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 능력의 수탈에 저항하는 삶의 예술화를 위한 책

[새책] 시로 읽는 니체(오철수 저, 490쪽, 2012.2.22, 갈무리)

자율주의 이론가인 조정환에 따르면, 우리는 현재 인지자본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에서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근력을 착취하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의 생명, 지각, 지식, 감정, 마음, 소통, 욕망, 행동 등의 움직임을 조직하고 그것의 성과를 수탈하고 착취”(조정환, ‘인지자본주의’, 갈무리, 2011, 23쪽)한다. 인지능력이란 세계와 접속하고 있는 생명체의 지성적 정동적인 대응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인지자본주의는 지성적 정동적인 능력이 발휘되는 장을 자본의 소유 아래 둠으로써 그 능력의 산물을 수탈한다.

이러한 수탈을 위해서 자본은 ‘정동적 지배’를 꾀하게 된다. 즉, 자본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최대한 가동시키려고 하면서도 불안과 우울 등의 수동적인 정서를 야기하여 자본의 수탈에 저항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을 약화시킨다. 그래서 현 시대의 특징은, 사람들이 더욱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데 있다. 자본이 요구하는 인지력을 업데이트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사회에서 배제된다. 불안정 고용의 시대에서 배제된다는 것은 삶이 수렁에 빠져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젊은이들이 불안과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들에게는 사회에 들어가기도 전에 사회로부터 배제되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지자본주의가 젊은이들의 목 밑에 배제라는 칼날을 대고 “너를 자본의 요구에 맞추어 개발하지 않으면 너의 인생은 끝난다”고 위협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오철수의 <시로 읽는 니체>는 우리 시대에,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는 불안과 우울을 극복할 수 있는 강장제와 같은 책이다. 인지 능력을 착취당하고 심적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당대에서는, 시 자체가 저항적인 성격을 가진다. 시는 시대가 강요하는 수동적인 정동을 시인 스스로 능동적인 정동으로 전화하는 기계다. 시 쓰기란 시인 자신의 심신에 일어나고 있는 정동을 말을 통해 재조직하는 능동적인 행위이고, 이렇게 이루어진 시 텍스트는 정동의 잠재적인 응축기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독자는 이 응축기와 접속하면서 정동되고 다시 그 정동을 재조직하게 된다. 그래서 시는 여러 장치를 통해 정동적인 지배를 행함으로써 인간을 주조하고자 하는 자본에 저항하는 기계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오철수 시인은 이러한 성격을 지닌 시 텍스트와 니힐리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니체의 사상을 마주치게 하여, 이 인지자본주의 시대를 돌파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사실, 고백하자면, 1980년대 후반에 대학생활을 시작한 필자로서는 니체 사상은 당시엔 ‘사춘기 철학’ 쯤으로 생각했다. 다른 ‘문청’과 마찬가지로, 필자 역시 사춘기를 ‘실존주의’와 더불어 고독하게 보냈는데, 그땐 해설서를 통해 니체 사상을 접하고는 큰 감동을 받은 바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후, 맑스와 레닌을 읽으면서 ‘소련 교과서’라는 주형을 통해 ‘맑스주의’를 ‘습득’하고 나서는, 니체의 책은 사춘기 때나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 교과서’라는 주형이 파괴되고 나서는 필자 역시 알튀세르나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을 기웃거리게 되었고, 1990년대 후반에 니체를 본격적으로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니체 사상에 파시즘적인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니체가 기성의 지배적인 가치를 망치를 휘둘러 파괴하는 열정적이고 혁명적인 사상가였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특히 ‘목적론’에 새겨진 그 기독교적이고 니힐리즘적인 성격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의 열정을 상대화하여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문학평론 활동과 대학 강의를 하게 된 필자는 니체를 자주 읽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오철수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니체 사상과 다시 마주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선 든 생각은, 시와 사상을 접속시켜 논의를 전개시킨 형식이었다. 사실 문학을 통해 철학 사상을 설명하거나 철학을 통해 문학을 설명하는 형식의 책은 새롭다고 볼 수 없으며, 근래엔 인문학 분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시로 읽는 니체>도 이러한 부류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들이 주로 철학자가 여러 철학 사상을 설명하기 위해 문학을 가지고 왔다면, 이 책은 시인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인 니체의 사상을 시와 접속시켜 일관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이 책은 여러 난해한 사상들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문학을 끌고 온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직접 쓴 것들을 포함한 시편들과 니체 사상의 접목을 꾀하면서 삶의 여정과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오철수 시인이 ‘삶노래’라고 부르면서 인용한 시편들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시인들이 쓴 것들이다. 니체의 사상은 이 시편들을 통해 따끈따끈하게 구체화되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나침반으로 변모된다.

