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 계급과 선거 그리고 스펙터클 자본주의

[양규헌 칼럼] 정권심판만 하면 새 세상 올 것 같았던 그 총선이 끝나고

유령이 된 노동자계급과 19대 총선

‘이명박정권 심판’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민주통합당과 붉은 색의 새 탈을 쓰고 ‘확 바뀐 후보, 확 바뀐 약속’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새누리당의 총선 결과는 새누리당의 승리로 끝났다. 민주통합당의 패배 요인은 ‘야권의 전략부재’와 ‘투표율의 저조함’, ‘깔끔하지 못한 야권통합 과정’, 그리고 선거운동 막판에 불거진 ‘막말파문’ 등이 주요한 패배요인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무엇보다 새누리당 승리의 핵심은 언론을 장악한 이명박 정권이 최대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결과를 지켜보며 허탈함이 엄습해오는 것은 야권의 패배때문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보이지 않아서이다.

‘민간인 불법사찰’이 최대 쟁점으로 부각되고, 이명박 정권의 실정이 폭로되는가 하면, ‘논문복사’, ‘패륜 시아주버니’ 사건 등이 뜨겁게 달아올랐으나 대부분의 언론들은 선거막판에 대두된 ‘김용민 막말’에 집중됨으로서 새누리당 후보들의 불법정황에 대해 교묘한 언론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줬다. 여기에 언론, 방송사 총파업으로 진행된 뉴스타파와 진보적 인터넷 신문을 비롯한 SNS나 트위터가 활발히 논쟁을 유발시켰지만 이명박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주류언론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방송사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비정상적 방송 행태가 새누리당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판단들도 있었다. 뉴스타파 등의 매체가 신선함이 돋보이긴 했으나 방송사 경영에 대한 문제제기가 장외로 이동한 상태에서 보다 자유롭게 각색된 방송사의 보도는 새누리당의 전속 공보기관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선거운동 중반에는 팟캐스트 방송들이 생겨나 힘겨운 균형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인터넷을 달궜던 매체의 주장과 담론은 행동과 실천이 결여된 무성한 논쟁의 한계에 머물렀으며 계급적 관점은 선거판에서 찾아볼 수 없었기에 ‘월드와이드 웹을 이용해 사회주의를 연습하자’는 ‘지젝’의 말을 새롭게 음미해 본다.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정치세력도 이슈를 부각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총선국면에 불법사찰과 강정마을은 쟁점에서 제외되었고, 정수장학회와 관련된 부산일보,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그림자 투쟁으로 발에 땀이 나도록 쫒아 다닌 영남대의료원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도, 정리해고 된 쌍용차 노동자가 또 다시 죽어나가도, 언론은 침묵하고 쟁점이 부각되지 않았던 것을 언론통제라는 구실로 변명하는 것은 걸맞지 않다. 쌍용차 노동자 빈소에 진보신당을 제외한 정당 지도부나 후보는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정치일정의 급박함 때문일까 아니면 관점의 문제일까.

스펙터클하게 진행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무한하게 역사가 발전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두 번 되풀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며,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소극)으로. 그러나 이 말로 이명박 정권을 설명하기엔 아직 부족한 게 있다. 거기에 박근혜 새누리당과 합하면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만나야 그 일부만이라도 해석이 가능하다. 왜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의 역사가 ‘영원회귀’와 만나는지 그래서 가능한 동시대의 성찰과 동시대인의 사명은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민간인 사찰...한 번은 비극, 한 번은 희극

이명박 권력은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 광우병 촛불정국으로 혼비백산 놀란 이명박이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부르며 생각했던 해법이 민간인 사찰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모든 세력들에 대해 국가기관은 물론이고 사적기관을 조직해 전 방위적인 감시 하에 정적들을 제거하리라 맘먹었던 모델은 바로 박정희 파쇼일 것이다.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에 독재와 살인적인 노동에 저항하는 수많은 민주열사와 노동자들이 빨갱이로 몰려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죄 없는 이들이 간첩으로 몰려 18시간 만에 목을 매달아 죽였던 ‘인혁당 사건’. 그야말로 역사의 비극이었다.

