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노동자 되기

[양규헌 칼럼] ‘카프카’와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

단순함, 진실을 보는 깨끗한 눈

장기전으로 돌입한 언론파업은 언론의 진실을 알리고자 시작한 언론노동자의 사회적 행동인 동시에 사회적 책무이다. 이명박 정권 이후 철저하게 통제된 언론은 결국 언론노동자에 의해 일전을 벌이고 있다. 언론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없다는 말이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이다. ‘카프카’는 자신이 살았던 당시의 노동자 민중의 세계를 근본부터 포착하고 그에 대응하는 인간을 발견하기 위해 ‘소송’을 비롯한 자신의 문학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내가 인식하고 있는 팩트이면서 절대적으로 인식하고 싶어 하는 나만의 편향된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맑스’는 인간의 미덕중에 단순함을 제일로 좋아했다고 한다. 포장과 이미지가 실체를 가리는 풍요한 시대일수록 단순함을 단순 무식, 저급함으로 오해해서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몸과 정신을 치장하기 위해 화려한 명품이나 성형, 시대에 뒤처지지 않을 것 같은 교양서적들을 곁에 두기도 한다. 실체의 진실과 이미지를 구별하기 위해 ‘상품’이라는 자본주의 세계의 매개를 분석하느라 골몰했던 맑스가 왜 단순함을 미덕으로 봤는지 이해할 만하다. 단순함은 진실을 보게 하는 깨끗한 눈이고 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카프카’는 가장 많이 오해를 받은 작가 중의 한명일지도 모른다. ‘카프카’는 ‘맑스’가 죽은 해에 태어났다. 당시 유럽은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지적하듯이 공산주의 유령이 한차례 유럽 지성사회를 휩쓸고 지나간 시기, 자본주의 모순이 사회주의를 열망하는 분위기로 노동자 대중들을 이끌어가던 시대였다. ‘맑스’가 ‘상품’으로 자본의 작동방식을 분석했다면 ‘카프카’는 사람들과 세계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법원’을 통해 시대의 가장 투명한 모순들을 노동자 의식을 통해 읽어내었던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는 ‘현실’을 ‘관념과 은유’로 바꾼다

  카프카의 모습
‘카프카’의 ‘소송’은 죄가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체포당한 금융(은행) 노동자의 황당함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신의 소송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자 ‘요제프 카’ 주변에는 수많은 조력자들이 등장하나 그들은 하나같이 법원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신부나 화가, 변호사, 일가친지, 그가 쉽게 유혹당하는 여자들도 알고 보면 법원에 피와 살처럼 속해있다. 자본주의에 너무나 익숙한 우리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상품을 소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돈이 없다고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주입이다) ‘카프카’도 그런 인간들의 세상을 그린다.

‘요제프 카’를 위한 조력자는 아무도 없고 법원을 거드는 조력자들이 카를 끊임없이 회유하려고 한다. 체포니 심판이니 소송이니 상급법원이니 하는 법률용어로 쓰인 소설이라서 법에 관한 이야기로 읽히지만 자세히 보면 사람들이 체포당하는 것은 법 말 고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자본, 권력, 언론, 종교, 지식, 사랑 등도 사로잡혀지면 체포당하는 것이 아닌가? 체포당한다는 것은 해방이나 또는 억압을 향해가는 인간의 반작용과 그것의 철학을 낳게 한다. 그래서 일까. 카프카는 생존 시엔 무명작가였지만 사후에 가장 많은 논란과 상반된 해석을 낳게 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카프카’의 조국인 체코 공화국은 부르주아 퇴폐작가로 낙인찍어 ‘카프카’의 작품을 금서목록에 넣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바로 그런 이유로 ‘카프카’를 불안한 내면을 표현했던 부조리 작가로 유행시켰고 아직도 우리에게 ‘카프카’는 좀 이상한 작가로 유통되고 있다. 나라와 시대마다 ‘카프카’는 카프카주의적인 이데올로기(불안, 소외, 인간의 원죄와 부조리 등)를 선전하는 토양이 되었다. 이데올로기 유포자들의 성향에 따라 ‘카프카’의 체포는 다양하게 해석되어왔으나 종교적인 입장과 정신분석 입장에서의 해석이 압도적이었다. 이것은 서구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이자 우리들의 것이 되기도 했다. ‘들뢰즈’나 ‘벤야민’ 등 좌파지식인들은 ‘카프카’의 좌파이념을 새롭게 해석하긴 했으나 노동자가 떠안을 수 있는 단순 명쾌한 논리로 좌파전선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기엔 너무 철학적으로 보인다.

