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노동정치를 생각하며, 순자 씨를 곱씹다

[제갈현숙의 봉당풍경](2) 노동이 사라진 자리에서

분명한 이유로 사람을 증오하거나 원망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이런 감정은 개인적 관계에서 생기기 마련이지만, 한 번도 대면하지 않은 어떤 이에게 생기기도 한다. 그런 어떤 이 중 이순자가 있었다. 불행히도 이 자의 이름정도는 잊힐 만큼 90년대 이후 수많은 정치인과 자본가들은 노동자와 민중을 탄압해왔다. 좋은 기억은 아니지만 상기시키자면, 이 순자는 전두환의 부인을 말한다. 이자들로 인해 순자라는 이름에 대한 분노가 생겼다.

대학시절 근현대사를 배우면서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로막은 주요 주체가 바로 군사독재, 국가권력, 자본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전두환은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면서 무고한 207명의 시민을 죽였고, 3,000명이 넘는 시민들은 부상시키는 등 국민의 목숨 값으로 독재정권을 수립했다. 그렇게 수립된 독재정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영부인노릇을 하며 땡전뉴스(9시 땡하면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던 당시 뉴스)마다 등장하곤 했다. 아이러니는 전두환은 대통령 취임사에서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국가 건설’을 천명했다는 점이다. 시민을 죽이며 대통령 자리에 오른 자가 ‘정의’란 단어를 마이클 샌델 보다 더 자주 사용했고, 복지국가 역시도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한 기재로 도구화시켰다. 여전히 이런 도구들은 민중의 삶은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인들의 레토릭으로 활용되고 있다. 독재, 국가폭력, 비민주로 상징되는 이자들로 인해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순자에 대한 원망을 풀어내지 못했다.

그런데 2012년 다른 순자 씨가 다가왔다.

청소노동자이며 19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1번이었던 김순자. 현재와 같은 선거구조에서 순자 씨가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이석기가 자진 사퇴하는 것만큼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엔 국회의원 후보자 중 단연 독보적으로 빛났던 그녀였다.

순자 씨는 대학에서 10년째 청소노동자로 살아왔다. 그녀는 청소노동을 하는 동안 청소노동자들을 인격체로 대우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을 당했다. 그리고 7년 동안 저임금을 받으며 일했지만 일방적인 계약해지를 통보받는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차별까지 겪었다. 그녀는 차별에 대한 억울함에 학교 본관 앞에 천막을 치면서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열었다. 억압과 설움을 받고도 항변하지 못하는 청소아주머니에서 차별에 맞서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 것이다. 순자 씨와 동료들의 투쟁으로 그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 많은 순자 씨들은 아직까지 근무연속이 반영되지 않는 시급 4,500원의 계약직 노동자로 살고 있다.


그녀가 출마한 첫 번째 이유는 ‘정치는 돈 많고 많이 배운 사람들이 주로 하는데, 그들이 우리를 절대 대신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 였고, 두 번째 이유는 ‘우리도 직접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전국의 수많은 청소노동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순자 씨를 정면에 내세운 진보신당의 정치에 공감했고, 그렇게 순자 씨로 대표될 수 있는 노동정치를 응원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통진당 사태를 지켜보며 여러 가지 해법과 대안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 민노당을 건설하며 노동이 품었던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관점에서 진보정치를 평가하는 입장은 매우 부족하다. 이에 순자 씨로 대표되는 노동정치를 통해 진보정치가 놓쳤던 진보성과 차별화된 복지 전략을 재고해 본다. 전자를 위해서는 탈노동정치의 경로와 진보정당의 민주주의 문제를, 후자를 위해서는 진보정치가 채워야할 복지정치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이다.

첫째, 탈노동정치의 경로를 살펴보기 위해서 순자 씨로 대표되는 노동정치를 먼저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이 정치는 노동자가 체감하고 직면한 문제에 대해 노동현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누구를 대변하는 방식보다는 당사자들의 직접행동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이 조직되고 요구가 모아진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을 접하게 되고, 정치적으로도 성장하게 된다. 우리는 청소노동자를 포함한 비정규직 투쟁을 통해 그저 평범하기만 했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로 명명하고 노동운동을 진행해 온 수많은 사례를 접해왔다.