그렇다면 이명박의 사찰은? 말할 것도 없이 희극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던 사건이 ‘김종익씨 사찰’이다. 강원도 출신의 경영인이라는 이유로 촛불정국 직후 계속 사찰대상이었던 그는 보호받아야 할 국가공권력에게 불법적으로 생계수단과 재산을 빼앗겼고, 그런 와중에 이명박 정권은 불법사찰을 은폐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앞세워 횡령이라는 범죄의 올가미를 덧씌우는 것도 모자라 인간성을 깡그리 모멸하며 숨통을 조였다.

이런 작태는 조폭이나 사기꾼, 양아치 집단보다 수준 떨어지는 천박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명박 정권이 가진 정치적 탐욕은 죄 없는 사람을 절망에 구렁텅이에 묻어버리고 사과는 고사하고 부관참시도 마다않는 권력의 형태가 상식의 범주는 물론, 인간세계에서 상상할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 ‘웃긴다’는 것 외에 달리 붙일 말이 없다.

연예인 사찰을 당했던 김제동은 허허 웃으며 그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놓았다. 사찰을 했으면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서 허무하고 웃음이 난다는 것이다. 김제동은 사찰을 감옥과 고문과 죽임 등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그런데 자신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무언가 가볍고 허허롭기만 했다(그러나 무서워 잠을 못 들어 수면제 복용 후 잠든 적이 많았다 한다). 물론 그는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래도 자신은 밥줄이 끊기지 않았지만 쌍용차 노동자나 촛불 시위대에게 가해지는 사찰(채증사진으로)의 가능성을 알고서는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김제동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린 것은 동시대인을 의식하는 마음의 구조가 읽혀서이다. 그는 자신이 사찰을 당하는 걸 알고 있었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군부독재시대를 떠올렸고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에 즉 지나간 시대를 동시대로 자각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우발적일수도 있고 그의 정신적 배경이 이룬 그의 역사관일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느낀다는 건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시대를 뛰어넘어 공간을 뛰어넘어 연대의 정신을 갖는다는 건 인간에게 매우 귀중한 어떤 것의 본질(이성을 뛰어넘는)이라고 생각한다.

총선이 끝난 시점에서 또 한 번 웃기는 건 ‘불법사찰 금지법’을 만들겠다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이다. 현행법으로서 민간인 사찰자체가 불법인데 다시 법을 만들겠다는 말은 불법사찰은 지난 일들이니 무마하겠다는 속셈이든지, 아니면 애써 쟁점을 비켜가려는 전략과 정치적 수사일 것이다. ‘불법사찰 금지법’의 발상은 ‘살인 금지법’이나 ‘강도 금지법’을 만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으니 이 역시 ‘웃긴다’고 할 수밖에 없다.

영원회귀와 노동자계급 그리고 왕국의 동굴

인간의 본질은 동시대인이 되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다른 시대라도 같은 역사를 살수 있다면 동시대, 동시대인인 것이다. 우리는 만년의 역사나 30년의 역사나 지금이라도 동시대를 자각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공감하고 확장하는 인간의 인간성이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영원회귀’와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이 두 계급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영원회귀’란 나를 중심으로 나는 영원히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니체의 초인사상내지는 허무주의 철학의 범주 내 중심테마다.

이명박이 오늘날 권력을 가져 왕이 되었다면 민간인을 사찰하든 4대강을 말아먹든 공기업을 민영화하든 부동산실명제를 어기든 상관없다. 모든 가능한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연장하려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그의 ‘영원회귀’다. 그는 영원히 왕이 되고자 ‘영원회귀’의 얼굴에 철판을 두른다.

온갖 화장으로 치장하고 나타났지만 본질이 이명박인 박근혜는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진화할수록 영리해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자본가들이 더 진화된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지배 착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변증법’을 인식하는 두뇌가 전무함으로 언젠가는 사멸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인식이다.

노동자의 경우는 어떤가. 내가 지금 노동자라면 영원히 노동하면서 만 년 전에도 살았고 만 년 후에도 노동자로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때문에 우리는 영원회귀를 박차고 새로운 운명을 향해 끊임없는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것이며 ‘영원회귀’의 예외가 보편이 되는 시기를 가늠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아마도 혁명이 도래하는 시기일 것이다.

오래도록 잠자는 듯 이어지던 역사에서 ‘영원회귀’의 사슬에서 풀려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들 인류들은 시스템을 이해하려 질문을 던졌고 그 결과 질적 전환이 이뤄지는 ‘변증법’을 발견해냈다. 그 최종 주자들은 19세기의 철학자와 혁명가들이다.