이 책은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짜여 있다. 이는 우리네 삶 역시 드라마틱한 면모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생명의 탄생과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율하고 예술작품화 해야 한다는 시인의 주창으로 끝난다. 이 사이에서 죽음과 삶의 무의미, 고통, 무기력, 수동적인 허무주의를 극복하면서 삶의 긍정과 운명에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철학적 여정이 전개된다.

이 책의 1장에서 시인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살기 위해서임을 강조한다.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누구도 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죽음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죽기 ‘위해’ 사는 삶은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삶만이 있다. 하지만 타인의 죽음을 우리는 경험한다. 죽음은 삶의 옆에 삶과 함께 있는 것이다. 허나 그때의 죽음은 삶을 방해하지 않고 삶의 풍경으로 존재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삶의 이 세계는 전적인 긍정의 세계다. 하지만 삶만이 존재하는 것이 이 차안 세계의 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죽음이 삶을 포위하고 있다고 시인은 진단한다.

니체적인 사유에 따르면 천지는 생성만이 있지 어떤 목적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천지의 생성엔 인간적인 의미가 없다. “天地는 不仁”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에 처한다. 의미 없는 천지와 마주하면서, 우리는 천지엔 목적이 없다면서 삶을 방기하거나 목적을 인위적으로 설정하여 거기에 삶을 맞출 위험이 있는 것이다. 이 두 삶의 태도 모두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전자는 수동적 허무주의로, 무기력에 빠져 삶을 회피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로 나아간다. 아니, 죽는다는 것도 과도한 의지를 요구하는 것이기에 수동적인 소멸을 맞이하고자 하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 원칙에 순응하여 기계적인 삶을 살거나 급기야는 삶에 남는 것은 육체적인 생리 현상만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이때 육신에 달라붙어 있는 생명을 생생하게 재발견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한다. 오철수 시인은 ‘삶노래 17’에서 자신의 시 ‘나를 만난 곳’을 소개하면서 “허무의 바닥에서 삶의 몸을 만났던 체험”(109)을 이야기한다. 포르노 영화를 틀어주는 여관방에서, “내 수중엔 어떤 희망이나 절망도 없었”던 시인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자다 일어난다. 그때 시인은 “심한 갈증과 생리현상을 느”끼게 되는데, 갑자기 그는 “내 육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보는 것 같은 낯선 느낌에 사로잡혀 펑펑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 소외의 느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갈증과 생리현상만 남은 몸은 시인에게 새로이 삶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시인의 눈물은, 방기했던 삶에 대한 미안함과 설움이 생리현상으로 나타난 생명력의 발견에 따른 기쁨과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에 의해 터져 나온 것이다. 허무의 끝에서 날것의 삶이 다시 발견되고, 그리하여 생명력은 다시 가동되어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수동적인 허무주의와는 다른 허무주의 역시 존재하는데, 이는 확실성에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태도이다. 이 태도 역시 지금 현재의 삶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허무주의에 따른 삶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확고함을 믿고 따르면서 삶의 희망을 미래에 두고 살아감으로써, 지금 현재의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 이렇게 의존하는 정신은, 확실성이 파괴되었을 때 절망의 포즈를 취한다. 시인이 인용하고 있는 니체의 말에 따르면 저 확실성에의 요구와 결별할 때 자유로운 정신이 태어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변하고 있는 저 노을빛의 강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거짓된 생에서 다시 나의 생으로 돌아”(131)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생으로의 귀환,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실행하는 것”이며 “삶 속에 자기의 차이를 새겨 넣는 사랑의 삶”(135)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우리가 ‘나’의 생을 살아나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시인은 잊지 않고 있다. 시인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꽉 짜인 규칙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면서 그 규칙에서 빠져나오는 삶을 타자로 규정하고 배제한다. 규칙에 순응하는 삶은 통장의 잔고를 삶의 가치로 여기며 살아나간다. 규칙에 순응하지 않을 때 통장의 잔고도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규칙에의 순응은, 살기 위해서라도 사회에 의해 제시되는 노동에 삶을 가둬놓는 것과 상통한다. 즉 순응의 삶을 사는 자는 “노동절 날 노동을 찬양하는 노동자”(183)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살기 위해 노동을 짊어지고 사는 그 노동자는, 결국 노동을 강요하는 사회를 떠받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에 시인은 이렇게 삶이 노동에 포섭되는 것에서 벗어나 노동이 삶에 포섭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이 우아함을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우아함이 노동을 포섭하는 창조하는 노동이 되어야”(183) 한다는 것이다.