이 과정에 많은 노동자들이 연대해왔고, 수많은 현장 활동가들이 헌신해 왔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가 민주노총이나 진보정당과 같은 정치구조의 상층 단위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틀거리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노동 없는 진보정당, 현장에 없는 민주노총, 노동 없는 복지담론 등이 노동의 현장에서 멀어진 진보진영의 모습을 빗댄 표현들이다. 최근의 사태만을 두고 봤을 때, 탈노동정치의 출발은 ‘묻지 마! 야권연대, 묻지 마! 정당통합’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MB정권을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야권연대가 가동되었고, 수권정당이라는 목표로 인해 진보진영 내부의 다양한 차이와 이견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러한 진보진영의 불안정한 연대구조에서 복지아젠다는 보다 손쉬운 보편성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즉 복지담론은 다양한 진보진영의 차이를 봉합하기 위한 공통분모처럼 활용됐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요소로 평가될 수 있다. 반면 이러한 긍정성은 진보진영 내부의 다양한 차이를 복지아젠다로 타협케 함으로써 근본 계급문제로부터 진보정치를 이탈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노동정치는 바로 이 점에 착목해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자는 시민진영과 노동진영의 공동후보로 지원받았다. 그 과정에서 과거 박원순 후보의 반노동자성에 대한 공론화는 노동진영 내부에서 조차도 회피했다. 박 후보자는 서울시장이 됐고, 그 후 민주통합당에 입당했다. 박 시장은 한편으로는 서울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한 계획을 발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정협의체를 거부하면서 노(동)사(측)민(간)정(부)협의회에 노동이 참여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노동복지센터 사업 참여여부로 민주노총을 압박하고 있다. 박원순의 개혁주의에서는 노동을 어떻게 활용하지에 대한 원칙과 전술이 구사되고 있다.

반면 노동진영은 이러한 개혁주의와의 연대에 대한 원칙과 전술이 합의되지 못한 채 끌려 다니고 있다. 그렇다보니 풍부한 논의를 바탕에 둔 노동정치로의 수렴 과정보다는 저들의 일정에 짜 맞춰진 ‘일단 참여’의 목소리가 상당하다. 원칙을 상기해보자. 노사정협의에 대한 민주노총의 비판적 입장이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적 입장이 우선 참여로 선회할 수 있는 정치 사회적 변화는 어디에 존재하나? 박원순 하나만을 보고, 해법을 풀어가기 어려운 계급문제를 선회하기 위해 복지아젠다로 합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노동정치의 한계를 긋는 것은 정당한가? 또한 협의체에서 노동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을 수 있을 정도의 권력균형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노동의 정확한 현실 진단이 우선적 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자본주의 계급문제를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풀어가기 위한 도전이었고, 그 중 하나로써 대중정당운동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전술은 부르주아 정치구조에서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선택의 순간부터 딜레마가 시작된다. 의회진출, 원내교섭단체가 되기 위해서 결국 계급적 문제보다는 ‘국민을 위한’ 방식의 대중적 의제로 진보정치는 변화를 겪었다. 이에 지난 10년 간 진보정당운동의 정치적 행보는 노동자대중으로부터 시민대중으로 이동되었다.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보다 조금 더 진보적이라고 진보정당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4-5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선거에서 노동문제는 점차적으로 주변화되었고,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마저도 보수 및 자유주의에 맞선 노동문제에 대한 정치적 대결보다는 ‘MB심판’이라는 불분명한 정치지향의 목소리만 냈다. 그런 선거잔치를 치루면서 노동이 선택할 마땅한 정당이나 후보가 미약하니 결국 자신들을 선택할 것이라는 안일함으로 진보를 이용했다. 선거 기간 중 사망한 22번째 쌍용차 희생자에게 조문 온 통진당 및 민노총 지도부는 없었다. 과연 이들이 전국에 곳곳에서 노동문제로 힘들어하는 수많은 순자 씨들에게 얼마나 귀 기울였을까?

