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은 ‘체제’다. 바로, ‘자본주의’

[양규헌 칼럼] 세상이 바뀔 때, 노동자의 봄은 오리라

선거에 묻히는 비타협적 투쟁노선

입춘이 지나도 나풀거리던 겨울의 끝자락은 봄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면서 훈훈한 봄바람에 흔적을 감추고 있다. 긴 겨울이 지나고 계절의 시작인 봄을 맞이하며, 봄기운에 아롱지는 아련한 기억들이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은 흔해빠진 낭만이나 향수에서 비롯된 감정이 아니다. 연대투쟁을 통해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노선’이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성이라고 믿으며 활동했던 지난 시절들이 노동자계급의 봄을 향한 그리움의 감정으로 다가온다.

하루에도 몇 번씩 스팸과도 같은 선거홍보 문자들이 들어온다.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예비후보들, ‘내가 살고 있는 위치가 자신의 지역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사는 곳은 안다고 감안하더라고,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을까’하는 의문이 잠시 기분을 우울하게 만들고, 하필이면 새누리당 예비후보들만 문자를 보낸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의 정치성향을 모르고 있다는 데에 스스로 안도해야 하는 걸까. 아무튼 이렇게 선거는 임박해 있다.

평소에 별로 보이지도 않았던 정책들이 쏟아지고, 오로지 표를 구걸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 세계공황과 함께 99%에 삶이 빈곤으로 찌들어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몸부림 치고 있는데 재벌들은 경제위기 국면에서도 정치권력의 도움으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고 그것도 모자라 구멍가게, 빵집까지 문어발식으로 모조리 집어삼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현상을 놓고, 선거철이 임박해짐에 따른 표 따먹기 ‘립 써비스’가 한창이다. 새누리당 의원 입에서조차 ‘탐욕의 자본’이라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권력의 앵무새였던 방송

이명박정권 취임 이후에 방송은 이미 유신체제와 군부독재정권의 나팔수 역할과 대동소이한 모습을 보여 왔다. 방송의 사회적 기능이 막강한 만큼, 보도의 공정성과 왜곡된 보도행태는 사회적 병폐로 작동하며 진실을 왜곡하는 기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노동자가 쓰레기로 취급되며, 정리라는 이름으로 해고당하고,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노동자 취급도 못 받으며 1,000일을 훌쩍 넘게 길바닥에 내 몰리고 있다. 생존권과 일할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에게 조직폭력배와 다를 바 없는 용역에 의해 살인적인 폭력에 노출되어도 방송은 고작 현상만을 슬쩍 나열할 뿐, 사회모순과 자본의 폭력, 투쟁의 발단이나 원인 등에 대한 보도는 다뤄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정치적으로 전혀 수렴되지 않아, 수 만 명이 결집한 집회에 대해,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보다는 ‘시민의 불편’이 방송의 기본 프레임으로 설정되었다.

자본에 의해 영혼이 파멸당하고, 사회에 대한 극심한 배신감과 좌절에 허우적거리는 노동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도한 적은 없다. 이러한 과정을 딛고, 방송사 연대파업이 구체화 되고 있는 시기에 방송노동자 동지들의 ‘석고대죄’는 엄혹한 정세에서 희망의 빛이 되고 있다. 다만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방송사 투쟁이 ‘한시적인 정권에 대한 저항이기 보다 지배권력에 대한 무한한 투쟁’이어야 한다. 또 같은 노동자로서 노동자, 민중의 고통을 함께하려는 노력이이말로 언론인의 본분은 물론, 공정방송의 구조와 체계를 확보하는 동시에 승리의 원천이 되리라 확신한다.

계급 대립구도를 ‘경제민주화’로 봉합

사회의 모순과 함께 노동자, 민중의 분노는 1%와 99%의 대립선이 명확하다. 그러나 부의 편중과 독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감춘 채, 정권이 바뀌면 해소될 수 있다는 마약과 같은 환상을 안겨주고 있다. 소위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신문들도 여야 정치권이 앞 다투어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 걸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실’이라고 떠들어댄다.

정말 그러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경제민주화가 가능한가. 몇 가지 제도와 법률을 약간 손보고, 법인세 등에 대한 변화를 통해 매우 취약한 계층에 복지깔판을 살짝 깔아놓는 거 외에 진정한 경제민주화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때만 되면 떠들어대는 ‘경제민주화’는 ‘개량의 떡고물’과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기’ 이상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약 8년 전, 비정규법안이 입법예고 되었을 때, 철페연대를 비롯한 운동단체와 비정규단위들이 “비정규법안은 비정규노동자를 양산하고 비정규직을 고착화시키기 위한 악법중의 악법”으로 규정하고, 민주노총이 총파업으로 이 법안을 저지시켜줄 것을 호소하며 각 정치세력에게도 법안 저지에 함께하자고 제안하며 국회 앞 농성으로 이어졌으나 비정규법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그 이후 비정규직은 정상적 고용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정리해고에 이은 비정규노동자 양산은 물론, 무기계약제라는 시궁창 같은 제도를 통해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다는 말장난으로 불안정노동자의 삶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비정규법안이 만들어진데 대해 책임이 없다고 할 정치세력은 없다는 것이고, 민주노총 또한 예외는 아니다.