오철수 시인의 이러한 주장을 볼 때, 니체의 사유가 왜 변혁적인지 알 수 있다. 니체가 제시한 자기 자신의 생으로의 귀환과 자유로운 정신의 탄생은, 결국 삶을 노동에 종속시키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반하여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의 수탈을 위해 현대 자본주의가 부과하는 노동에 반하여 삶에 종속되는 노동을 한다는 것은, 삶을 그 내부로부터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업과 통한다. 그 노동은 삶을 더 살만한 것으로,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창조적인 작업이다. 이때 노동은 “넘치는 성형력(成形力)으로 스스로를 창조”(230)하는 삶에 통합된다. 성형력이란 “외부를 구부려 내 몸으로 만드는 힘”(272)이다. 이 성형의 작업이 바로 삶에 기여하는 노동, 창조적인 노동이다. 이 노동은 ‘잔금’-화폐-이 아니라 삶을 위해 세계를 조형한다. 창조적인 삶을 위한 세계의 조형은 바로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 너머-자유의 왕국인 코뮤니즘-를 구축하는 작업과 통한다.

시인이 인용하고 있는 니체의 사유에 따르면, 스스로를 창조하고 세계를 조형하는 삶은 이 세계 외부에서 주어지는 목적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디오니소스적으로 긍정할 때 가능할 수 있다. 바로 이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을 니체는 운명애(amor fati)라고 말한다. 운명애란 운명에 순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배우고,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407)든다는 의미다. “그 자체의 내면적인 질서에 따라 움직일 뿐”(176)인 세계를 긍정하고 그 세계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그 세계를 구부려 삶과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여 “나의 사랑으로 갖”(407)고자 하는 삶의 태도가 운명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명애란 삶의 저편에서 오는 어떤 초월적인 것에 순응하는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세계의 일부인 “내 몸에서 나오는 ‘더한 무엇이고자 하는 힘’, 그 삶의 본능을 따라 현재의 자기를 넘어서 자기 창조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운명애란 “현실을 구부려 자기로 만들면서 스스로를 향유하며, 더한 삶으로 나가는”, “삶을 사랑하는 유일한 공식”(210)인 것이다.

자기를 넘어서 자신을 아름답게 창조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위버멘쉬’(초인)이다. ‘위버멘쉬’에게 “삶이란 하나의 형상, 하나의 명작,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가는 과정”(328)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기가 쉽지 않듯이 예술로서의 삶을 살기 역시 쉽지 않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습작을 해야 하고 훈련을 해야 하듯이, 예술로서의 삶 역시 연습과 훈련의 반복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 자체를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은 무용-춤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예술화하는 것은 바로 예술로서의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춤을 연습하는 것은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리듬(차이)을 만들어내는 훈련인 것이다. 즉 춤은 차이의 반복이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란 숙명이라기보다는 “영원히 자신을 창조하고 파괴하는”“디오니소스적 세계”(447)를 말한다.

