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년”과 “없는 년” 이야기

[제갈현숙의 봉당풍경](1) 20년 그 이전, 용문에서 존재했던 것들

사회복지에 대한 다른 관점과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달라는 참세상의 제안을 받고 글을 써내려가지 못한 채 두 달 넘게 흥분만 했다. 모든 정치적 아젠다가 사회복지로 수렴됐던 지난 1-2년 동안 풀어내지 못한 채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둔 다른 생각과 의혹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을 갖는 다는 것은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그 벅참은 어깨에 잔뜩 힘을 불어넣더니 한 글자도 쓰지 못하게 나를 짓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이 이 칼럼의 시작이 되었다.

[출처: 윤필]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다. 우리가 자란 곳은 이제는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용문이란 곳이지만, 우리의 유년기엔 서울과 용문은 꽤나 먼 거리였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서울을 다녀오는 친구들도 거의 없었다. 다른 ‘면’단위 동네들도 만찬가지였겠지만, 용문은 작고 폐쇄적인 시골 동네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성공하려면 서울을 가야한다고 배웠고, 용문은 뭔가 낙후되고 후진 곳으로 익히게 됐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경제성장이 모든 가치의 우선이었던 그때(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서울은 경제의 중심부로서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용문과 같은 시골동네는 그런 중심부에 필요한 노동력, 농산물, 그리고 자연자원을 공급했던 주변부였다. 용문에 살면서 느낄 수 없었던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자연 속에서 자연의 비호를 받으면서 행복할 수 있었던 가였다. 어딜 가도 그저 맑기 만한 했던 공기, 개울물을 먹고도 탈이 없었던 시절, 그게 행복인 줄 몰랐다.

“나의 십대에 너가 없었다면, 그리고 다른 친구 몇 명이 없었다면 나는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거야. 너희들 덕에 내 십대가 다행스럽게 지나갔어...” 늦은 퇴근길에 그것도 지난 일 년 동안 못 만났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창이었던 친구가 이런 소리를 하면 누구라도 의심하게 될 것이다. 얘가 무슨 일이지? 처음에 나는 친구의 상태를 진단하느라고 이 친구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데 몇 분 후에 알게 됐다. 친구는 20년 이전에 알 수 없었던, 느끼지 못했던 고마움에 대해 더 늦기 전에 나와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이 친구는 참으로 대견한 사람이다. 아기였을 때 어머니를 여읜 이후, 친구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며 성장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나는 어쩐지 항상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다른 친구와는 싸울 일이지만 그 친구에게는 섣부르게 화내거나 싸움을 걸지 않았던 것 같다. 각각 사람의 성격과 역사가 그 관계를 규정하듯이 나는 그 친구에겐 그렇게 대했다.

그런데 20년도 훨씬 지나서 친구가 묻는다.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관대했니?”라고. 나는 그렇게 관대하거나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 못 된다. 그런데 뒤돌아 생각해보니 내가 특별하게 관대했던 친구 몇 명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관대함은 비단 나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관대했던 친구들에게 다른 친구들도 그렇게 대했다.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들 사이에 보이지 않던 정의 혹은 규칙이 있었던 것 같아. 모든 아이들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을 함께 보내다보면 대충이라도 알게 되는 사실들이 존재한다. 그녀들이 존중받아야하는 이유들과 그렇게 서로 존중해야하는 보이지 않는 규칙들이. 누구도 알려주거나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암묵적인 합의가 우리들 사이에서 존재했던 것이다.

이 암묵적 합의는 학교에서 모의고사를 내세워 등수로 우리를 서열화 시켰던 학교의 규칙만큼이나 중요했고, 학교의 다양한 짱들이 내세웠던 주관적 기준만큼이나 존중받았던 것 같다. 몸담은 세상의 규칙이나 권력의 생리만큼 무시할 수 없었던 이 암묵적 합의는 바로 사람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혼자의 힘으로 채우며 성장해야 했던 친구에게, 또는 언어장애가 있었던 또 다른 친구에게,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아마도 성적 정체성의 혼란으로 항상 혼자만 지냈던 또 다른 친구에게, 이런 특별함이 있었던 친구들에게 차이를 두기보다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들과 관계맺음을 했던 것이다. 시골아이들의 힘은 자연에게 시나브로 알게 된 이치를 사람에게 적용할 줄 아는 것 아닐까? 그래서 세상이 꼭 힘센 사람의 의지와 뜻대로만 되는 것도, 인간의 근본은 비슷해서 서로 차이를 둘 이유가 없다는 것을, 도덕 시간을 통해서 배우는 게 아니라 시골동네의 함께 사는 이치를 통해 터득했던 것은 아닐까?

그 후로 우린 그 동네를 떠나왔고, 이제 용문에서 이런 이치를 찾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등장한 이후 서울이 용문으로 너무 가까워졌고, 어른들은 서울의 규칙을 아이들에게 강요했으며, 아이들은 경쟁에 밀려 자기들끼리의 규칙을 더 이상 만들기 어려워졌다. 복고를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부터 노태우까지 군인출신이 대통령을 했던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 떨리는 기억이 많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침범할 수 없었던 그 시절의 공동체가 있었다.

[출처: 윤필]

어른들이 크면 서울로 가야한다고 했지만 과외와 같은 사교육이 없었고, 대놓고 등수로 아이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유명대학에 입학하면 동네입구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리지만, 그렇게 이름이 걸리지 않은 아이들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그럴싸하게 성공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모두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암묵적 합의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하는 시절에 봉착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제도를 만들어야 하고, 양극화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다양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자연스러운 해법은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고, 그 자리에 다양한 사회복지 제도가 도입되고 있다. 그런데 제도 이전에 우리는 생각해봐야한다. 모든 인간의 평등은 무엇으로 달성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나는 이 의문을 봉당을 써 내려가며 하나씩 풀어볼 요량이다.

친구는 내게 부모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있는 년’이라고 했다. ‘있는 년’이기에 자수성가해야한다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나 자신에 대한 고민과 집중을 더 많이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있는 년으로서 십대를 보내는 동안 친구는 반드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닦기 위해 죽자 살자 공부해야 했고, 그 어떤 일탈도 꿈꿔보지 못했다고 한다.

생의 조건을 혼자 힘으로 개척해 온 수많은 사람들의 고단함에 우리는 따뜻한 위안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개척을 여전히 혼자 해내야만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를 꿈꿔본다. 적어도 사회복지가 제도로써 그들에게 일탈과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온전히 부여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냄새나는 정도는 상상해봐야 하지 않을까?


덧말
봉당은 독립된 가옥에서 안방과 건너방 사이를 이어주는 마루를 놓을 자리에 흙바닥을 그대로 둔 곳을 일컫는 말이다. 흙바닥이라는 자연 상태에서 사회복지로 주공간과 곁공간을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칼럼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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