 끝난 뒤에도 53년 7월 휴전 직전까지 대규모 공습이 계속됐다.

우리는 이 시기 특정 공산정권의 위기 대처방식, 즉 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며 어느 정도 대처하는가를 놓고 사례 연구를 했다. 1952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노동신문> 사설 가운데 일부 유실된 것을 제외한 325개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국제 정세를 지배했던 건 ‘농업생산력과 북한 농민의 당과 정부에 대한 태도문제 등 경제문제’(70건)였다. 가장 많은 부문을 할애한 주제는 ‘미국에 대한 비난’으로 모두 106건이었다. 2위는 ‘당의 강화 : 당과 인민의 관계’ 문제로 모두 104건이었다. 소련찬양도 70건에 달했다. 그러나 중공 찬양은 22건에 불과했다.

정치부문은 전쟁으로 당의 붕괴, 규율의 해이, 극심한 궁핍 등 당과 일반대중 사이의 심각한 괴리현상이 문제였다. 민간인 사망자는 약 100만 명, 월남자가 약 300만 명으로 추정된다. 군인 전사자는 약 50만 명으로 별도로 계산하고도 이렇게 많았다. 북한 사회는 전쟁 말기에 극심한 가난에 허덕였다. 53년 농업생산량은 다시 하락했다. 53년 휴전 당시 북한 주민들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졌다.

52년 4월 10일 <노동신문>은 김일성의 ‘생애’를 극단적으로 이상화시킨 4면의 특집호외를 발간했다. 며칠 뒤 세 명의 주요 당 지도자인 박창옥, 박헌영, 박정애가 각각 김일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박창옥과 박헌영에게 닥쳐올 운명을 예견하면서 이들 논문을 비교하면 흥미롭다.

박창옥은 김일성 개인숭배를 견제하려는 의식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박헌영의 논문에도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최고 지도자는 김일성이 아니라 스탈린이라는 명제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박헌영이 김일성과 관계에서 그에게 아부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정애는 대책없는 아부로 일관했고 이후 그녀는 출세의 길을 달렸다.

전쟁 말기 공산측은 세균전 선전공세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 증오를 조장하고 그들의 야만성을 그려내는 작업은 극도로 지친 주민들을 다그치고 패배나 투항으로 생길 상황에 대한 공포심을 지속으로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북한 주민들은 중공군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반드시 패배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53년 3월 초 스탈린 사망이 발표되자 김일성은 즉각 장례식 끝까지 인민애도기간을 설정했다. 모스크바와 평양과 관계는 부자관계였고 반면 평양과 북경의 관계는 대등한 형제관계였다. 북한 지도자들은 자기들 국민 사이에 만연한 사기 저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전과 박헌영 일파의 숙청

53년 7월 25일 정전회담이 완전 합의에 도달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28일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 떠화이가 북한 전역에 정전을 선언했다. 수많은 표창장과 훈장이 당 고급간부들에게 뿌려졌는데 박헌영은 이미 2월 초부터 신문과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김일성은 심복인 김일, 박정애, 한설야 등과 만나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에게 전가하려는 계획을 준비했다. 김일성은 임화의 체포를 발단으로 자신의 행동을 개시했다. 남한 출신 시인 임화는 박헌영의 추종자였다. 남한 출신 당원들에게 과거 박헌영과 관계 및 기소사실을 ‘입증하는’ 자세한 진술을 하도록 강요했다.

김정기는 67년 5월 28일 서울서 이정식과 회견에서 흥미로운 사례들을 말했다. 약 400명이 참가해 1주일간 계속된 국가계획위원회 전원회의를 실례로 들었다. 박헌영에 대한 자세한 기소내용이 담긴 소형책자를 건네받아 사전에 학습했다. “평소 박헌영을 흠모했던 저는 처음엔 당의 기소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53년 2월 사건이 터졌다. 박헌영은 55년 12월 중순에 재판에 회부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박헌영 일파의 숙청은 이유도 분명치 않은 채 3년여를 끌었다. 53년 2월 이후 박헌영은 독방에 감금됐다. 그의 동료들의 재판은 53년 8월 3일부터 시작됐다.

이 때 허가이는 자살한 뒤였다. 김일성은 허가이가 당내에서 박헌영의 영향력을 견제하지 못했고 박헌영 일파와 허가이가 합작할까봐 두려웠다. 박헌영파의 재판은 이승엽을 미국 고용간첩으로 몰아세우는 것으로 시작했다. 박헌영을 김일성 파에 반대행위로만 문책하는 것은 불충분했다. 그들은 미 정보기관과 직접 연결된 간첩활동을 했다는 식의 대역죄로 기소해야 했다.

박헌영 공소장의 내용

이승엽과 조일명은 46년 3월부터 미 군정청 공보처 여론국 정치연구과 책임자인 미 육군소위의 간첩이 됐다. 이승엽은 47년 5월부터 미 국무성 촉탁이었고 당시 남조선 주둔 미군사령관 하지의 최고 정치고문이었던 노블과 직접 연계해 간첩활동을 계속했다. 이승엽은 전쟁이 발발하자 50년 7월부터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이 돼 임화에게 정보자료를 모아와 미국 정탐기관에 제공했다.

이강국은 1935년에 미국 정탐부의 주구로 활동할 것을 서약했다. 이강국은 자기의 애인 김수임을 미군 24사단 헌병사령관이던 미군대령에게 제공하고 서약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강국은 46년 9월 미 군정청의 체포령이라는 애국자의 가면을 쓰고 공화국 북반부에 잠입했다.

이승엽 일당의 간첩활동에 가담한 이강국은 전후 4차에 걸쳐 주요기밀을 임화를 통해 이승엽에게 제공했다. 안영달은 미군 정보관 니콜스의 직접 지도 하에 당시 이승만정부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이던 백형복과 결탁해 50년 3월 27일 김상룡, 이주하 동지들을 백형복에게 체포당하게 했다.

재판기록에서 박헌영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바로 이 부분이다. 50년 7월 하순 이승엽은 안영달이 김삼룡을 체포하게 했다는 말이 유포되자 박헌영과 협의한 뒤 “자기들의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안영달을 전선에 동원되는 임종환 대열에 배속시키고 그에게 안영달을 처단할 과업을 주었다”고 한다.

52년 9월 초 박헌영의 집 응접실에서 이승엽, 배철, 조일명, 임화, 박승원, 윤순달 등이 모여 비밀회담을 가졌다. 박헌영 일파에게 미국의 고용간첩 운운한 것은 명백한 허구다. 이강국의 애인 김수임이 정보계통에서 일하던 미군장교와 동거한 건 사실이다. 남한 당국은 그녀가 군사기밀을 수집 전달하고, 공산당 핵심간부 이중업의 탈출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체포했다. (오제도, ‘평화의 적은 누구냐’, 부산, 1952, 9~23쪽)

박헌영의 운전수가 김일성 일파의 뇌물 또는 사주를 받아 박헌영에 대해 불리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은 53년 중엽에 박헌영 일파를 일소했다. 숙청자는 남로당 출신으론 김점권 김광수 이주상, 안기성, 권오직, 김오성, 김기림, 우진환, 이종갑, 최용달, 구재수 등이다. 그러나 박헌영 만은 2년 반 동안 가두어 둔 뒤 55년 12월에야 처형했다. 이유는 확실치 않다. 공식 재판기록에는 박헌영이 “자신의 죄과를 낱낱이 시인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은 북한을 괴멸상태로 만들었다. 파산한 북한 경제를 복구하는 것이 초미의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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