둘째, 진보정당의 비민주성의 문제이다. 진보정당의 진보성은 실질 민주주의의 실현과 정착을 위한 부단한 노력에서 보수 및 자유주의 정당과 차별성을 가질 수 있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이해가 관철되는, 즉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원리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제한적인 사고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진보는 노력해왔다. 제도권에서도 다수결로 대변되지 않는 이해와 의견을 의회제도에서 보완하기 위해 비례대표제도를 도입했다. 승자독식 선거구조에서 소수정당의 의회진출을 최소한이라도 보장하기 위한 제도로서 비례대표제도는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비례대표의 후보는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납득할 만한 사회적 상징이 부여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투명한 선출과정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통진당 2번은 듣보잡 이석기, 3번은 청년을 대변하기보다는 특정 정치그룹의 하수 조직으로 비판받는 학생단체 출신의 김재연, 그리고 4번은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피해생존자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2차 가해자들을 비호했던 정진후였고, 그들은 당선됐다. 통진당 비례대표선출과정에 대한 의혹은 이들에 대한 의혹에서 시작되진 않았다. 그러나 중앙위의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보고이후 광범위한 부정부실 선거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진보정당 내부의 비민주성이 공개된 것이다. 이제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아진 경기동부연합은 조사결과에 대한 신뢰성을 제기하면서, 중앙위에서 근래 정치공간에서 보기 드문 액션플레이를 선사했고, 혁신비대위에 맞서 당원비대위를 가동하고 있다. 이 기회를 틈타 검찰은 당원명부 등이 담긴 서버를 탈취해 갔다. 그야말로 사면초가의 상태이다.

경기동부연합은 그들의 당권을 지키기 위해 전면전을 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인 ‘실체적 진실’을 먼저 밝힌 후 책임진다는 논리는 이후 진보진영이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맞설 정치적 논리를 제한하는 선례로 남을 것이다. 즉 진보정당에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부정과 부패의 고리로 연결된 부르주아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대중의 정치적 감성이나 판단은 우선 무시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면 책임질 것이라는 면죄부를 선사한 것이다.

경기동부연합이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비민주적 조직 운영방식을 당권확보를 위해 진보정당 내부에 그대로 활용한 점, 비민주성의 문제가 제기되자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점, 그리고 자신들의 당권이 진보운동의 발전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됨으로써 진보진영 전체를 위기로 내몰았다는 점이다.

또한 일련의 통진당의 비민주적 문제에 대해 진보신당 탈탕파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작금의 사태는 민노당 분당시기 중요한 분당의 원인이었기도 했다. 통합추진 당시 민노당의 당권구조는 변하지 않았고, 민주적 발전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탈당파는 통합의 필요성만을 강변했다. 몇몇 스타 진보정치인의 국회입성을 위한 방안으로써 통합은 유의미했지만, 그들이 묵과한 비민주성과 탈노동성에 대한 평가가 제출되어야 할 것이다.

순자 씨는 후보 출마의 변에서 그동안 많은 정치인들이 노동자의 현실을 대변해 준다고,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녀의 진단이 옳다. 누군가 대변해주는 정치에서 노동자 스스로가, 민중 스스로가 자신을 그리고 그들의 동료를 자처하는 정치로 진보정치의 주체는 재구성되어야 하고 실질 민주주의를 실현해가야 한다.

끝으로 진보정치에서 채워져야 할 복지정치는 무엇인지 재고해보자. 안철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호응은 아마도 기성 정치인에 대한 비관과 실망의 반작용과 성실함으로 성공한 인간에 대한 선망일 것이다. 인간 안철수의 성실함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의 학번이 81학번이란 점을 감안해서 보자. 광주민중항쟁 이후 세워진 독재정권 하에서 수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은 독재에 맞서 죽음까지 내놓으며 투쟁했다. 그의 인생역정에서 사회적 참여의 모습은 최근 언론에서 대권주자로 부각되기 이전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었다. 경제민주화, 복지의 확대는 이런 정치적 경력이 없는 대권주자에게 매우 매력적인 정책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민중이 원하는 대표가 과연 착한 기업가 내지는 성실한 보수주의자인가?