한국처럼 우편향 사회에서는 아예 그런 목소리조차 희귀하지만, 사실 '카프카'뿐만이 아니라 사르트르, 조지오웰, 톨스토이 등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작가들이 오히려 반공사상을 전파하는 무기로 완전 은폐 왜곡되어 있었다는 걸 우리는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한 사회에 유포되는 이데올로기 이면에는 권력과 자본의 조력자들이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그것들을 면면히 이행하여 그들을 위한 지배전략의 일환으로 봉사를 해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이 곧 주류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송’은 소위 열려있는 텍스트라고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흔히 그렇듯 텅 비어있는 틀로 작용한다는 것이고 그건 누가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내용의 획기적인 반전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요제프 카’는 소송을 유예시키며 자신의 삶을 황폐화시켜나가는 법의 조력자들(변호사)이나 주변의 노예들(신부, 화가)을 하나씩 끊고 정리해나가면서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소송을 해결하고자 한다. 법원의 통고가 없었는데도 사형집행인이 올 거라는 걸 알았던 카는 저항 없이 사형집행인을 따라간다. 그들이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 주기를 기다린다. 자신의 부정성(안 좋았던 관습적 습성, 또는 지적우월감 같은)을 중지시키려는 각성자인 ‘요제프 카’는 그들의 칼을 빼앗아 스스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을 법도 하지만 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생의 마지막 순간, 새로 태어나는 한 순간에 그는 개 같은 죽음으로 자신이 사형집행인에게 인식될 것 같아 치욕을 느낀다. 그는 치욕을 희망으로 간직하고 싶다. 저 멀리 허름한 건물에 서서 자신에게 손을 활짝 흔들고 있는 마른 남자를 보면서 ‘요제프 카’는 자신을 이해해줄 친구를 떠올린다. 이는 마치 전태일이 죽으면서 대학생 친구들을 절실히 원했던 심정과 비슷하게 다가온다. ‘전태일’은 자신이 죽으면서도 어린 노동자들을 위해 희망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처럼 ‘요제프 카’도 자신의 죽음 뒤의 일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참 처절한 노동자의 붙잡힘과 해방의 희망에 관한 아주 명확한 이야기이다.

나는 이렇게 단순하고 명확한 이야기가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은유, 상징하는 소설이라고 뻥치고 덧대는 화술들이, 단순함에 대한 미덕을 깔보는 어이없는 소치라고 생각한다. 카프카는 명확하고 단순하게 표현하는 문장법을 좋아했다. 그대로 읽으면 되는 노동자나 인민 대중의 여러 모습을 관찰하고, 쓰고 싶어 했다. 이런 카프카의 의지를 거꾸로 세워서 이용하는 세력들은 복잡하고 은유적인 걸 숭상한다. 그것은 카프카가 비판하고자 했던 법과 법원의 실체였고 노동자의 현실이었는데도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은유라고 말한다.

맑스와 카프카가 현실로 인식한 것을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은유로 관념으로 파악한다. 세상의 진실이 뒤집어지는 순간에 이데올로기가 작동되었고 그 작동법은 노동자들을 타락시킨다. 노동자 자신에 관한 단순한 지혜를 잃어버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을 마구 흡입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자본주의 이념으로 타락하고 범죄에 노출되고 언제든 체포되고 짓밟히고 다시 무정부상태의 대중으로 추락한다.