콜트악기 노동자들이 승소를 해도,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들이 승소를 해도, 해고 노동자들이 복직판결을 받아도, 간접고용에 대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도, 거대한 권력으로 자리매김한 자본가들은 꿈쩍하지 않는다. 법은 지배권력을 위해서 존재할 뿐, 노동자계급에게는 억압의 도구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정의, 진리를 떠들어대고 만인에게 평등해야할 법이 노동자 보호와 관련해서는 개무시 되고 있다.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외면하면서 여, 야 할 것 없이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 걸고 있으면 뭘 하는가. 법적 판결에 따른 조치도 해결되지 않는 작금의 현상은, 노동자정치는 실종되었다는 증거이며, 그들이 내 세우는 경제민주화는 사기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자본가들은 법적 판결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의 현재, 미래가치의 샘 법으로 불법에 대해 약간의 벌금을 물면 되는데 법을 지켜야할 이유도 없을지 모른다. 노동자에 비유하면 무기징역에 해당되는 범죄도 자본가라는 이유로 금방 사면복권 되는 현실이 아닌가.

자본주의의 폭압성도 야만성도 본질은 체제에 있다

자본주의는 워낙 그런 것이다. ‘돈이 주인인 세상’이라고 규정하는 함축적 언어가 ‘자본주의’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차별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극소수의 자본가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동자가 핍박받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

자본가들은 그것이 ‘세계의 질서’라고 믿고 있다. 그렇게 사람을 내몰고 죽이고 망쳐야 자신들의 안락과 세상의 평화가 유지되고 굴러간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고 두려워 할 뿐.

만약, 만약에 우리 노동자가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본가라면, 더 갖기 위해 사람을 이렇게 망치고 죽일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물론 자본가들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그들의 지배와 수탈과 억압은 필연이다. 분명한 것은 더 갖기 위해 노동자, 민중들에게 그렇게 해야 자신이 누리는 풍요와 안락을 배가시킨다는 사실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지배권력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다.

몇 명의 정치지도자와 일개 자본가 개인의 뜻으로 모든 비극이 일어나고 세상이 망쳐지는 것이 아니다. 시민운동가 출신이 시장이 되어 복지를 노래하고 유명 대학 학장이 좋은 사람이라고 세상이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가 독재정권과 독점재벌의 총수들을 물러나게 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

자본가들은 북한에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에는 열을 올리지만, 자신들 스스로의 대를 이은 세습은 뻔뻔스럽게도 당연한 걸로 주장하며, 자본주의에서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중요한 점은 부의 축적과 대물림하는 자산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리는 과정에 노동자들은 자본에 의해 죽어나가고 처절한 영혼을 안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다.

부르주아 정치가 경제민주화를 이야기 하고 복지를 내 세운다고 자본주의 본질은 바뀌지 않으며 노동자, 민중을 억압하는 기제는 더더욱 강고해질 수 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다.

노동자의 봄은 세상을 바꿔야 가능하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똥이 더럽다고 모두가 피하면 결국 세상은 온통 똥통이 되고 만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명제도 68혁명을 통해, ‘나는 반역한다, 고로 존재 한다’로 바뀌었다. 금융세계화의 물결이 세계도처에서 노동자, 민중의 투쟁과 대치점을 이루고 있는 현 시기에는 ‘점령을 위해 투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우리의 명제로 맞지 않을까.

우리가 염원하는 노동자의 봄은 자본이 퍼 싸질러 놓은 오물더미를 노동자계급이 투쟁으로 치워내고 노동자가 직접정치의 주체로 우뚝 서, 지배계급의 배설 원천을 제거할 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노동자, 민중의 피로 얼룩진 광란의 자본주의, 탐욕의 자본주의, 야만의 상징, 자본주의는 그 모순이 극에 달해, 위기를 스스로 감지하고 자신들의 체제를 고수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을 포섭과 배제의 전략으로 분할통치하고 있으며, 복수노조를 활용하고 창구단일화, 타임오프제, 정리해고, 불안정노동 넘어, 억압과 탄압으로 기본권을 유린하며 노동자계급 내부를 이완시켜내고 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한 노동자계급의 봄은 요원할 뿐이다.

자본이 쌓아놓은 거대한 체제의 장벽을 넘어서야 그들이 휘두른 칼날에 죽고 상처 입은 영혼의 비명을 달랠 수 있을듯하다.

“후꾸야마의 선언”처럼 자본주의가 이겼다. 그렇다. 그런데 이겼다는 것이 과거 사회주의 국가에서 최고였던 사회주의자가 훌륭한 자본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가 현재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의 봄’을 맞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이런 시도 자체는 역사변화의 발전법칙에 근거한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할 것이다.

부르주아 정치권력에 기생하여 개량의 떡고물을 기다리기를 거부하고, 모순에 대한 투쟁을 조직하는 한편 노동자정치의 새로운 장을 열어 낸다면, 노동자의 겨울은 봄을 향한 희망으로 밝게 다가올 것이다.
덧붙이는 말

이 글은 <노동자 역사 '한내'>에도 개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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