복지정치를 구성하는 데 있어 요구의 주체, 정치화 과정, 제도의 내용에 있어 반자본적, 적어도 반시장적 요소가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차별화되지 않는다면 전두환 식의 복지국가 건설이나 박근혜 식의 안거낙업(편안하게 살고 즐겁게 일하다)과 같은 허위적 레토릭의 복지와 차별성을 띠기 어렵다. 이것은 비단 70%에게 복지를 줄 것인지, 전체에게 줄 것인지로 대표될 수 없는 근본 복지철학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은 복지로 해결할 수 있는 것과 해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정확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 이것이 혼동됨으로써 생산관계의 근본문제가 복지재분배 영역의 문제인 것처럼 은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폐가 심화될수록 복지는 체제의 재생산과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

순자 씨들이 원하는 우선의 요구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다. 이것이 MB가 레토릭으로만 구사하는 노동을 통한 복지일 것이다. 시장임금의 적정성과 고용의 안정성이 제고될 때, 복지의 기능은 차별에 대한 제재를 통해 불평등 완화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 심지어 진보진영 내부에서 조차 계급투쟁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는 임금 및 고용문제에 대한 근본적 문제보다는 복지영역의 확대로만 모든 문제를 수렴시켜왔다. 생산관계의 근본문제는 그대로 둔 채, 국가 차원의 재분배를 어느 수준에서 할 것인가로 좌우를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의문은 시장에서도 제 몫을 내놓지 않았던 자본이 한 번의 선거와 정권교체로 복지에 필요한 비용을 분담할 것인가이다. 이러한 의문은 복지국가 논쟁에서 검토되지 않았고, 레토릭으로서 보편복지 논쟁은 국가재정규모의 적정성 수준이나 제도의 내용적 차이 수준에서 경쟁되어 왔다. 마치 우리가 직면한 노동 및 사회문제에 대해 복지국가 건설 혹은 복지 확대를 통해 해결될 것처럼 대중을 기만해 왔다.

쌍용차, 재능, 콜텍, KEC, 풍산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순자 씨들이 투쟁하고 있는 장기투쟁 사업장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이들의 문제는 레토릭과 이미지 정치로 해결되지 않고, 그런 류의 정치를 벤치마킹한 진보정치로 결코 풀어갈 수 없다. 순자 씨들의 요구가 그들의 목소리로 정치화되고 노동의 정치와 진보의 정치의 중심에서 고민될 때, 진보의 또 다른 시작과 노동의 복지정치는 차별화된 전술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스웨덴 의회에 극우정당이 최초로 진출한 것은 2010년으로 스웨덴 여성 예술가들은 우경화되어가는 의회정치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조에 레오나르드(Zoe Leonard)의 글을 함께 낭송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그 낭송은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로 시작된다.

“나는 이 나라의 대통령이 냉난방이 안 되는 집에서 살았고, 병원에 가기 위해, 가족생활보조연금을 타기 위해, 고용안정센터에서 구직을 하기 위해 줄을 섰던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실업자였고, 해고당했었고, 성적으로 학대당한 적이 있으며,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쫓겨난 적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와 지독한 사랑에 빠졌었고, 상처 입었으며, 많은 실수를 저질렀으나 거기서 교훈을 얻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요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지 알고 싶다. 왜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대통령은 언제나 꼭두각시이며, 창녀의 고객이며, 결코 창녀 자신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믿게 한 건지 알고 싶다. 왜 그는 항상 사장이며 결코 노동자일 수는 없는 건지, 왜 그는 언제나 거짓말쟁이며, 언제나 도둑이고, 결코 처벌되지는 않는 건지 알고 싶다.”

글의 전문(2012. 4.10 경향일보 ‘목수정의 파리통신’을 보라)에 공감했지만, 우리 상황에 음미해 볼 만한 몇 구절만 옮겨보았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왜 가능하지 않을까? 노동정치의 사고와 판단은 현실성과 가능성을 근거로 재단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보다 현실적이었던, 보다 가능해 보였던 길에 대해 재고할 시점이다. 그래서 아직 가지 못했던 길, 사고의 재단과 불확신 때문에 가지 않았던 길을 걸어봐야 할 때가 아닐까? 그 길 위에 수많은 순자 씨를 만날 것이고 그들 모두와 함께 다른 버전의 노동정치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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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정치 , 김순자 , 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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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ㅇㅇ

    경향일보 --> 경향신문

  • 지나가다

    경향일보라!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정진우와 정진후, 전대갈마누라 이순자와 청소 노동자 순자씨,등등.....
    의도 되었던, 의도 되지 않았든지 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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