‘카프카’는 이런 대중이 아닌 각성된 노동자를 만들고 싶어 했던, 그자신이 억압받던 노동자 신분의 작가로, 글을 쓸 수 없을까 하는 걱정이 지나쳐 결혼약속도 몇 번씩 파혼을 하고는 하였다.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글을 썼던 ‘카프카’를 두고 겨우 내면의 불안과 고독에 칩거했던 은둔 작가라는 한국 언론의 평가는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공장일 뿐이다.

지배이데올로기와 언론노동자 파업

이와 더불어 요즘 이상한 평화 상태에 빠져있는 우리 현실이 오버랩 되어 걱정스럽다. 폭풍전야처럼 으스스한 기분이 느껴지기도 한다. 곧 칼부림이 일어날 것 같은 한 순간의 정적상태에 빠져있는 기분이 오랫동안 유지되기도 하는 요즘. 왜 이런 멘탈붕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지금 한국의 노동자, 민중은 두 세계로 분리되어 있다. 언론환경이라는 문을 사이에 두고 한 그룹은 너무 평화롭게 각 채널과 문자들 사이를 횡단한다. 그들은 언론장악이 벌어지는 세계에 완전 체포되어 있다. 밥을 먹으면서도 잠을 자면서도 미디어는 그들의 뇌에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하고 있다. 그들은 언론파업이 벌어지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언론 노동자의 파업상태를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늘 상 파고드는 수많은 채널들은 풍요로운 세계와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세상은 잘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텅 비어 자유로운 채로.


왜곡된 언론과 권력이 합작품이 되어 만들어내는 통치 이데올로기에 스며드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총선이후 보수여당에 투표한 사람들의 이성상태는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하급법원과 그 언저리에서 노예화되어있는 노동자 계급 대중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하다. 권력이 아무리 부패해도 그들을 옹호하고, 부패지수를 카리스마 지수로 읽어내는 그 놀라운 능력을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여야를 불문, 정치노선과 이념, 정책은 소멸되어 가고, 찬란한 지역감정과 학맥, 인맥들의 잔재들은 놀라운 지배세력의 기계들이 되어있다. 정말 절망스러운 세상의 풍경이다.

뼛속까지 노동자가 되기 위해

‘카프카’가 마지막에 희망을 품고자 했던 것, 그것은 법원의 권력과는, 다른 변론을 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동지였다. 그것을 ‘카프카’는 사회주의 공동체에서 실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장생활과 글을 쓰는 틈틈이 사회주의 집회장이나 모임에 찾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에 ‘카프카’가 마흔 한 살에 죽지 않고 더 살았다면 노동자 당건설운동이나 혁명운동에 직접 관여하고자 욕망을 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카프카’는 ‘소송’을 생의 마지막 시기에, 미완성작품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사후의 ‘카프카’는 끊임없이 99%거짓을 유포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해 왔다. 세상은 99%거짓과 1%진실만 있으면 사람들이 믿게 되는 통치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이 말은 99% 복잡함과 1%단순함으로도 치환가능하다. 99%의 거짓과 복잡함의 매트릭스에 늘 걸려있는 거미 같은 우리 노동자들은 1%의 단순하고 거대한 진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이고 노동자는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무기, 즉 노동자의 철학과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가져야만 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을 만들어야한다. 그럴 수 있는 노동자만이 세계를 변혁 할 수 있다.

뼛속 깊이 친미거나 친자본이거나 친일이거나 이런 부류들을 보라. 우리도 뼛속 깊이 친노동자가 되는 매순간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이 필요하다. 계속되는 언론노동자 파업은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쟁취하는 과정이며, 정리해고, 비정규직 문제에 저항하는 투쟁도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노동자계급다운 대중조직과 정치조직이 있을 때, 투쟁전망이 밝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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