이렇게 차이를 만들어가는 춤이란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볍게 비상하는 것이다. 허나 이 비상은 현실로부터 초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독수리의 활공이 “현실을 끌고 가고 현실이 당기는 긴장 관계”(430)에서 이루어지듯이, 춤 역시 현실의 중력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삶의 차이-생성, 춤추는 삶은 세계의 필연으로부터 관념적으로 초월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는 없다. 그것은 필연 속에 우연을 도입하여 필연을 변화시키는 예술적인 ‘창조-파괴’의 반복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제, 이 영원 회귀하는 과정이 바로 필연으로 나타나는데, 그 필연은 ‘우연의 필연’이 된다. 오철수 시인은 ‘창조-파괴’를 영원히 반복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삶, 그 예술적인 삶을 “우연의 필연으로서의 꽃”(454)이라고 부른다. 하여 이 삶에서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기존으로서의 목적은 없”기에, 시인은 “그러니 살러 이 세상에 온 그대들이여./너의 손으로 우연의 손을 움켜쥐어라.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자유다!”라고 주창한다. 이 우연의 손을 움켜쥐는 작업이 바로 삶을 예술화하는 ‘성형’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오철수 시인이 잘 소개하고 있듯이 니체에게서 예술이란 미학적 판단 대상이 아니라 생리학적 판단 대상이다. 니체는 “내게 필요한 것은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음악이다. 동물적인 삶이 신처럼 느끼며 승리감을 구가하는 음악이다. 춤을 추고 싶은 음악, 냉소적으로 말하면 소화가 잘 되는 음악일 것이다.”(467)라고 말한다. 니체적인 사유에서 좋은 예술이란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것이다. 니체를 따라 오철수 시인은 “삶 그 자체가 신처럼 느껴지고 고양되는 서정”“이 세상을 생생하게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불러내는 서정”(468-469)을 원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서정은 “머리 굴리는 이미지 생산”(473)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생명력이 넘칠 때 생명감정을 고양시키는 그리고 생명력을 부과할 수 있는 것들이 다가”(473)오는 것, ‘힘을 불러내는 서정’은 서정적 주체의 생명력과 대상이 호응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서정은 예전의 도덕적 선과 연관되는 미학에서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다. 오철수 시인이 인용한 니체의 문장을 다시 인용하면, 그 서정은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햇볕 아래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폭풍우가 올 것 같을 때,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황혼이 사라질 무렵과 비 내리는 하늘일 때 비로소 전개되는 그들의 고유의 아름다움이 나타나게”(480-481) 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니체의 이 아름다움이란, 바로 들뢰즈가 개념화한 ‘이-것(haecceity)’의 고유함과 상통한다. “악인에게는 백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아직 많은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481)는 니체의 말은, ‘이-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선 삶의 필요에 기초하여 선악을 넘어선 새로운 감수성이 요구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새로운 감수성의 도래를 위해서 시인이 제시하는 삶의 자세는 늘 “내 안에서 출렁이는 힘의 바다와 그것이 의욕 하는 것이 무엇일까”(488)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오철수 시인은, 이 ‘자신의 물속으로 뛰어드는’, “자기가 자기를 만날 수 있는 가장 기쁜 시간”(490)을 갖기 위해서는 침묵과 고독의 장소-니체가 말하는 ‘황야’-가 필요하다면서 이 책을 마무리 짓는다. 이 침묵과 고독은 고립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산되고 흩어진 자신을 새롭게 양생하는 시간”이며 “자신의 분산이 일으킨 공허하고 우울한 감정을 몰락시키는 것”(490)이다. 시인이 인용하고 있듯이, 니체의 ‘황야’란 다음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는 무해하고 쾌활한 동물이나 새들을 자주 접촉하는 것, 산과 벗하는 것, 그러나 죽은 산이 아니라 하나의 눈을 가진(말하자면 영혼을 지닌) 산과 벗한다는 것, 확실히 혼동할 수도 있으면서 책망 받지 않고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완전히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여관에 있는 방 하나-이것이 여기에서의 ‘황야’인 것이다.(491)

니체의 침묵과 고독의 황야는 역설적으로 “그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완전히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장소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열린 대화는 힘과 의욕을 출렁거리게 만들 것이며, 그리하여 다른 삶의 생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 황야는 인지능력의 수탈을 위해 주체를 탈영토화 한 후 재영토화 하는 자본의 포섭으로부터 탈주하는 장소다. 그와 동시에 그곳은 주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재영토화 하면서 또한 탈영토화 해나갈 수 있는 거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철수의 이 책을 이어 또 다른 책이 써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은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삶 자체로 써야 할 무엇으로, 자본과 국가의 포섭 장치 속에 황야의 장소를 마련하여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여관방을 만들고, 이곳에서 타자와의 만남과 대화를 성취하여 특이하게 상호 생성을 이루는 삶의 과정을 그 주된 내용으로 삼게 될 테다.

사실, 이 <시로 읽는 니체>는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자기를 넘어서는 주체성의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우리의 삶에 세밀하게 얽혀 있는 권력 장치의 교묘함이나 주체성의 형성에서 타자와의 접속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면이 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삶으로의 생성 가능성을 시편의 제시를 통해 구체적인 상황으로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논의가 다소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책을 잇는 또 다른 책이 누군가에 의해 등장하길 바라게 된다. 그 책은 자본과 국가가 펼쳐놓은 포섭 장치의 그물망에 대한 섬세한 인식을 바탕으로, 그 망으로부터 탈주하면서 타자와 생산적으로 접속하고 삶의 상호 생성을 위한 배치를 구축하는 주체성의 형성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주는 무엇이 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책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삶 노래’가 다시 초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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