노동계급은 사막의 낙타에서 분노하는 호랑이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질적 전환을 만들어낼 때, 영원회귀의 사슬에서 풀려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초인이 되어 짐승과 신의 세계를 초월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해방세상’으로 가게 된다는 확신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보해야한다는 열망으로 미래의 정치를 전망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지금 ‘영원회귀’에 갇힌 왕과 왕의 사족들과 왕에게 충실한 개들에 둘러싸인 왕국의 동굴에 갇혀있다. 왕은 영리하게 언론을 통제하고 자신을 지키는 주구들을 만들어 다음 후계자를 만들려하고 있다. 직접행동을 할 수 없는 인민은 답답하게나마 자기의 처지를 개선해보려고 고안되어진 판에서 합법적으로 비이성적인 선거 승리에 몰입되어 오로지 심판의 캐치프레이즈만을 읊어대며 SNS, 인터넷, 트위터 등으로 전쟁을 벌였다.

왕은 막강한 자본력과 권력을 동원해 모든 비리를 일상으로 만드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정상사회라면 몇 번을 탄핵당하고도 남을 왕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거대 고래와 작은 고기 노곳떼의 싸움에서 노곳떼가 이길 것이라는 판단은 노동자 민중의 절박한 요구와 맞물려 있어야 하고, 요구에 대한 투쟁이 실천적으로 결합되었을 때 위력으로 작용한다.

유명한 의사와 고상한 찻집에서 담소를 나눈다고 건강해지지 않듯이 쟁점에 대한 전략이 수립되고 그 쟁점을 부각시켜 해소하기 위한 실천적 투쟁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막강한 해적방송, 인터넷 매체도 동력을 생산해 낼 수 없다.

맥락 없는 정치적 나레이션이 자초한 위기

뜬금없는 민주노총의 민주통합당에 대한 ‘정책연대’는 어떤 전략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몇 년 전 한국노총이 한나라당과 맺었던 정책연대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고, 이 중차대한 정치선언은 노동자계급의 동력 집중은 고사하고 혼란만 가중시켰다. 대중의 결의를 모으는 과정 없이 노동자를 억압하고 탄압했던 정치집단에게 정책연대를 선언함으로서 정치적 동거를 표명하는 민주노총의 행위는 ‘통큰단결’도 ‘대동단결’도 아닌 분열을 획책하는 결과만을 낳고, 조직의 위기를 심화시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선거 며칠 전, 만 여 명이 시청광장에 모인 번개팅 ‘삼두노출’에서 주장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시민의 힘’이라고 역설했지만 이들은 길 건너 대한문 앞 노동자 빈소를 외면하고 말았다. 노동자의 절박한 처지와 고통을 외면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꿈꾸는 자들의 태도가 아니다. 노동자의 고통, 좌절, 절망, 죽음을 외면하는 시민의 힘은 의미 없는 힘이며, 이념과 노선이 구분되지 않는 애매한 정치일 뿐이다.

스펙터클한 자본주의, 실종된 운동정치를 복원해야

정권은 반복되어 바뀌고 또 바뀌지만 노동자계급은 참담하고 암울했던 전 시대와 동시대를 살고 있다. 재능과 쌍용차의 장기투쟁, 영대의료원의 그림자투쟁, 강정구럼비 투쟁, 언론 방송사파업들이 정세돌파의 역동성을 깔아놓고 있었으나, 선거국면은 그 구체성을 집어삼키고 정권심판만 하면 새 세상이 올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리고 총선은 끝났다.

뜨거웠던 총선국면의 열기가 노동자 투쟁에 새로운 돌파구를 외면하고, 패배에 대한 헷갈리는 분석과 대안이 쟁점으로 부각되는 지금, 슬픔이 밀려오고 암담함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선거결과로 빚어지는 감정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느낌과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주저앉고 싶지는 않다. 동시대의 눈을 가진 노동자계급은 진실을 보는 탁월한 눈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변혁은 과학적 정세를 볼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했다. 마음과 두뇌와 온몸으로 노동자의 현재를 투쟁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긍정과 열정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꾸어 나간다는 확신 속에 ‘의회정치’만 살아있고 ‘운동정치’가 보이지 않는 정치는 스펙터클한 자본주의 시대에서 노동자계급의 정치가 아니라는 확신이 더욱 굳어진다.
덧붙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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